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항상 예상밖의 일들로 새로고침된다.
선생님의 호명에 따라 한 명씩 앞으로 나가 수학능력시험 성적표를 받고 있었다.
나의 이름을 기다리는데 긴장감으로 손에 땀이 났다.
성적표를 받아 든 아이들의 표정은 담담하거나, 살짝 일그러지거나, 아니면 자리로 돌아와 책상에
엎드려 우는 3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드디어 내 이름이 불리었다.
성적표를 받았지만 왠지 겁이 나 얼른 성적표를 반으로 접었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와 심호흡을 한 뒤 성적표를 펼쳤다.
" ... "
난 담담하지도, 살짝 일그러지거나, 책상에 엎드려 울지도 않았다.
시간이 멈춘 듯 그대로 얼어 붙었다.
언어영역 점수가 10점대
가장 자신있던 과목이었고, 늘 2~4개만 틀리던 과목이었다.
가채점을 했을 때도 2개를 틀렸을 뿐이었는데 무언가 잘못됬다. 답안지를 밀려 쓴것이다.
하지만 어디에도 하소연을 할 수 없었다.
큰 시험에서 하찮은 실수로 인생을 망쳐버린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한 나머지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날 밤 나는 한강에 갔다.
차가운 한강바람은 내 눈물과 범벅이 되서 가슴까지 시리게 했다.
밤하늘이 유독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참고로 그 시절 한강은 조명이 많지 않아 어두웠고 특히나 저녁은 비행청소년들로 가득한
우범지대이기도 했다.
정신없이 울다가 바라 본 내 눈앞에 펼쳐진 한강은 까막득한 블랙홀 같았다.
어디서부터 하늘인지 어디까지 강인지도 알 수 없는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 같은 두려움이 솟구쳤다.
덜컥 겁이 난 나는 무서워 쫒기듯 도망쳤다.
" 눈으로 수평선을 구분할 수 있을 때 다시 와서 죽자!" 는 다짐을 하면서...
그렇게 나는 죽지도 못하고 살아남았다. 물론 원하는 대학과 학과에 갈 수 없었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부모님과 선생님의 합의 끝에 나는 전문대 유악교육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부모님의 바램대로 나를 유아교육과에 왔지만,
왠지 전문대학을 다니는 모든 학우들이 나와 같은 루저로 비쳐져 학교가 싫었다.
( 지금이나마 이 글로 나의 동창생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함을 표한다.)
나는 강의에 자주 빠졌고, 출석만 부르고 몰래 나가서 낮술을 마시며 시간들을 보냈다.
그 시절, 나를 망가뜨리는 것이 내가 주는 벌이었다.
그 결과 학점 B이하는 절대로 안 준다는 교수님에게 D를 받았고,
" 넌 낙제야! 내 수업에 들어오지마!" 라는 교수님의 호통과 함께 청강금지령이 떨어졌다.
과 친구들이 걱정을 해주었지만, 난 대수롭지 않게 여겨었다.
' 어차피, 난 언젠가 다시 한강에 갈꺼니까."
전문대생이었던 나는 2학년 1학기에 교생실습을 나가게 되었다.
유치원 교사가 되는 것에 관심이 없었던 나는 사실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이 일도 없었다.
아이들에게도 큰 관심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아이들은 달랐다.
" 선생님은 이름이 뭐예요?"
" 우와. 선생님, 너무 예뻐요."
" 선생님, 나랑 같이 놀아요."
" 선생님이 너무 좋아요."
아이들은 내가 어떤 대학을 다니는지, 내가 어떻게 루저가 됬는지 관심이 없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를 바라봐주고 따뜻한 관심을 가져주었다.
본 지 10분도 안돼 나를 좋아해주었고, 함께 하고 싶어했다.
나를 대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왠지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 그래, 이 아이들에게만은 나는 더 이상 쓸모없는 루저가 아니야.
이 아이들에게만은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 "
그렇게 교생 실습 첫 날, 나는 진심으로 유치원 교사가 되고 싶어졌다.
그 다짐을 한 후, 26년동안
여전히 난 유치원 교사를 하고 있다. 아니, 유치원 엄마가 되었다.
과친구들이 재미로 뽑은
졸업하고 유치원 교사를 하지 않을 것 같은 학생 1위로 선정되었던 내가
대부분의 동창생들도 그만둬버린 유치원교사를
아이러니하게 홀로 하고 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비결이 뭐냐고 묻는다면
아이들과 만나는 세상이 매우 특별하다는 것이다.
그 특별한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