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각자의 언어
보라색 군무로 더운 여름을 밝혔던 맥문동이 초록 열매를 달았다. 맥문동은 하나하나를 자세히 뜯어보는 맛도 좋지만, 푸른 솔숲 아래 가지런히 모여 핀 모습을 보고 있으면 신비롭고 그윽하다. 푸르기만 한 여름에 어디서 온 색일까 싶어서. 꽃 진 줄 모르게 달리다 잠시 멈춘 자리에서 어느새 빛나는 초록을 만난다. 초록은 여름에 태어난 온갖 생명의 소리와 향기를 품고 더욱 익어갈 테다.
씨를 심는 걸 좋아하는 동료에게 물은 적이 있다. 모종을 심으면 키우기도 쉬울 텐데 왜 굳이 씨를 심느냐고. 씨는 땅을 올려 싹이 트기까지 기다려야 하고, 그러다 초록 싹이 뾰족하게 올라오는 걸 보면 그렇게 좋아요. 집에 내 공간은 없는데 베란다 한편에 의자를 놓아두고 거기 앉아 자라는 식물을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을 몰라요. 나의 작은 행복이죠. 그러면서 씨에서 얻은 싹을 들고 와 나눔을 한다.
파랑새를 찾으러 길을 떠나는 틸틸과 미틸 이야기엔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는 가르침이 있다. 책엔 길이 있고, 배움이 있기도 하지만 줄거리보다는 생각지도 못한 한 단어, 한 문장에 마음을 뺏기기도 한다. 행복을 찾아 먼 곳을 돌아 집에 온 그들에게 기다리고 있던 것을 기억하시는지.
덜컹대는 창문의 행복, 맑은 공기의 행복, 햇빛이 비치는 시간의 행복, 별을 바라보는 행복, 겨울 난로의 행복, 맨발로 달리는 행복……. 말고도 그들만 아는 이야기가 있는 반죽통, 설탕통, 수도꼭지 같은 말들은 행복과 어떤 사이일까 궁금하지만 미루어 짐작해 본다. 그만한 나이 때 나는 어땠더라…. 책상 밑 어두운 공간이 좋았고, 눈 쌓인 대문 아래 누군가 놓고 간 크리스마스 카드로 가는 설렘이 좋았지. 행복은 누구나 그럴 만하다고 끄덕이는 보편적 단어는 아니다. 행복은 내면이 충만할 때 오는 각자의 언어다.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순간을 느끼면 된다.
맥문동 열매를 보며 어머 벌써 때가 되었구나, 아침 해에 반짝이는 너의 계절을 하마터면 못 볼 뻔했어. 행복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빛이 바래고 말 것 같아서 이렇게 쓴다. 잠시라도 널 조우한 순간이 고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