1. 외압과 자주의 갈등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는 서양제국의주의 열강의 동점으로 대외적 위기가 고조되었다. 1840년 중국광저우에서 일어난 아편전쟁은 동아시아의 화이론적 체제를 무너뜨린 첫 사건이었다. 아편전쟁은 중국과 영국의 외교·경제·군사적 대결이었을 뿐 아니라 동방세계와 서방세계의 문화적·사상적 격돌이기도 했다.
청은 1852년 영국과 난징조약을 체결하고, 이로써 화이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폐쇄적 체제는 붕괴하기 시작했다. 조선과 일본에 큰 충격을 던져주었으며, 이 두 나라에 대외적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856년, 제2차 아편전쟁이 일어났다. 그 뒤 청은 서양 열강과 차례로 ‘베이징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이는 서세동점의 냉엄한 국제 현실을 조선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주변 국가에 강하게 인식시켜 주었다.
일본 역시 서양열강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사실상의 쇄국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을 상품시장으로 주목하기보다는 자국 선박의 식량과 연료 보충지, 해난을 당했을 때 피난처와 구조를 제공하는 기항지로 생각했다. 미국은 무력으로 수교를 요청했고, 비교적 순순히 개항을 허락하였다. 이어 네덜란드·러시아·영국·프랑스등과도 비슷한 내용의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개방의 문을 완전히 열었다. 개국 이후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막부시대를 종결하고 천황 국가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청과의 대등한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청일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청·일 양국 사이에 조약이지만, 한편으로는 조선에 대한 야심을 함축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야심은 이른바 ‘정한론’을 통해 들어나기 시작하였다. ‘정한론’을 통해 표출되기 시작한 일본의 대외 팽창주의는 타이완 침략을 통해 그 실체를 드러나기 시작했다. 정한론과 타이완 침략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집요한 팽창정책은 조선에 대한 야심으로 이어져 운요호 사건을 유발하고,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한반도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을 둘러싼 19세기의 대외정세는 서양열강에 의해 정통적인 화이론적 체제가 붕괴되는 가운데, 조선을 둘러싼 중국의 동아시아 패권 유지욕과 일본의 대륙 팽창욕이 부딪치면서 대외적으로 위기감이 한층 고조되었다. 특히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뺐기지 않으려는 청·일 양국의 대결은 임오군란·갑신정변·청일전쟁 등으로 이어져 조선의 대외적 위기를 부채질 했다.
2. 정치·경제·사회적 변동
조선 후기로 들어오면서 조선왕조의 지배체제는 여러 측면에서 균열이 일어났다. 우선 수백 년 동안 통치 이데올로기로 자리매김해 왔던 주자학이 경직화·공소화되면서 지배질서는 한 당파에 의해 좌우되는 파행적인 세도정치로 변질되었다. 유능한 관리를 선발하던 과거제도는 형식에 그쳤으며, 매관매직이 성행하였다. 이러한 문란한 정치현실은 특정가문이 독점하는 세도정치로 인해, 견제세력이 없는 가운데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된다.
지방에 대한 중앙의 관리 소홀한 틈을 이용하여 지방수령들은 백성들에게서 가혹한 세금을 징수하고 수탈을 자행하였다. 그 결과 일반 농민들은 최소한의 생명권도 위협받는 지경이 되었다. 분노한 농민들은 여기저기에서 봉기를 일으켰는데 ‘민란의 시대’라고 할 만큼 수많은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조선 후기 백성들은 흔히 삼정이라 불린 전세·군역·환곡의 조세부담을 짊어지고 있었다. 조세와 군역은 평민에게 집중되었고, 환곡은 고리대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중앙 정부에서 세금을 거둬들이는 방식은 총액제였다. 이러한 제도는 수세업무를 위임받은 지방의 수령과 향리가 자의적인 수탈을 가능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왕권에 비해 신권이 비대해지자 기형적인 정치형태인 세도정치가 출현하였다.
이처럼 19세기 사회전반의 여건은 한결 같이 기층민들의 삼ㄹ자체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농민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수탈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형태는 여러 가지로 나타났다. 항조투쟁을 하거나 와언투쟁, 거화투쟁, 정소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수탈에 대한 최고의 투쟁은 민란이었다.
19세기에 민란이 끊임없이 발생했는데 철종과 고종시기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1862년에는 37개 지역에서 민란이 발생하여 ‘임술민란’이라고 한다. 주로 삼남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민란의 전개양상은 읍성을 습격하여 수령을 축출하고, 세금장부를 불태우고 향리들을 잡아 죽이는 등의 형태였다. 하지만 당시지배층은 민란의 원인을 수령의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고 처벌하는 정도로 그쳤다. 하지만 민란이 확대해가자 봉기의 주도한 자들을 모두 잡아 효수하는 강경책을 폈다. 하지만 계속 확대해가자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였다. 하지만 석 달 만에 옛 제도로 돌아갔다. 정부의 의지가 결여된 상태에서 삼정의 폐단은 계속되었다. 고종대 민란은 전국에 거쳐 47회 발생하였다. 철종대에 비해서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다. 전개양상은 철종대와 같은 형태였다.
전직관리, 몰락양반의 지도력에 힘입어 일정한 영향력이 있는 인물과 영세 상공업자와 소상인들이 가난한 농민들과 농민봉기를 전개하였다. 민란의 통한 개혁은 삼정의 폐단문제와수세 담당자의 부정행위 근절이었다. 즉 조세문제에 집중되어 근본적인 토지문제에 제기하지 못한 한계를 보이고, 개별적이며, 지속적·조직적이지 못했고, 봉건제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다소 우발적이고 자연발생적 경향이다. 하지만 이러한 민란은 대규모 항쟁이 나올 수 있는 사회적 토대를 만들었으며, 실패로 얻은 반봉건·반외세의 동학농민 전쟁을 나올 수 있는 밑받침이 되었다.
3. 민중의식 발전과 동학의 창도
왕조 말의 혼란한 사회 속에서도 주목 할 만한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다름 아닌 피지배층들의 의식 변화였다. 조선 후기 민중들을 둘러싼 가혹한 삶의 조건들은 민중들에게 위대한 능력을 지닌 ‘진인’의 출현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진인을 기다리던 민중들의 소망은 이전부터 널리 유행하던 『정감록』 과 같은 비기·도참서에 대한 신앙과 결합되어 ‘정진인 출현설’로 나타났다. 그러나 『정감록』에 의지하거나 미륵불사상을 빌려한 봉기는 근대적인 수준으로 정비 되지 못하였고, 지역적인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이 같은 시대 배경에서 1860년 최제우에 의해 동학이 창도되었다. 동학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어느 정도 성숙해진 민중의식을 기반으로 민중들의 요구와 이해를 집약적으로 대변하였다는 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최제우는 동학을 창도하는 데 종래 유교·불교·선교의 지식 체계와 서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와 함께 그는 민간에 전승되어 온 주술적이나 도참사상까지 포섭하여 개인의 구제와 새로운 사회질서의 도래를 예언했다. 그의 의해 확립된 동학사상은 대체로 후천개벽사상, 시천주사상, 수심정기사상, 치병과 유무상자사상, 그리고 척왜양사상과 정감록적 민중사상의 수용 등으로 집약할 수 있다.
동학창도 이후 경주일대를 중심으로 경상도 지역에 급속히 전파된 동학은 최제우 처형후 불법화하였다. 그러나 동학은 최시형을 중심으로 지하포교활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기반을 넓혀 나갔다. 그리하여 교세가 경상도와 강원도에서 충청도와 전라도 확대되고 근간이 이동하여 동학 주요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조정에서는 적극 탄압하고 지방수령등은 동학도의 재산을 수탈하였는데, 이에 집단적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교조신원운동’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동학사상은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당시 조선왕조가 직면한 역사적 과제 즉 조선과제 즉 조선왕조 내부의 모순을 극복하는 일과 국권을 수호하는 이념적 요소를 제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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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영, 『한국사의 근대성 연구』, 백산서당, 2001
*2010년 전후에 학부 토론용 소논문으로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