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도서관에서 시작된 나의 첫 사회생활

버려질 뻔한 책들이 2만 달러가 되는 순간.

by 사이의 삶

미국에 온 뒤로 줄곧 나는 '받는 사람'이었다.

서툰 영어를 인내심 있게 들어주는 ESL 선생님, 튜터 선생님, 도와주는 이웃들.

그들의 친절 덕분에 무사히 정착할 수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갚아야 하는 빚 같이 것이 늘 남아 있었다.


나도 무언가 돌려주고 싶다.


그 마음 하나로 집 근처 시립 도서관의 자원봉사를 신청했다.

일대일 튜터링이나 교실 안에서의 대화가 아니라 진짜 '미국 사회'의 일원으로 나가는 첫날.

괜히 긴장했다. 간단한 영어조차 알아듣지 못해 민폐가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선 나를 맞이 한건 차가운 시선이 아닌, 따뜻한 미소였다.

내가 맡은 일은 기부로 들어온 수천 권의 책을 섹션별로 분류하는 일이었다.

소설, 어린이책, 역사, 요리 등등


먼지 쌓인 책들을 닦아 가며 차곡차곡 상자에 담다 보니,

나는 새로운 기부 문화를 목격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손에 버려질 뻔한 책들이 이곳에 다시 모여 생명력을 얻는 과정이었다.


이 책들은 분기마다 열리는 중고 책 판매 행사 Used Book Sale을 통해

필요한 사람들의 손으로 다시 돌아간다.


본격적인 북세일이 시작된 일주일은 그야말로 전쟁 같았다.

오픈 시간 전부터 사람들이 줄을 섰고

나는 손짓과 발짓을 섞어가며,

책을 정리하고 계산을 돕고 카트를 정리하며 땀을 뻘뻘 흘렸다.


어느덧 교대 시간이 되어 짐을 챙기는데,

버지니아 할머니가 "다른 사람은 가도 되는데, 너는 가면 안 돼"라고 농담을 해주셨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조금은 필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졌다.


북세일 현장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오간다.

그중 유독 기억에 남는 한 아기 엄마가 있었다.

조금은 낡고 해진 옷차림이었지만, 바구니에는 유아용 책이 50권이 넘게 담겨 있었다.

아기를 안고 그 무거운 짐을 옮기기 버거워 보여 나는 기꺼이 주차장까지 짐을 옮겨주겠다고 나섰다.

어색함을 깨보려 서툰 영어로 "아이들이 책을 정말 좋아하나 봐요."라고 말을 건넸다.

아이엄마는 수줍게 웃으면서

"평소에 책을 마음껏 사주지 못해서, 이 날만 손꼽아 기다려요. 오늘 정말 행복하네요."

그녀의 대답에서 도서관 북세일의 의미와 이유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책장에서 정리된 책이지만, 누군가에겐 아이에게 읽어줄 소중한 책을

선물해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였던 것이다.


이번 봉사가 더욱 특별했던 이유는 중간중간 남편과 아이들도 기꺼이 일손을 보탰기 때문이다.

남편은 상자를 옮겼고, 아이들은 고사리 손으로 책을 분류하고 정리했다.

동료 봉사자들은 우리 가족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아낌없는 칭찬을 보내주었다.


아이들에게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백번의 말보다,

기부된 책이 누군가의 기쁨이 되는 과정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살아있는 교육이라 생각한다.




행사가 끝난 뒤 자원봉사자들에게 이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이번 북세일의 총수익금은 $28,728(약 38,000만 원)입니다.

여러분의 헌신적인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나는 그 숫자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책 하나당 1달러, 혹은 50센트 정도였다.

버려질 뻔했던 책들이 이렇게 큰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언어가 완벽하지 않아도, 몸을 사리지 않고 땀을 흘리며 보낸 일주일의 시간이

나에게 또렷한 의미로 다가왔다.




봉사자들과 함께한 크리스마스 파티는 내가 이 팀의 일원임을 확실히 느끼게 해 준 순간이었다.

북미의 전통적인 선물 교환 게임인 화이트 엘리펀트가 열렸다.

가져온 선물을 차례대로 뽑되, 마음에 드는 선물을 서로 뺏을 수 있는 조금은 유쾌한 게임이다.


나는 고민 끝에 한국산 마스크팩과, 서점 기프트 카드를 준비했는데,

내 선물은 참가자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아이템이 돼서 사람들이 계속 선물을 서로 뺏어 갔고,

결국 규칙에 따라 더 이상 뺏을 수 없는 상태가 될 때까지 주인이 계속 바뀌었다.


나는 영어로 유창하게 농담을 던지지는 못했지만,

내가 준비한 선물을 보며 환호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벽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더 이상 도움을 받기만 하는 이방인이 아니었다.


미국 사회가 두려웠던 1년 전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완벽한 문법보다 중요한 것은 나누고자 하는 진심이며, 그 진심은 생각보다 잘 통한다는 것을.


받은 친절을 돌려주러 갔던 도서관에서,

나는 오히려 함께 살아가는 법이라는 더 큰 선물을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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