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더하기 김치

기다림 삭힌 반가움

by 달랑무


물밥을 말아 간단하게 요기할 것으로 장아찌만 한 게 없다. 건강을 생각하면 물에 밥을 말아먹는 것뿐 아니라 국물을 떠먹는 것조차 고개 저을 일이다. 오래 두고 먹는 반찬이 많다 보니 소금 간을 한다. 김치, 간이 밴 생선, 장아찌, 된장, 고추장…. 소금과 함께 시간이 흘러야 맛이 익는 음식들은 오랜 시간을 견뎌온 만큼 먹는 걸 포기하기도 쉽지 않다. 먹을 때마다 반찬을 하는 일이 참 번거롭기도 했으려니와 먹거리가 지금처럼 오색찬란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엔 어쩔 수 없었을 거다. 김장김치 하나에 소시지 볶음 하나면 두 그릇도 너끈히 비워냈던 학창 시절은 허기 든 배를 그렇게라도 채우면 행복했다.

제철 아닌 음식도 마음만 먹으면 사 먹기도 쉬워져서 못 먹어 아쉬운 마음은 덜하다. 보리밥 갈아 넣은 열무김치나, 밀가루풀 쒀 담근 파김치는 가장 좋아하는 김치 중 하나인데 그 둘의 공통점은 소금 간을 제대로 안 하면 김치가 산으로 간다는 거다. 간을 덜하고, 헹구기도 여러 번 깔끔을 떤 열무를 담갔던 다음날, 뚜껑을 열어보고 기함을 했다. 파르라니 기세등등한 열무가 글쎄 코를 들고 너도나도 밖을 보자고 난리였다. 그때 처음 알았다. 적당한 소금의 양이 어떤 이에겐 어깨 힘을 빼주는 참한 반찬이 되기도 한다는 걸. 파김치는 또 어떻고. 파는 언제 보았다고 멸치 진 젓을 아주 좋아한다. 그 둘 궁합의 맛은 최고다. 맵싸한 파가 쿰쿰한 진 젓으로 숨이 죽는 순간, 파는 바다를 꿈꾸자면 자기 일부는 떼어줘도 좋다고 생각했는지 모를 만큼 환상의 콜라보를 자랑한다. 자기를 잃었다고 생각한 순간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파김치를 상에 올리는 날 나는 라면을 끓인다. 뭉툭한 파뿌리가 콧등을 쳐도 그게 그렇게 맛이 있다.


이런 단순한 절임 말고도 복잡한 재료가 필요한 절임이 한 가지 더 있으니 그건 어린 가죽에 양념을 입히는 일이다. 가죽나무 여린 새순은 초벌을 놓치면 두벌, 세벌 째는 질겨지기 때문에 신경을 써야 한다. 새순 올라오는 봄엔 그래서 재래시장을 자주 가서 들여다본다. 올해는 어쩌다 때를 놓쳐 두벌 째인 가죽을 샀는데 좀 억셌다. 어느 해인가는 간장 장아찌로 담가보기도 했는데 가죽은 역시 고추장을 입혀야 제 맛이다. 특유의 체취 때문에 도시에서 이 장아찌를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 어쩌다 나는 그에게 입을 뺏겼는지 모르겠지만, 매해는 못 담가도 2~3년에 한 번씩 기회가 되면 담그는 편이다. 코로 한 번, 먹고 난 여운으로 한 번 더 음미하며 보내는 그와의 봄은 역시나 기다림 삭힌 반가움이다.

어렸을 때 엄마 따라갔던 절 음식으로 맛을 봤었을까, 친구 집에서 일까, 기억은 가물가물한데 옛 기억의 맛을 떠올려 비싸게 주고 한 번 사 먹어본 후론 내 입을 기억하며 이틀을 온전히 그에게 바친다. 소금물에 네댓 시간 절이고 나면 물을 빼고 열다섯 시간 이상은 그를 만져가며 시들시들하게 둔다. 물기가 온전히 다 가시고, 그가 기다림에 지칠 때쯤 고추장, 고춧가루, 소주 조금, 조청, 매실 청, 액젓, 고추씨 양념장을 입혀 며칠 숙성을 시킨다. 그렇다고 막 먹기보다 입에 들어오기까지 조금 더 기다리는 여유가 필요하다. 그렇게 시간이 든다.


작년 다르고 올해가 다른 장마다. 비를 그렇게 쏟았다고 생각하는 작년과 달리 올핸 습한 기운 뿜뿜 하는 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 더운 여름은 뭘 먹어도 입맛이 없어 어제 재래시장을 오랜만에 갔다. 더우니 시장엔 더욱 사람이 없다. 떡볶이집, 어묵집, 전집, 떡집, 푸줏간, 반찬집, 과일집 다들 조용하다. 시장 끝까지 가다 돌 때쯤 푸성귀를 다듬어 파는 오래된 집 한 귀퉁이 대야에 먹음직해 보이는 총각김치 몇 봉지 눈에 띄더라. 맛있겠다, 보고 있자니 한두 사람이 와 바로 사간다. "여기 맛있어요?" 물으니 "전에 열무김치 사다 먹었는데 이 집 괜찮아." 어디선가 바람같이 뛰어드는 또 한 사람 요거 요거요, 하는데 나도 얼른 동나기 전에 사야 했다. 올여름도 이렇게 김치 더하기 김치 더하기 김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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