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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ho Feb 22. 2024

글감 없는 날


입춘이 지났음에도 어제 함박눈이 내렸다. 자기 전까지는 비가 왔었는데, 아침에 밖에서 삽으로 시멘트 긁는 소리가 들려 평소보다 40분 일찍 일어났다. 

눈은 무게도 거의 없어 시멘트 바닥에 눈삽을 대고 긁어대면, 철거덕 철거덕 맨바닥 긁는 소리밖에 나지 않는다. 그래서 데시벨이 높다는 것을, 눈앞에 수북한 눈다발을 걷어 들이는 앞집 아저씨가 염두에 둘 리는 없겠지. 

그의 열심이 나의 단잠을 방해하였지만, 설경 풍경에 눈감아주기로 한다. 


우리 집 앞은 도시공사와 개인 간 법적 다툼으로, 오랜 시간 공터이다. 공터에 쓰레기가 방치되는 것 때문에 공사에서 사방으로 펜스를 쳤는데, 펜스 안은 노터치의 공간으로, 여름이면 잡초가 2미터 넘게 자란다. 여름 꽃들은 늘 키가 큰데, 잡초도 저리 높게 자랄 수 있다는 것을 공터 보며 알았다. 

겨울이면 잡초들은 마른 가지로 뼈대만 남게 되는데, 거기에 눈송이들이 잔뜩 입체감 있게 내려앉아 있다. 

2층 창문에서 내려 보면 프라이 팬 안에 스파게티 면을 넣고 하얀 치즈 가루 혹은 생크림을 범벅한 느낌?이다. 1프로의 아이보리끼도 섞이면 안 되니까 정확한 표현은 아닐 수도 있겠다.      


오늘은 무슨 글을 쓰나. 도통 글감이 없다.      

연거푸 재채기가 나오고 부비동 쪽 무언가가 만져지는 듯하여 검색을 해본다. 작년 이맘때도 코 안에 혹 같은 것이 잡혔던 것 같은데 일주일 사이 걸린 감기도 잘 낫지 않고, 눈도 늘 부어있고 콧물은 계속 나서. 혹시 이것이 부비동염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아프겠지... 아플 거야...

코를 쑤시고 째면... 혹시 수술을 해야 된다면 어떻게 될까.  

   

덜덜 떨어 그런지 코 한쪽이 꽉 막히고, 맑은 콧물이 주룩 흐른다.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주말이 되기 전에 병원을 찾아가 보기로 한다.      


‘나는 참 혹이 많구나’, 재작년 건강검진에서 폐와 간에 의미 없는 결절이 있고, 갑상선, 가슴에도 혹이 보인다고 했었다. 지인들이 뭘 그렇게 참고 사냐고. 고만 참으라고 했었는데. 코안에도 혹이라니.      


오늘의 글은 ‘코안에 혹이 생겼다’로 지어보자. 혹순이인 나의 신체에 대해 좀 써봐야겠구나. 혹들의 이력은 어떻게 되나. 이렇게 저렇게 머릿속에서 배치를 해본다. 

동네 맘카페에서 물어 찾아간 이비인후과. 그냥 평범한 동네 병원이다. 투명 안전모와 마스크, 하얀 장갑으로 무장한 의사가, 지시 전 마스크를 내리지 말라고 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굳이 말하자면 알레르기성 비염입니다.”     


사진을 철컥 철컥 보여주며 깨끗한 콧 속도 비춰준다. 물집이 잡히는 것 같은 느낌은, 나의 잘못된 촉감 추측일 뿐, 사진 속 속살들은 그 어느 부분보다 매끈해 보인다. 

글감을 잃고 알레르기 비염을 얻은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대학생 때, 나는 둘째 이모네 집에서 몇 년 살며 통학했었다. 이모는 미싱사였고, 그 일을 오래 해왔다. 이모는 웃음이 많았는데 웃음 끝에는 늘 재채기나 콧물이 딸려 왔다. 저녁이면 비염약을 매일 복용했는데, 엄청 졸리다고 했다. 이모는 그 약을 먹고 얼마 안 돼 잠이 들고는 했다. 직업적인 여건으로 이모는 비염이 생겼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왜 이모한테 마스크를 쓰며 일하지 않는 거냐고 묻지 않았었다. 마스크를 하면 좀 나았을 텐데.  

나의 알레르기 비염은 노화가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봄철도 아닌데 없던 알레르기성 비염이 생겼으니까.  

    

오늘은 오전에 아이 친구가 놀러 왔고, 지금도 놀고 있다. 오늘은 글감이 생기려다가 없어져 버린 날이다. 

글감이 생기려다 없어진 날, 글감이 없다고 글을 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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