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잖은 선비

우엉의 맛

by 달랑무

우엉 반찬을 즐긴다. 처음 우엉 맛을 보았던 때는 어느 절에서였다. 기억엔 잣죽과 함께. 김치나 동치미 국물이 있어야 밍밍한 죽을 먹었는데 흔한 김치 아닌 우엉을 반찬으로 대하고 보니 제법 송구스러웠다. 잣죽도 흔하지 않았지만,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우엉이라는 식물을 본 적이 없었던 것도 한몫은 한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 물고기 먹고, 산골에 사는 사람 감자 궈 먹는다는 노래처럼 바다가 가까운 동네에선 공기도 비렸다. 배추나 무, 콩나물, 당근, 감자, 고구마는 집식구처럼 얼굴만 봐도 어떤 상탠지 아는 사이지만, 우엉은 글쎄다.


김밥 재료에 신경을 쓸라치면 나는 우선 우엉과 소고기를 산다. 일부러 우엉채를 얇게 치고 윤이 나게 볶는다. 김밥을 마는 사람 맘이라 아이들이 좋아하건 말건이지만, 이렇게 말아놓으면 얇은 채의 덕인지, 양념 맛 탓인지 군말 없이 잘 먹는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우엉 하나론 젓가락질 한 번 어림없었을 것을 다른 재료에 손 잡혀 불평 없이 먹이고 나면 나는 안 먹어도 배부르다. 품이 들어도 이 난장을 한 번 하고나면 엄마 노릇 잘 한거야, 꾀를 쓴 생색이 난무한다. 꾀순이의 반열에 오르지는 못해도 한 번씩은 할 만하다.


점심 약속이 있어 한식당을 찾았는데 거기선 우엉튀김이 나온다. 곤드레 밥 집에선 우엉조림이 나오고. 나는 어떻게 해도 그런 식감을 낼 수가 없던데.. 서너 번 청한다. 어쩌면 이렇게, 하며 쫀득의 경지를 탐한다. 언젠가부터 우엉 반찬이 나오는 식당은 뭔가 남다르다 생각하기까지에 이른다. 손쉬운 재료들이 많은데 손 한 번 더 가는 번거로움을 사뿐 넘어서는 집은 이보다 더한 것도 맛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에. 뭐든 처음이 어렵지 자꾸 만들어 버릇하면 다른 반찬과 다를 것도 없는데 그에게 손을 대기까지가 어렵다.


땅속 깊이 내통한 우엉은 길이만 봐도 우선 팔 한 쪽의 길이는 족히 된다. 반으로 뚝 자르고 흙을 씻어낸다. 전에는 필러로 슥슥 깎아 썼는데 그렇게 하면 실을 너무 깎아먹는 거라는 방송을 본 후로 대충 긁어만 낸다. 긁어내는 족족 검게 변하는 그의 면면은 속속들이 땅을 닮았다. 기어이 하얀 속살을 보자고 난도질을 하면 할수록 내 손만 물들지 뜸을 들이는 만큼 그의 속은 순식간에 어둠을 향한다. 서둘러 물에 담가 어둠을 물리칠 요량을 셈하지만 그러면 그는 향마저 내주고 만다. 얼른 헹궈내고 물 묻은 손을 닦는다. 양 손가락과 손바닥이 거뭇 거리며 보드랍다. 어느새 그를 탐하던 손을 물들였다.


오늘 나는 그를 살캉대게 데쳐 김치를 할 참이다. 손가락 한 마디쯤의 길이로 썰어 대파의 대와 홍고추를 동무 삼아 그를 빨갛게 물들일 것이다. 오로지 나를 위한 반찬이다. 김치는 오로지 배추지, 라는 사람과 김치는 없어도 그만인 아이들 사이에 낀 나는 한 번씩 나를 위해 수고한다. 강한 냄새 안 나는 까나리 액젓을 넣은 듯 만 듯, 간장 조금과, 생강 즙, 윤기도 나야 하기에 조청을 조금 넣는다. 우엉의 제맛을 놓치면 안 되니 먹을 만큼만 적당히, 향신채는 부족하다 싶게만. 잘 버무려 접시에 얌전히 내고 보니 그는 점잖은 선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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