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워지지 않는 목마름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이야기를 하나 꼽자면, 실패한 남의 연애담이 아닐까. 눈물 쏙 빠지고,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이 펼쳐지고, 왜 그런 사람을 좋아했는지 본인도 모르겠다는 고백이 이어지는, 그 기이한 감정의 서사들. 아주 부끄러운 마음을 다독이며,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여러 차례에 걸쳐 꺼내 보려 한다. 나,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에 함께 있었던 경계선 성격장애라는 존재에 대하여.
경계선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의 첫 연애는 어땠을까? 처참했다.
서로의 불안과 결핍이 날 선 전투처럼 부딪혔고, 그 여파는 마음 한가운데 깊은 균열을 만들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격전지. 거기에 남겨진 건 정적만 가득한 폐허였다. 그리고 나는, 그 폐허의 잔해 위에 여전히 주저앉아 있었다. 복구는 요원하고, 다음 연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유독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고, 이성 앞에선 유난히 움츠러들었던 나는 마음에 드는 이성이 생겨도 늘 혼자서만 간직했다. 그 마음을 말로 꺼내는 순간, 모든 게 무너질 것만 같아서. 그저 먼 발치에서 바라보다가, 상대가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걸 지켜보며 마음을 거두는 일이 반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치 나와 비슷한 그림자와 결을 가진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다. 내 안의 거칠고 깎여나간 부분과 기묘하게 꼭 맞아떨어지는 것만 같은 사람. 이 사람을 놓치면 안 된다는 알 수 없는 직감이 들었다. 생애 모든 날의 용기를 한데 모아야 했고, 나는 그 용기를, 드물게, 꺼내 들었다.
우리는 빠르게 가까워졌고, 마치 불붙은 종잇장처럼 격렬하게 타올랐다. 그는 말하자면 나의 유일한 ‘세이프존’이었다. 모두가 나를 어렵다고 할 때, 그는 내 말을 듣고, 내 아픔에 고개를 끄덕이고, 심지어 내가 감정의 파도에 휘말려 울고불고할 때조차 곁을 지켰다. 나는 그 온기가 주는 위안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놓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달라붙었다.
처음엔 ‘이게 사랑이지’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건 사랑이라기보단, 위험한 의존이었다. 나는 인지하지 못했다. 아니, 애써 외면했다. 주변 사람들은 “너, 이건 건강한 연애가 아니야.”라고 경고했지만 나는 단호히 밀어냈다. “지금 나는 하나도 불편하지 않아. 오히려, 살아 있는 것 같아.” 불편한 건 상대였고, 위험한 건 나였는데.
내가 그에게 원한 건 단 하나였다.
“안아줘. 나를 끊임없이, 한순간도 놓지 말고 꽉 안아줘. 나는 네가 필요해. 네가 주는 안정이 곧 나의 숨통이야. 날 사랑해줘. 매일, 매 순간, 확인시켜줘.”
이런 부탁은 과했을까? 말문 막히는 요구였을까? 4~5살짜리 아이가 “엄마, 나 안아줘.”라고 우는 것처럼, 그저 어린 마음이었던 걸까?
처음 그는 말했다. “네가 이렇게 나를 원해서 좋아.” 그 말에 나는 구원받은 것처럼 안도했고, 그가 내 곁에 오래오래 머물 거라고 믿었다. 모든 감정의 소용돌이를 그는 끌어안아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건 오래 가지 않았다. 점점 그는 지쳐갔다. 처음엔 귀엽다던 나의 집착, 불안에 터져나오는 말과 눈물, 어디서든 전화 연결이 안 되면 폭주하는 문자들, 그 모든 것들이 그의 삶을 천천히 갉아먹기 시작했다.
연애를 시작하면서 감각들이 한층 더 예민해 져버린 나는,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걸 누구보다 먼저 알아챘다. “그는 나에게서 도망치려 하고 있어.” 그걸 느끼는 순간부터 나의 불안은 폭풍처럼 몰아쳤다. 숨이 가빠지고, 말이 빨라지고, 눈이 흔들렸다. 나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했고, 그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잃어갔다.
그건, 또 다른 파국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