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명언이 될 줄이야
동료 프리랜서가 있었다.
이 분야에 처음 발을 담갔을 때부터 지금까지 감히 제일 친했고 속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정확한 나이를 밝힌 적은 없었지만 나보다는 5~6살 어렸고, 약간의 핸디캡이 있었음에도 책임감 있게 일하는 사람이었다.
나이답지 않은 성실함이 보기 좋았고, 같은 분야에서 동고동락하며 쌓아온 전우애가 돈독해 그녀를 아꼈다.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돕고, 속상한 일을 겪을 때 함께 분노하며 그렇게 쌓아온 세월이 1년 반정도.
나는 우리 사이가 꽤나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보기 좋게 뒤통수를 맞고 말았다.
인간관계에서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자고 그렇게나 다짐했었는데.
절대로 그럴 것 같지 않던 사람에게 또 이런 일을 당하다니.
그녀는 나의 첫 도움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유를 상술할 순 없지만 그동안 쌓아온 시간이 무색하리만큼 무정한 언사였다.
서운하고 괘씸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사람을 하나 또 잃었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좋아하게 되지 않고 아무도 믿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그 후 그녀는 같은 건을 다른 동료가 거듭 부탁하자 그 일을 수락했다.
다른 동료는 그녀가 걱정하는 부분이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으며 본인이 나서서 해결해 보겠다고 했다.
처음 내가 거절당했을 때 그렇게 당당하게 부탁하지 못했던 건, 의뢰인이 나를 통해 온 사람이 아니라 두 번째로 부탁한 다른 동료의 지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의뢰인의 의중을 정확하게 알 수가 없으니 그저 나는 그녀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부탁을 하면서도, 나는 당연히 그녀가 들어주리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건강이나 일정에 치여 마감을 지킬 수 없을 때, 최저임금정도의 수고비만 받고 일을 대신해 준 적도 있었고, 그 외에도 크고 작은 도움을 꽤나 많이 주었기 때문이다.
부탁을 하면서 그녀가 거절의 이유로 달았던 그 이유들을 걱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간 받아온 도움을 생각한다면 한 번쯤은 그 정도 도움을 내게 주리라고 생각했다. 너무 안일하게도.
그녀는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결국 그 일을 떠안을 수밖에 없어 억울할까?
아니면 나에게 그렇게 매몰차게 말해놓고는 다른 동료의 부탁에 결국 일을 맡게 된 걸 민망해하고 있을까.
아니면 둘 다일까.
어느 쪽이 되었든 그녀에 대한 나의 마음이 이제 예전처럼 될 수 없음을 안다.
키보드와 모니터 뒤에 숨은 이 마음을 결코 전할 수 없으리란 것도.
랜선을 타고 여전히 웃고 떠들며 친목을 과시하겠지만 그게 전부 껍데기일 뿐일 것이란 것도.
어린 시절, 바보같이 긴 짝사랑에 허우적대며 눈물을 쏟을 때, 친한 언니가 해준 말이 있었다.
'그냥 준건 준거로 끝내'
그때 그 말이 큰 위로가 됐던 것이 떠올랐다.
나는 그저 그녀보다 조금 더 어른으로, 조금 더 산 인생의 선배로서 도움을 주었을 뿐.
아직 어린 그녀는 그게 도움이라고 조차 생각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준 만큼 돌려받으려고 한 미련함이 또다시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날아와 박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베풀고 살아야 함을 안다.
언제쯤 보답을 기대하지 않는 어른스러운 마음을 갖게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