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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혜원 Aug 25. 2024

독점하지 못 하는 슬픔; 에로티시즘의 마성적 권능

프랭크 시나트라 <I’m a Fool to Want You> 들어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DX3r-nOSnN0


‘Where are You?’ 앨범 들어보기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KgtlRAhCp2-yz3Or_0HAKvk7-ZW3ZwrV


1942년 12월31일 하얀 입김마저 순식간에 얼어붙을 듯 추운 뉴욕의 겨울 밤, 아직 영화 제작사들이 극장까지 소유하는 것이 금지되지 않았던 그때, 오늘날까지도 헐리웃 최대 규모의 영화 제작사들 중 하나로 남아 있는 파라마운트Paramount사가 소유하고 있던 파라마운트 극장에서 연말 합동 공연이 열렸다. 젊고 잘생긴 이탈리아계 청년 한 명이 제 차례가 되어 무대에 올라오자, 그를 보기 위해 떼를 지어 몰려들었던 소녀 팬들이 집단적으로 소리를 질러대며 열광했다. 몇몇은 실신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아이돌 현상이 세계 최초로 나타난 역사적인 현장이었고, 무대 위 청년 가수의 이름은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였다.

소녀 팬들이 보여준 열광적인 분위기에 힘입어 연말 특별 공연은 이듬해 봄을 지나서까지 수 개월간 더 지속됐고, 프랭크 시나트라에게 꽃을 던지며 소리를 지르던 소녀들이 나중에는 자기 속옷을 벗어 던지는 일까지 일어났다고 한다.
바로 아래 링크는 당시 프랭크 시나트라의 소녀 팬들의 모습을 담은 기록 필름 영상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Kq_wus1KL6Q&t=11s
대략 우리들의 증조 할머니 뻘 되는 당시 소녀들의 모습은 청춘 스타들에게 열광하는 오늘날 소녀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시로서는 매우 기이했던 이 현상을 언론들이 신문에 기사화 하면서 프랭크 시나트라에게 아이돌Idol이란 호칭을 붙였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세계 최초의 아이돌이었던 것이다. 우상을 뜻하던 용어 아이돌은 이때부터 열광적인 팬을 거느린 청춘 스타들을 수식하는 말이 된다.

소개하는 곡 <I’m a Fool to Want You>에서는 아이돌 시절로부터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이제 막 중년에 접어든 프랭크 시나트라의 훨씬 더 원숙해진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지금까지는 빅밴드Big Band 시대의 스윙재즈Swing Jazz나 그 이전의 랙타임Ragtime 혹은 딕시랜드Dixieland 재즈 등을 건너뛰고 비밥 시대 이후의 모던 재즈곡들을 소개했는데, 이 곡은 좀 다르게 프랭크 시나트라가 대규모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1958년 앨범 ‘Where Are You?’에 수록된 노래다. 참고로, 프랭크 시나트라의 이 곡은 지금 이 시점 세계 최고의 아이돌 중 한 명인 빌리 아일리쉬Billie Eilish가 무척 좋아하는 노래라고도 한다.


<I’m a Fool to Want You>에서 프랭크 시나트라와 협연한 오케스트라는 고든 젠킨스Gordon Jenkins라는 인물이 이끈다. 오케스트라 명도 그의 이름을 따라 ‘고든 젠킨스 오케스트라’다.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이나 카운트 배시Count Basie 등의 재즈 뮤지션들이 이끄는 재즈 오케스트라들은 규모가 작은 15-30인 정도로 구성돼 있었다. 대부분은 현악 파트가 없이 피아노와 베이스와 드럼 그리고 트럼펫*색서폰*트럼본 등이 여럿 모인 브라스 파트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들 재즈 오케스트라들은 간단히 빅 밴드Big Band라고 불렸다.

이들 빅 밴드보다 훨씬 더 인원이 많은 대형 오케스트라들도 한편에서 활발히 활동했는데, 이들 오케스트라들은 구성이 서양고전음악의 교향악단과 유사했다. 규모는 서양고전음악 교향악단보다는 작았지만, 현악 파트는 물론이고 하프나 티파니 등도 악단에 포함된 경우가 많았고, 관악 파트 구성 또한 피콜로나 플룻 혹은 호른 등 빅 밴드보다 훨씬 더 다양한 관악기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팝 오케스트라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고든 젠킨스 오케스트라는 그 시절을 대표하는 팝 오케스트라들 중 하나였다.

그 시절 팝 오케스트라들이 들려주는 사운드는 악기 구성과 규모만큼이나 풍성하고 웅대했다. 재즈가 당시에는 보통의 대중음악이었기 때문에 팝 오케스트라들도 주로 유명 재즈 스탠다드 곡들을 기품 있고 웅장한 편곡으로 연주했다. 소개하는 곡이 수록된 앨범 ‘Where Are You?’ 역시 격조 있게 편곡된 재즈 스탠다드들로 채워져 있다.

<I’m a Fool to Want You>를 들어보자.

I'm a fool to want you

............To want a love that can't be true

A love that's there for others too

............To seek a kiss not mine alone

To share a kiss the Devil has known

.........................

Take me back, I love you

Pity me, I need you

I know it's wrong, it must be wrong

But right or wrong I can't get along without you

가사 때문이겠지만, 고든 젠킨스 오케스트라가 들려주는 여러 겹의 층을 이룬 다양한 악기들의 소리가, 독점적 사랑에 실패하고 공유하는 사랑을 선택하게 된 한 인간의 내면에 겹겹이 쌓인 아픔과 외로움의 깊은 층위를 표현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 고통의 깊이가 소리를 따라 깊고 웅장하게 전해진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부르는 굵은 저음의 노랫소리는 오케스트라가 형성한 악기 선율들의 깊은 층위를 향해 쏟아져 내리는 거대한 슬픔의 폭포수 같다. 그 둘이 뒤섞이며 광대한 부피감으로 휘몰아친다. 이 노래가 단지 바람둥이 연인에게 농락당하는 어느 루저의 얄팍하게 치장된 엄살이 결코 아님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된다.


그런데 이 격정의 노래를 넋 놓고 듣고 있다 보면, 내 마음은 이리저리 휩쓸리다 곡의 맨 밑바닥 기저면을 이루는 한 가지 질문에까지 내려가 닿게 된다.

왜 사랑의 독점에 실패한 이들은 고통을 겪는가, 하는 질문이다.

사적인 인간 관계에도 서열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사회적*경제적 지위나 계급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아니고, 모든 관계에는 더 선호하게 되는 누군가가 있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이 선호는 때로는 의식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무의식적이기도 하다.

우정처럼 다채롭고 다자적인 관계가 허용되는 경우에는 이 선호에 따라 상대에 서열이 매겨져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더 친한 친구, 덜 친한 친구가 있기 마련이고, 이에 대해 별다른 문제 의식을 갖지는 않는다.

나는 이만큼 친하고 가깝다 생각했는데 상대는 나를 그만큼 아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는 배신감도 느껴지고 마음도 적잖이 괴롭기 마련이지만, 성숙한 사람들은 이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울적한 마음을 달랜다. 어지간히 배은망덕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를 문제 삼아 상대를 비난하거나 싸움 거는 행위는 미성숙하고 옹졸한 것으로 여기는 도덕 규칙이 현대 사회에는 암묵적으로 존재한다.

물로 이 암묵적 규칙이 잘 지켜지지는 것은 아니다. 온전히 성숙한 인격체는 세상에 많지 않으며, 친구 사이의 갈등도 대부분 준 만큼 돌려받지 못 하는 울분에서 싹튼다. 그렇다 하더라도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최소한의 양식을 가진 이들이라면, 내가 얼마만큼 주었다고 해서 내게 그만큼 돌려주어야 하는 책무가 상대에게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적어도 머리로는 인정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사는 동안 머리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이 사실을 배워 나간다. 물론, 아무리 몸소 체험하고 배워 나가도 쉬이 익숙해지지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서 준 만큼 돌려주지 않는 상대에 대한 서운함은 언제든 움트기 마련이다.

그 때문일까, 누구나 무의식적으로라도 어느 순간부턴가 마음의 회계장부를 쓰기 시작한다. 지속적으로 주고받는 마음의 크기에 따라 우정의 서열이 자연스레 재조정된다. 서운한 감정 그 자체가 뿌리 뽑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감정을 큰 갈등 없이 슬기롭게 처리하는 법도 조금씩은 터득하게 된다. 생의 경로와 주기를 따라 누군가와 더 친했다가도 덜 친해지기도 하고, 덜 친했다가도 더 친해지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과정을 거치며 우리는 여러 친구들을 두고 다양한 교우 관계를 맺게 된다.

이처럼 여러 친구를 두게 되는 것을 우리는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관계 맺음을 잘 조정하며 두루두루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고 다채로운 우정을 쌓는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고, 다채로운 교우 관계를 장려하는 풍토도 사회에는 뚜렷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연애에 있어서는 우정에서 장려되는 이 풍토가 송두리째 부정당한다. 나의 연인이 서열을 두고 나 이외에도 여러 상대와 동시에 연애 중이라고 생각해 보라. 끔찍할 것이다. 이보다 더더욱 끔찍한 것도 있다. 나의 연인이 나를 포함 서열 없이 똑같이 공평하게 사랑하는 여러 연인을 두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이것이 더더욱 끔찍한 까닭은 나의 연인이 나 말고도 여러 연인을 둔 바람둥이라는 충격적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래도 그 중에서 내가 가장 많은 아낌과 사랑을 받았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이다.

우정과 달리, 연인 관계에 있어서 만큼은 내가 상대에게 가장 많이 사랑 받아야 한다는 욕망이 당연한 권리로서 인정된다. 아니, 가장 많이도 아니고 유일하게 사랑 받아야 하는 존재여야 한다. 이러한 독점 욕망이 연애에서는 미성숙하고 옹졸한 것으로 비난 받지 않는다. 신경증적인 집착으로 발전되지만 않는다면, 사랑에 있어 독점 욕망은 정상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며 장려된다. 너가 나에게 유일하게 특별하고 소중하듯이 나 또한 너에게 유일하게 특별하고 소중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정과 사랑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감정일까? 에로티시즘이라는 욕망과 감정이 개입된다는 점에서 우정과 사랑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우정과 사랑의 감정적 양상이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다.

우정 관계에서도 서로 정말 아끼고 좋아하는 친구 사이라면 단짝처럼 붙어다니며 서로를 깊이 생각하고 농밀한 정서적 교류를 한다. 한쪽에게 더 친한 친구가 생기면 다른 쪽은 질투도 느낀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친한 친구인 관계 역시 대부분의 연애처럼 시간 한정적이다. 대개 시간이 지나면 더 친한 친구 혹은 그만큼 친한 또 다른 친구가 생기기 마련이다. 우정의 경우, 새 친구를 사귀는 것이 완벽하게 허용되고 장려될 뿐 아니라, 마음이 시들해지면 멀어졌다가도 계기가 되면 다시 단짝처럼 친해지는 것을 얼마든지 반복해도 되고, 절교하지 않는 이상 멀어진 친구도 친구로 여기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우정도 사랑처럼 시간 한정적이다는 인식이 다소 희미할 뿐이다. 반면, '사랑에는 유통 기한이 있다.'는 유명한 말이 있을 만큼 우리는 사랑이 시간 한정적이다는 사실만큼은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정말 유일하게 너만이 내게 특별한 존재가 되는 시간은 사랑과 우정 모두 영원하지 않은 것이다. 유통기한에 가까워 올수록 우정이든 사랑이든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에로티시즘의 개입 여부만 제외하면 이처럼 사랑도 우정도 감정의 양상은 대체로 동일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상대에 대한 독점적 욕망이 도덕적으로 장려되는가 부정되는가 하는 이 엄청난 차이는 오직 에로티시즘에 의해 결정 난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에로티시즘의 권능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조금 삐딱하게 보면 에로티시즘이라는 본능이 가진 권능은 상당히 기이한 권능이다. 이 본능을 수반하는 욕망 때문에 연인이라는 관계를 형성했는데, 연인 관계가 형성되고 나면 시간이 지나 한쪽이 마음이 식고 마음 식은 쪽의 눈에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와도 이번에는 이 본능을 도덕적 책임감으로써 억압해야 하는 것이다. 지나간 에로티시즘이 지금의 에로티시즘을 억압하는 형국이다. 만일 억압할 수 없다면, 우정에서와 달리 기존 관계를 반드시 깔끔하게 정리해야만 한다. 그러지 않고 새로운 관계를 맺으면 ‘바람’이라는 죄악을 범한 것이 되고, 정리하고서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고 해도 요즘에는 환승연애라는 용어까지 만들어져서 역시 비난을 피할 수는 없게 된다. 비난의 정도는 작아지겠지만.

그런데 에로티시즘의 권능이란 얼마나 기이한지, 마음 식은 쪽만 못살게 구는 것이 아니라, 아직 마음 식지 않은 쪽도 괴롭힌다. 다른 방식으로 괴롭히지만, 더 잔인하고 더 악랄하게 괴롭힌다. 소개하는 노래 <I’m a Fool to Want You>는 실상 ‘아직 마음 식지 않은 쪽’이 에로티시즘의 권능에 비참하게 괴롭힘 당하는 고통에 대한 것이다. 사랑이 아닌 우정 관계였다면 나 말고 다른 친구랑 더 친해지게 된 친구 때문에 이 정도로 애달픈 격정의 고통을 경험하지는 못할 것이다. 에로티시즘 때문이 아니라면, 애시당초 나 말고 다른 이에게 더 마음 주는 상대를 놓아주지 못하고 처절하게 붙들고 있어야 할 까닭도 없다.

이처럼 에로티시즘의 권능은 악마적 힘에 비견될 만큼 강력하다. 그래서 가사의 이 두 줄이 유독 심장을 할퀸다.

To seek a kiss not mine alone

To share a kiss the Devil has known


꼭 가사 속 주인공처럼 바람 피는 상대를 놓지 못하고 계속 관계를 이어가는 바보가 아니더라도, 바람둥이 연인과 헤어지고 나서도 고통의 트라우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다.

이들에게 아마도 위로가 되지 않을지도 모를(아니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 확실하지만), 좀 도발적인 위로를 하나 건넬까 한다. 우리가 에로티시즘의 권능에 휘둘리는 까닭은 우리가 에로티시즘의 권능을 인정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 에로티시즘이라는 마력의 권능에 우리가 굴복하지 않는 방법은 그 권능을 부인하는 것이다. 에로티시즘을 필연적으로 수반하게 되는 연인 관계라고 해서 내 연인의 눈에 다른 이가 들어85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는 것을 인정해 보자. 내게 연인이 있다고 해도 내 눈에 다른 누군가가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실은 우리모두 마음속 은밀한 곳에서는 다들 알고 있지 않은가.

마음대로 바람 피우며 우리 모두 다자연애를 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연인을 향한 마음이 조금씩 식어가는 가운데 다른 누군가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은 받아들이자는 말이다. 기존의 연인을 떠나 새로운 사랑을 선택했다고 해서 환승연애라고 비난 받아야 할 까닭은 없다.

다만, 그 상황에서 우리는 두 선택지 가운데서 분명하게 하나를 골라야 하며, 이 선택에 투입되는 시간은 짧을수록 좋다.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연인을 기만하는 시간이 길어지게 되니까. 하지만 마음이 식는 순간부터 이미 기만은 시작된 것이므로, 연인 관계에서 최소한 어느 정도의 기만은 불가피하다는 것도 받아들이자.

다른 누군가가 눈에 들어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나의 연인이 다른 사랑을 찾아 나를 떠났을 때 내가 겪어야 하는 고통과 아픔의 부피도 줄어들게 된다. 그 고통과 아픔을 아예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에로티시즘의 권능을 부인하고 나면, 그 고통과 아픔에 집착하는 것만큼은 피할 수 있다. 바람 피운 연인 때문에 겪는 트라우마는 실은 내 마음이 여전히 뜨겁게 끓고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연인이 내 몸에 남긴 에로티시즘의 권능에 굴복하고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상대가 섹스에 천재적인 기질이 있어서 잊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와 나눴던 몸과 몸이 접촉한 경험과 기억에 과도한 의미 부여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예전에 인구에 회자되던 '왕좌의 게임'의 유명한 대사가 있지 않은가.

“권력은 사람들이 그것이 있다고 믿는 곳에 있지요.”

에로티시즘의 기이하고 마성적인 권능은 우리가 그것에 그러한 권능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에로티시즘의 권능을 부인하고 과도한 의미 부여에서 해방되면 그저 다 지나가는 시절연인일 뿐이다. 미움도 그리움도, 남아 있는 사랑도 마음 속 깊은 한 구석에 먼지 뒤집어 쓰고 묻힐 수 있게 된다.


권능*권력에 대한 말이 나온 김에 좀 다른 얘기이기는 하지만, 끝으로 프랭크 시나트라의 권력 지향적 면모에 대해서 덧붙여 볼까 한다.

생의 전반기 내내 프랭크 시나트라는 인종 차별에 적극 반대하고 사회적 약자들의 사회 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두는 등 상당히 리버럴Lberal한 정치색을 띠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개인적 정치관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당시가 (메카시즘 광풍이 불었던 짧은 몇 년을 제외하면) 보수당인 공화당조차도 친노동적인 정책과 적극적인 부의 재분배 정책을 펼 정도로 미국 사회 전반이 진보의 물결을 타던 리버럴의 시대였기 때문인지, 그는 적극적인 민주당 지지자로서 민주당 선거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소개하는 곡 <I’m a Fool to Want You>를 발표하던 그 즈음 프랭크 시나트라는 민주당 정치인 존 케네디John F. Kenedy와 매우 두터운 친분을 쌓기도 했다. 존 케네디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 프랭크 시나트라는 존 케네디의 최측근 중 한 명으로서 선거 운동을 열렬히 도왔다고 한다. 대통령이 된 존 케네디가 몇 해 뒤 암살 당했을 때는 충격과 슬픔에 빠져 종일 방에만 틀어박혀 지냈다고도 한다.

70년대로 접어들면서 보수의 시대가 도래할 즘부터는, 나이가 들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바뀌는 새 시대의 흐름에 발 빠르게 적응했기 때문인지, 프랭크 시나트라의 정치색은 점점 보수로 바뀌었고 공화당 대통령 리차드 닉슨Richard Nixon 지지자로 돌아선다. 이후 중간에 한 차례 잠시 민주당의 진보적인 정치인 지미 카터Jimmy Carter가 대통령이 되기는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7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 미국은 긴 보수화의 물결을 타게 되고, 프랭크 시나트라는 이 시기 내내 열렬한 공화당 지지 연예인으로서 공화당 선거 캠페인과 정치 자금 모금 등에 깊숙이 관여한다.

정계와의 특수 관계는 미국 국내에 국한되지 않고 해외에까지 닿아 있었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이스라엘의 벤구리온Ben-Gurion 총리 그리고 반미 반이스라엘이었다가 친미 친이스라엘 국가로 돌아섰던 이집트의 사다트Sadat 대통령과도 막역하게 지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샘 지안카나Sam Giancan를 비롯한 악명 높은 마피아 두목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영화 ‘대부’ 시리즈 1편에 서브 플롯으로 등장하는 배우 겸 가수의 이야기가 그를 모델로 했다는 소문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항상, 사람들이 권력이 있다고 믿는 곳에 가 있었던 것이다.


부록13)

에로티시즘의 마성적인 권능에 포로가 된 이의 고통을 노래한 또 다른 곡을 하나 더 들어보자. 니나 시몬Nina Simone의 <Don’t Explain>이다.

바람 피우고 셔츠에 립스틱 자국을 묻히고 돌아온 남편에게 애절한 목소리로,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돌아온 것만으로도 기쁘다고 얘기하는 한 여자의 가슴 아픈 노래다.

https://www.youtube.com/watch?v=_xBBpOPDm8s


부록14)

프랭크 시나트라의 또 다른 노래 <I Fall in Love Too Easily> 도 들어보자. 쳇 베이커Chet Baker의 노래로도 유명한 곡이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한창 젊을 적 뮤지컬 영화 ‘Anchors Aweigh‘에 출연해 직접 피아노를 치며 노래하는 영상으로 감상해 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oHm0-xiOih4


부록15)

쳇 베이커의 곡으로도 <I Fall in Love Too Easily>를 들어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y6qfgwy77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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