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아난 여린 새싹 하나
감정은 자주, 그리고 많이 폭발했다. 활화산처럼. 한 번 터지면, 나도 막을 수 없을 만큼 거세게. 소리 지르지 않아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은 온몸을 휘감고, 심장을 움켜쥐고, 생각을 집어삼켰다.
그건 나에게 지극히 익숙한 일이었다. 작은 말 한마디, 무심한 표정, 답이 늦은 메시지 하나. 그 어떤 ‘시시콜콜한 일’이라도 내 감정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나는 그 감정을 참았다가, 참았다가, 결국 터뜨렸다. 남을 향할 때도 있었고, 내게로 돌아올 때도 있었고, 어떤 날은 자해라는 방식으로, 어떤 날은 죽음을 상상하는 방식으로 그 감정을 마무리했다.
사람들은 그 격한 감정에 놀라기도 하고, 상처받기도 하고, 때로는 나를 피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그렇게 모든 걸 다 쏟아낸 후,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한 지역을 풍비박산 낼 정도의 핵폭탄이 터지고 난 이후의 모습 말이다.
해방이 아니었다. 평화도 아니었다. 오히려, 더 깊은 절망이었다. 감정이 가라앉고 나면 나는 언제나 버려진 폐허에 서 있었다. 폭발은 순식간이었다. 그 몇 분, 혹은 몇 시간의 격정 뒤에는 항상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자해를 했을 때는, 분명 시원함이 있었다. 무언가 쓸어내려 가듯, 내 속이 조금 정리되는 느낌. 하지만 그 감정은 늘 너무 짧았다. 그 짧은 시원함이 지나가고 나면 텅 빈 채로 방에 남겨진 나. 창밖을 보며 멍하니 앉아 있던 나. 팔 위에 상처를 바라보며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던 나. 그 시간이 가장 무서웠다.
분노도, 슬픔도, 죄책감도 사라진 자리. 완벽한 무감각. 그게 ‘허무’라는 이름이었다.
허무는 조용히, 그러나 무섭게 찾아왔다. 처음엔 편안한 공기처럼 느껴졌다. 아무것도 안 느껴도 된다는 안도. 아무 생각도 안 해도 된다는 자유. 그런데 그 허무는 조용히, 그리고 확실하게 나를 무너뜨렸다. 감정이 사라지고, 생각이 멎고, 모든 게 정지된 것 같은 시간 속에 나는 점점 희미해졌다.
그곳은 마치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땅 같았다. 뼈대만 남은 건물, 재로 가득한 거리, 정체를 알 수 없는 형체들, 망가진 창문과 무너진 천장, 그 속에서 나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말도, 생각도, 감정도. 모두 타버리고, 무너지고, 사라졌다.
‘이렇게까지 감정을 쏟아낸 내가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그게 가장 큰 절망이었다. 이제는 다시 감정을 일으킬 힘조차 없다는 것. 무너지지도 못할 만큼 이미 망가졌다는 것.
하지만, 그렇게 무너진 폐허의 한가운데 아주 조그마한 변화를 나는 어느 날 조용히, 아주 조용히 감지했다. 바닥에 금이 간 틈 사이, 어디서도 보이지 않던 아주 작은, 아주 연약한 새싹 하나.
이건 착각일까?
진짜일까?
나는 그 새싹을 차마 손으로 만지지도 못했다. 부서질까 봐. 사라질까 봐. 그나마 내 안에 남은 유일한 생명일까 봐.
그 새싹은 아직 자라지도 않았고, 푸르지도 않았고, 아무 향기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다시 하루를 살아볼 이유를 가졌다.
감정은 여전히 거칠고, 허무는 여전히 무섭고, 폐허는 여전히 깊지만, 그 속에, 살아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내가 알아버렸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