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곳

미국에서 배운 아이를 대하는 태도

by 사이의 삶



미국 생활을 하며 낯설고 인상 깊었던 장면을 꼽으라면,

노란 스쿨버스의 'STOP' 문화였다.

아이들이 내리고 타는 그 짧은 순간,

왕복 모든 차선의 차들이 모두 속도를 줄여 멈춰 선다.

단순한 교통 규칙을 넘어,

사회 전체가 아이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두고 있다는 강한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이를 동반한 외출이 눈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우리 가족이 좋아하는 햄버거 체인인 햇 버거(Hat Creek Burger Company)는 매장마다 큰 야외 놀이터가 있다.

햄버거를 먹으며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면서 식당의 불청객이 아니라 주인공 같이 느껴졌다.



동네 레스토랑들을 다니면서 놀랐던 점은, 어딜 가나 키즈 메뉴가 준비돼 있었고,

자리에 앉으면 서버는 식사시간 중에 즐길 수 있는 색연필과 액티비티 종이를 준비해 주었다.

아이들은 식당에서 정숙하게 예의를 차려야 하는 대상이라기 보단, 식사 시간을 함께 즐기는 손님으로 대우해 주는 것이다.

식당 안에 아이들이 울거나 실수해도 사람들은 눈총대신 부드러운 미소를 건넨다.

완벽하게 행동해야 하는 '작은 어른'이 아니라,

실수하며 배우는 '아이'로 존재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그 미소 속에 담겨 있다.




최근에는 아이들 학교에서 열린 '북페어'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영어가 서툰 엄마로서 아이들을 응대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인상 깊은 장면들을 목격했다.

내 영어가 완벽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책에 대해 한참이나 눈을 빛내며 설명해 주었고,

'1+1 행사 중이라 하나 더 골라오면 뭐든지 공짜야'라고 알려주어도

'고맙지만 나는 이 것만 필요해요 굳이 필요 없는 책을 하나 더 가질 필요는 없어요' 라며 자신의 취향과 신념을 성숙하게 말하기도 했다.


1불을 들고 와 10불짜리 다이어리를 사려고 한 아이도 있었다.

놀라운 점은 곁에 있던 봉사활동을 같이 하던 엄마들의 반응이다.

아이의 요구를 터무니없는 생떼로 치부하지 않고, 귀여운 제안으로 받아들이며 정중하게 대했다.


'북페어가 너무 좋은데 일주일 더 연장하고 다음 주는 무료료 나눠주면 어때요?'라는 질문에 엉뚱함으로 넘기지 않고, '정말 멋진 아이디어야' 라며 체면을 세워주며 진지하게 답해 주었다.

애들이 뭘 알겠어라는 태도는 찾아볼 수 없고, 서툰 표현과 호기심이 존중받는 것을 보며

아이들의 자존감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부모인 나도 배울 수 있었다.


미국은 비싼 보육 비용과 한국처럼 세밀하지 않은 정부 지원에도 불구하고,

세명 혹은 네 명의 아이들이 북적이는 다자녀 가정을 흔히 볼 수 있다.

아이와 함께 어딜 가도 환영받는 분위기, 아이의 실수를 크게 문제 삼지 않는 시선.

그런 심리적 안정감이 부모에게는 꽤 큰 힘이 되는 것 같다.

국가의 지원보다 더 부러웠던 것은 아이가 바닥에 분필로 낙서를 해도 '귀엽다'라고 웃어주는 여유였다.


아이를 미성숙한 존재가 아닌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작은 사람으로 대하는 문화.

숫자의 가치는 몰라도 자신의 취향은 분명한 아이들이 당당하게 자랄 수 있는 힘은

이런 일상의 존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노란 스쿨버스가 멈추듯, 나도 가끔은 아이들의 엉뚱하고 귀여운 목소리에 멈춰 서서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 작은 목소리 안에, 우리가 배워야 할 미래가 들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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