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야 한다?
그녀는 친구다. 그 많던 육백 명 중 '하나'였다. 오랜 세월, 거의 40년이 지나 친구로 다가왔다. 그녀가 먼저 내게 전화를 하면서 목소리를 주고받았으며 이름을 주고받았고 전화번호를 주고받았다. 그때까지도 그런가 보다 했다. 그 이후로 만나거나 소식을 묻거나 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고 동창의 회장으로 친구들을 모았다. 회장이니까 예의 형식적인 친구 관리 차원이다 싶었다. 그래도 그녀가 먼저 전화를 걸어준 것에 나는 고마워했다. 관리를 잘하는구나, 그래 저 정도는 해야 모인 친구들을 잘 이끌어갈 수 있지.
평소에 가깝게 지내는 친구가 아닌 이상 아무리 학교 동창이라 하지만 말문을 열어주고 모임에 초대하려는 마음이 사실 쉽지 않은 일임을 안다. 이제와 새삼 특별한 관계로 발전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수백 명 중 한 명으로 동기들 대부분 그런 친구가 있었지 하며 보통은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그때 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들이 같은 지역에 많이 모여 살지만 길거리를 지나다가 내 옆을 스쳐 지나도 알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더구나 성형을 하여 모습이 바뀌었을 수도 있거나 고등학교 이후로 부쩍 키가 커버렸으면 못 알아보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나도 이 친구를 알지 못한 상태로 여고 3년을 보냈다. 처음엔 동명이라 내가 아는 친구인 줄 알았고 그런 친구가 있었구나 생각하며 그중의 '하나'로 여고 모임에 들어갔다. 그녀는 일면식 없는 내게 먼저 전화를 준 친구다. 친숙했고 다정했다.
그녀도 친구다. 우리는 거의 20년 정도 만난 친구라 할 수 있다. 그녀가 나를 여고 모임의 '하나'로 만들었다. 그 많은 육백 중에서 끌어다 놓은 보릿자루가 될 듯싶어 마음은 이미 내외하였으나 끌어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동창 모임의 '하나'로 들어갔다. 그러나 회장을 하고 있었던 40년 만에 만난 그녀가 간간이 소식을 알려 주었고 한 번도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나를 끌어들인 친구에 대한 서운함보다는 나를 챙겨주는 그 친구의 마음이 애써 고마움으로 다가와 아직은 연명하고 있다.
40년 만에 만난 친구는 이제 회장에서 물러났고, 20년 만나왔던 친구는 총무로 앉았다. 그리하여 나는 모임에서 나오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그러자 40년 만에 만난 친구가 그냥 있으란다. 많은 친구가 그리한다고, 그리해도 된다고. 이름만 걸쳐 놓고 모임의 일거수일투족을 엿듣고만 있으려니 불편함도 사실 없지는 않다. 활발하게 활동하는 친구들은 그들만의 펜스 속에 그들만의 리그로 뭉쳐진 단단한 틀을 느끼게 된다. 어쩌면 살포시 건드리기라도 하면 충분히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 텐데 나는 살포시 건드리게 되는 수줍음도 비치길 원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무슨 부끄러움을 숨기냐 할지 모르겠으나 나 같은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는 그렇다. 먼저 비집고 들어가는 것보다 먼저 상대가 손을 내밀어 주면 냅다 달려가는 건 잘한다. 그걸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20년 만나왔던 친구는 총무가 되고도 회원 관리 차원에서건 어떤 연유에서건 먼저 말 한마디 할 법한데 아직은 없다. 있어도 된다고, 행여 모임 행사차 문자를 보낼 때도 그저 '하나'의 일부로 여기고 보낸다. 적어도 전화 한 통 할 만도 한데 굳이 이름도 뭣도 없이 덩그러니 예의 형식적인 문자만 보내는 걸 보면 그 모임에 있으나마나한 건 맞다. 나도 별 답이 없는 건 마찬가지다. 이런저런 모임에 나오지 못하는 나를 때론 위로한답시고 잘 지내느냐고, 그리해도 괜찮다고 말해줄 법 한데 그녀도 나도 말이 없다. 육백 명 중 하나인 나를 기억하라는 게 아니고 육백 명 중 하나인 나를 모임의 일부로 만들었으면, 그녀가 그렇게 나를 '하나'로 끌어들였으면, 한 번쯤 어찌 지내느냐고, 모임 같이 못해 아쉽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일 망정 물어 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나였다면ㆍㆍㆍ나였다면 그리 하지 않았을 일이기에 안타깝다.
40년 만에 만난 친구는 어느 모임에서도 다정할 듯하다. '하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다가가지 않은 '하나'에게 먼저 다가와 친구로 만들어 주고, '하나'가 '둘'이 되게 노력하는 그녀다. 일단 어떤 자리에 앉는 친구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잘하고 있다. 그래서 회장을 하는 거겠지. 회장이나 총무라면 육백 명을 이끌어가야겠다고 생각한 자리라면, 그녀가 끌어들인 친구라면, 어렵게 만든 모임이 쉽게 깨지지 않으려면, 많은 사람들 속에서 묻혀 미미한 목소리를 내는 게 두려운 친구에게 한 번쯤 소식을 물어줘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같이 있게 하는 이유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녀도그녀도친구 #여고동창 #끌어다놓은보릿자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