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삶, 삶과 죽음 사이에서
나는 아주 오랫동안 자해를 해왔다. 너무 어릴 때부터였다. 그건 나에게 ‘죽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에 가까웠다. 살고 싶어서, 살 수가 없어서, 살기 위한 구멍을 만들어야 했고, 그게 내겐 자해였다.
이건 나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구분이다. 나는 자해를 했지만, 죽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그건 정확히 구분된다. 죽을 만큼 힘들었다는 것과, 정말로 죽고 싶다는 건 완전히 다른 감정이니까.
바이올린을 하던 시절도, 음대에서 쥐어짜듯 버티던 날들도, 일본에서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남아 눈물을 삼키던 날도, 프랑스에서 하나님께 절규하던 밤에도 나는 ‘죽어야겠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그저 ‘상처’라는 방식으로 밖으로 꺼낸 것뿐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살고 싶지 않다’는 말조차 몰랐다. 그저 버티는 것밖엔 몰랐다. 그게 나의 생존 방식이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꽤 잘 버틴 편이었다.
그런데 20대 중반, 그게 바뀌기 시작했다. 감정은 여전히 날카로웠고, 상처는 여전히 깊었는데, 이상하게 자해만으로는 그 감정이 잠재워지지 않았다. 몸을 베어도, 마음이 멈추지 않았다. 나는 자해를 하고 있는 손을 멈추고 생각했다.
“이건 죽고 싶다는 마음 아닌가?”
처음으로 그 단어가 나를 향해 왔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나는 나를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죽고 싶은 마음과 살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서로를 밀치고 당기며 나를 끌고 다녔다.
문득 엄마가 그런 이야기를 하곤 했다. “다 그렇게 살아.” 진짜일까? 나는 그 말에 늘 의구심을 가졌었다. 모두가 이렇게 미칠 것 같은 삶을 사는 것일까. 모두가 쌩쌩 달리는 차에 뛰어들고 싶고, 돋아나는 생명을 죽이고 싶고, 내 스스로를 찢어버릴 것 같은 삶을 사는 것일까. 세상은 힘들구나. 그러면서 깨닫는 건 늘 하나였다. 아, 힘들다고 말하면 안 되겠다. 그렇게 또 다시 나의 세상으로 나는 들어가 버리고 만다.
나는 나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도 늘 눈치를 봤다.
‘이건 너무 과한 감정인가?’
‘이 정도로 아픈 사람은 잘 없지 않을까?’
‘내가 예민한 걸까? 지금 이 마음은 너무 유별난 걸까?’
그 질문들이 쌓이면, 결국 남는 건 하나였다.
“그냥 참자.”
“다들 그렇게 사는 거잖아.”
“조금만 더 버티면 괜찮아질 거야.”
하지만 조금만 더 버티면 괜찮아지지 않았다. 조금 더 버티면, 조금 더 병들었다. 그게 진실이었다. 살고 싶다는 마음과, 죽고 싶다는 마음이 하나의 마음 안에서 함께 뛰었다. 서로를 밀어내지 못하고, 서로를 떠밀며 공존했다.
살고 싶은 이유를 찾아보면 사실 꽤 많았다. 보고 싶은 사람도 있고, 지키고 싶은 존재도 있고, 하고 싶은 일도 있었다. 하지만 죽고 싶은 이유를 떠올리는 데엔 그보다 훨씬 짧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더 깊고, 더 날카롭고, 더 즉각적으로 설득되었다. 이게 아마도 살고 싶다는 마음보다 죽고 싶다는 마음이 늘 한 발짝 더 앞에서 날 끌고 간 이유일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그런 하루를 살고 있다. 몸은 살아 있고, 숨은 쉬고 있지만, 어떤 순간엔 너무 숨이 막히고, 또 어떤 순간엔 내가 살아 있다는 게 서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