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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혜원 Sep 06. 2024

졸졸 대는 피아노; 내 귀는 술잔이니 한 잔 따라주오

레드 갤런드 <Gone Again> 들어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TUMucp9cWbY


‘Groovy’ 앨범 들어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Lg2NgcdyDoU


오늘 소개하는 <Gone Again>은 피아니스트 레드 갤런드Red Garland가 이끄는 3중주단 ‘레드 갤런드 트리오’의 곡이다.

어릴 적 레드 갤런드의 피아노 연주를 처음 들었던 것은 라디오에서 그가 사이드 맨으로 참여한, 테너 색서포니스트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의 앨범 ‘Soultrane’ 중 <I Want to Talk about You>를 들려주었을 때였다. 존 콜트레인의 솔로 연주에 이어 레드 갤런드의 피아노 솔로가 나오는데, 그 소리가 마치 귀하디 귀한 술을 귀이 아끼는 이의 술잔에 정성 들여 졸졸 따르는 소리처럼 들렸다. 어른이 된 지금도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아 술맛을 잘 모르는데, 소년 시절의 내가 술맛을 알 리는 없었을 터이지만, 귀한 술 한 잔에 흠뻑 취한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게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내 귀가 술잔이고 레드 갤런드의 피아노 소리는 거기에 졸졸 따라지는 귀한 술이었다.

그 순간을 이렇게까지 상기할 수 있을 정도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재즈 피아니스트는 분명 레드 갤런드일 것이나, 묘하게도 그렇지는 않다. 존 콜트레인의 <I Want to Talk about You> 외에도 트럼펫터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의 <You are My Everything>, <It never Entered My Mind>, <Round Midnight> 등등 레드 갤런드가 사이드 맨으로 참여한 명곡들에서 그의 연주는 그 어떤 재즈 피아니스트들보다도 훌륭했고 내 혼을 흠뻑 취하게 만들었지만, 이상하게도 그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연주한 레드 갤런드 트리오의 곡들은 재즈에 한창 미쳐 있던 10대와 20대 시절 내내 내게 큰 감명을 주지 못했다.

오늘 소개하는 곡 <Gone Again>이 수록된 앨범 ‘Groovy’는 반드시 들어봐야 할 명반 중의 명반으로 꼽히는 걸작이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친구한테서 CD를 빌려 듣고 나서도 수록곡들을 하나도 기억 못 할 만큼 별한 인상을 받지 못했다.

<Gone Again>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다. 2017년 즈음의 어느 이른 봄날 오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연남동 끝자락의 후미진 뒷골목들을 산책하다 우연히 들어간 예쁜 중고 카메라 가게에서 귀에 익은 주법의 피아노 트리오 연주가 흘러나왔다. 레드 갤런드 특유의 졸졸 흐르는 피아노 소리 덕분에 무슨 곡인지는 몰라도 누가 연주하고 있는지는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가게 주인장에게 이 곡 혹시 레드 갤런드의 연주냐고 물었고, 주인장은 그렇다고 했다. 주인장은 곡 제목도 알려주었다. 곡을 찾아보니 소싯적에 듣고 별 감흥 없이 지나갔던 그 앨범 ‘Groovy’에 수록된 곡이었다.

이 시리즈의 제목과 다르게 첫귀에 반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내 이 곡 <Gone Again>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 들었다. 이 해 벚꽃 피는 봄날 밤에는 친하게 지내는 벗과 함께 상수동 당인리 인근의 조용한 밤 벚꽃길을 산책하며 <Gone Again>을 같이 들었다. 벚꽃 잎들이 레드 갤런드의 졸졸 흐르는 피아노 소리 위로 낙하해 부유했다.


레드 갤런드 특유의 졸졸 흐르는 피아노 소리는 그가 블락 코드Block Chord 주법으로 연주할 때 유난히 더 돋보인다. 블락 코드 주법이 어떤 것인지는 바로 아래에 링크 걸어둔 마일즈 데이비스의 곡 <You are My Everything> 도입부에 적나라하게 나온다. 왜 ‘적나라하게’ 라는 적나라한 표현을 썼냐 하면, 재밌게도 이 곡은 시작 부분에 녹음 당시 상황을 편집해서 잘라내지 않고 그대로 수록해 놓아서 어떻게 곡을 시작할 것인지를 두고 마일즈 데이비스가 레드 갤런드에게 디렉팅하는 음성까지 녹음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일즈 데이비스가 연습 삼아 부는 짤막한 뮤트 트럼펫 소리와 현장의 짧은 대화 음성이 나오고 레드 갤런드의 피아노 연주가 시작된다. 하지만 곧 마일즈 데이비스가 휘파람을 불어 피아노 연주를 멈춰 세우고 블락 코드 주법으로 다시 피아노를 시작하라고 레드 갤런드에게 지시한다. 마일즈 데이비스 특유의 거칠고 쉰 목소리로. 레드 갤런드가 처음 곡을 시작할 때와 재차 마일즈의 지시를 따라 다시 시작할 때를 비교해 보면 블락 코드 주법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엿볼 수 있다.


마일즈 데이비스 <You are My Everything> 들어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COqizkflS9U


그런데 블락 코드 주법이 레드 갤런드만의 독창적인 주법은 아니고, 그 자체로는 재즈 피아노 연주의 기본적인 주법들 중 하나라고 한다. 여기에 레드 갤런드는 자신만의 색깔을 입혀 몇 개의 다른 음들을 심음으로써, 음과 음이 예쁘고 맑게 찰나의 엇박자로 충돌하게끔 연주한다. 이 충돌하는 소리가 졸졸 대며 흐르는 바로 그 소리다. 술이나 시냇물이 졸졸 대며 술잔에 따라지거나 물길을 따라 흐르며 이리저리 저들끼리 가볍게 부딪히는 그 소리를 레드 갤런드는 피아노로 기똥차게 만들어낸다. 이는 악보만 가지고서는 재현 불가능한 장인의 손가락 맛이 깃든 소리가 아닐까 싶다. 기존의 블락 코드 주법에 레드 갤런드가 개발한 몇 개의 다른 음들을 함께 짚는 것까지는 피아노 좀 치는 연주자라면 누구나 익혀서 할 수 있을 것이고, 찰나의 엇박자도 흉내 내볼 수는 있겠지만 과연 졸졸 대는 그 소리를 레드 갤런드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처럼 신묘하게 재연해 낼 수 있을까?

그 신묘한 소리를, 소개하는 곡 <Gone Again>을 통해 실컷 만끽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아름다운 연주의 진면목을 대체 소년 시절의 나는 왜 알아보지 못 했던 것일까?

돌이켜 보면 그 시절의 나는 피아노 중심의 3중주단 편성으로는 빌 에반스Bill Evans와 키쓰 재릿Kieth Jarrett 같은 피아니스트들에 푹 빠져 있었고, 그 외에는 거의 듣지 않았던 것 같다. 3중주단으로서 레드 갤런드가 들려주던 소리는 좀 심심하고 깊이 없이 가볍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세간에는 최고로 손 꼽히지만 비슷한 이유에서 개인적으로 외면했던 피아니스트 중에는 오스카 피터슨Oscar Peterson도 있었다. 빌 에반스나 키쓰 재릿의 연주처럼 자욱한 안개 속을 방황하는 듯한 사색적이고 서정적이면서도 정중동의 현란함을 더한 지적이고 시적인 감각을 레드 갤런드나 오스카 피터슨 같은 정통파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는 결여하고 있다고 느꼈다. 50년대 중반 내내 마일즈 데이비스의 아낌을 받으며 그 시기 마일즈 데이비스의 명반들을 함께 작업했던 레드 갤런드는 바로 그 지점 때문에 50년대 후반 들어 마일즈 데이비스와 갈라서게 된다. 레드 갤런드 대신 마일즈 데이비스가 새로 선택한 피아니스트가 바로 빌 에반스였다.

신묘한 손가락 맛의 장인인 레드 갤런드가 피아노를 본격적으로 연주하기 시작한 것은 놀랍게도 성인이 되고 나서라고 한다. 소년 시절에는 앨토 색서폰을 연주했었고, 피아노로 전향한 것은 군악대로 군에 입대하면서부터였다고. 한편 또 한 가지 의외의 사실은 그가 군 생활 당시 권투도 무척 열심히 했다는 것이다. 프로 선수로 뛸 생각까지 했었는지는 모르지만, 훗날 최고의 권투 선수가 되는 슈가 레이 로빈슨Sugar Ray Robinson이라는 인물과 대전한 적도 있다고 한다. 비록 졌지만 말이다.


사각 링 위에서 미래의 권투 영웅한테 이리저리 실컷 얻어터진 한 흑인 청년이 뻐근한 몸으로 텅 빈 군악대 연습실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 얼굴은 여기저기 멍들고 부었고 입술도 터져서 딱지가 앉았다. 그의 군악대 전우 하나가 싸구려 위스키 한 병과 술잔을 구해와서는 위로주나 받으라며 그에게 잔을 건네고 술을 따라준다. 졸졸 대는 달콤한 소리가 술잔을 넘어 피아노가 있는 연습실 풍경 속으로 은은히 울려 퍼진다. 피아노 앞의 멍들고 부은 얼굴의 청년은 천천히 잔을 비운다. 싸구려 술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귀하디 귀한 술이다. 졸졸 대는 소리가 아직도 청년의 귓가에 남아 맴돈다. 청년은 빈 잔을 내려놓고 연주를 시작한다. 귓가를 맴돌던 졸졸 대는 소리가 청년의 귓속으로 들어와 온몸을 타고 흘러 손가락 끝으로 전해진다. 청년은 흥에 취해 생각한다.

’음, 아무렴 권투보다야 이게 나한테 더 잘 맞지…’

청년은 피식 웃는다. 피식 웃는 것 뿐인데도 얼굴 여기저기가 다 욱신거린다.


부록16)

위 글에서 언급한 곡, 존 콜트레인의 ‘Soultrane’ 중에서 <I Want to Talk About You>를 들어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G4cQkkObYDY


부록17)

레드 갤런드가 마일즈 데이비스와 함께 작업한 ‘ing’ 4부작 앨범들 중 ‘Workin’’ 가운데서 <It Never Entered My Mind>를 들어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Np8PJDGq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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