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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Oct 22. 2023

아이들의 놀이

창의성과 주도성, 싸움 중재

"엄마~ 같이 놀자!"

"엄마랑 같이 놀고 싶어~"

"엄마! 그림 그려줘~"

"엄마! 간지럼 놀이 하자!"


첫째와 둘째가 경쟁이라도 하듯 '엄마'를 불러댈 때가 있었다.


"엄마는 놀아주는 사람이 아니야. 엄마도 하고 싶은 게 있어. 너희도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시간을 보내거라."


애가 셋이 되기 전부터 이런 말을 했고, 수용하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던 것 같다. 지금은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진 상태지만, 여전히 가끔씩은 자기 욕구만 표출하기 바쁠 때가 있기도 하다.


애가 둘이었을 땐 그나마 같이 노는 게 가능했고, 요구사항을 어느 정도 들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애가 셋이 되고, 저마다 다른 요구사항을 전부 수용해 줄 수는 없었다. 엄마는 '놀아주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이들도 알아주고 수용하길 바랐다.





엄마표 놀이


한때는 내가 아이들과 노는 방법을 모아서 글로 엮어볼 계획을 했었다. 목차를 구성하고, 프롤로그까지 써놓은 상태로 1년 넘게 시간을 흘려보내버렸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글을 쓰려고 시도했던 건 놀이를 엮어보려는 것이었는데, 쓰다 보니 꼭 '난 애들이랑 이렇게 잘 논다'라며 자랑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자랑하기 위한 글, 내가 잘났다며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한 글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들과 노는 것은 자랑할 일이 아니다. 그런 걸로 누군갈 가르칠 것도 못 된다. 놀이는 그저 즐거우면 되는 것이다. 흠뻑 빠져서 신나게 시간을 보내면 그걸로 충분한 것 같다. 그것이 그림 그리기가 될 수도 있고, 달리기가 될 수도 있고, 선택은 각자 알아서 하면 되는 것이고 말이다.


아이가 하나고, 어렸을 때는 별의별 놀이를 다해봤다. 내가 직접 생각해서 해본 것도 있고, 인터넷 검색으로 해본 것도 있었다. 재료가 필요하거나, 뒷정리가 귀찮은 놀이는 대부분 일회성으로 끝났다. 놀 때는 즐겁고 뒷정리는 깔끔한 게 좋았다.


내가 아이들과 주로 하는 것은 '몸놀이' 같은 뒷정리가 필요 없는 놀이다. 날씨에 상관없이 집에서 즐기기 편하다. 특히 아이가 어릴수록 몸으로 할 수 있는 놀이가 많다. 내가 놀이기구가 되어 아이를 태워줄 수도 있고 말이다. 머리, 등, 배, 다리, 팔 등 아이가 올라갈 수 있는 데라면 어디든 올려놓고 움직이면 아이는 까르르 웃음을 터트린다. 간지럼 놀이도 마찬가지다. 이건 조금 큰 아이들도 상당히 즐거워하는 놀이다. 이렇게 몸을 움직이며 스킨십을 하는 놀이는 즐겁기도 하고, 아직 엄마 품을 느끼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라 특히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내가 사물이 되어 나를 뛰어넘게 하거나, 내 몸 위에서 뛰어내리는 것, 뛰어서 내 손을 잡거나 하이파이브하기 같은 것은 아이 신체발달에도 도움을 줄 수 있는 놀이다.


집 밖으로 나가서 하는 놀이는 '산책'을 주로 즐겼다. 나는 아이들도 같이 걸어가는 걸 선호하는 편이다. 균형감각과 운동감각을 기르기 위해서는 땅을 딛고 걸어보는 경험이 아이들에게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속도를 변화시키면서 걷기도 하고, 체력이 된다면 달리기도 한다. 걷다가 멈춰서 날씨나 자연을 느껴보기도 한다. 목적지를 정해놓고 걸을 때도 있지만, 꼭 거기까지 가지 않을 때도 있었다. 길을 가다가 흙놀이를 하고 싶어 하면 멈춰서 흙놀이를 하고, 꽃이나 풀로 놀고 싶어 하면 그걸로 놀았다. 밖에 나가면 아이들에겐 모든 것이 놀잇감이 되었다. 첫째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니 '공놀이'가 추가되어 요즘엔 종종 공을 들고 밖에 나가서 놀기도 한다. 야구, 축구, 농구 가리지 않고 말이다.


'그림'을 그리거나, '그림책'을 보는 경우도 많았다. 아이들은 내가 그려주는 그림을 좋아했고, 나 역시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책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 집 아이들은 책을 좋아하는 편인데, 책 보는 시간을 즐기는 것 같기도 하다. 첫째와 둘째가 책을 들고 아빠 엄마 옆으로 모여드는 걸 봐서 그런 걸까. 막내도 책장에서 책을 꺼내 노는 걸 좋아한다. 벌써 좋아하는 책이 있는데, 그걸 들고 돌아다니다가 주저앉아 쫑알거리며 보는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다.





아이들표 놀이


엄마, 혹은 아빠와 함께 노는 건 아이들이 대체로 좋아하는 편이었고, 나 역시 그 시간이 즐거웠다. 하지만 아빠, 엄마가 없이는 놀지 못하는 바보가 된 것처럼 보였다. 충분히 놀 수 있는 여건인데도 말이다. 게다가 아이들이 원하면 아빠, 엄마는 언제든지 같이 놀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인식하는 것 같았다. 아빠, 엄마도 할 일이 있고, 놀고 싶지 않을 때도 있는데 말이다.


첫째 아이뿐이었을 때는 아이가 혼자 노는 모습이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그게 몰입하는 순간이었던 것도 모른 채, 어른의 시선으로 아이의 모습을 해석한 것이다. 둘째가 태어났고, 돌이 되기도 전부터 혼자 가만히 앉아 노는 모습을 보면서 깨달았다. 노는 능력은 타고나는 거라는 걸 말이다. 막내를 봐도 그렇다. 혼자 집안 구석구석을 떠돌면서 즐거움을 찾아다닌다. 그러다 본인의 한계를 발견하면 내 손을 잡아끌고 그쪽으로 향한다. 내가 봐주지 않으면 혼자 용을 쓰고 하다가 화를 내기도 하지만, 그렇게 한계를 뛰어넘어보는 경험을 하면서 성장하는 중이다.


아이들은 가만히 두면 혼자서도 놀이를 만들어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혼자 놀 줄 모르는 아이? 그 아이는 노는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파괴된 것이다. 놀이 때마다 간섭받고, 즐거움을 찾을 때마다 방해받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즐거움을 찾고 노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우리 집 첫째도 그랬다. 매 순간 내가 즐거움을 찾아주다 보니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아이로, 자꾸 아빠 엄마에게 뭔가 요구하는 아이로 자라고 있었다. 특히 첫째에게는 동생과 함께 노는 법을 알려주고 싶기도 했다. 말로 알려주는 데는 한계가 있어서 직접 같이 놀았던 것인데, 역효과가 생겼다. 혼자서도 잘 놀던 둘째마저 '엄마 같이 놀자~'를 연발하게 된 것이다.


나와 남편은 놀이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아빠, 엄마가 같이 놀 수 있을 때만 같이 노는 거라고 알려주었다. 처음엔 아이들의 강한 저항이 있었지만, 아이들도 차츰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기들만의 놀이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집안에 있는 모든 물건을 사용해서 놀았고, 밖에서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게 놀잇감이었다.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도 천이랑 가구들을 이용해 집을 짓기도 하고, 인형으로 역할놀이를 하기도 했다. 아빠, 엄마와 함께 읽던 책을 형제가 나란히 앉아 같이 보며 웃기도 하고 말이다. 글자를 모르는 두 사람이 책을 보는 방법은 간단했다. 그림을 보며 놀거나, 들었던 것을 재생하며 같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요즘은 글자를 조금씩 읽게 된 첫째가 가끔 동생에게 책을 읽어주기도 한다. 그림을 그려달라고만 하던 아이가 동생에게 그림을 그려주기도 한다. 어른이 물러나니 아이들이 주인이 되어 '함께'하는 놀이를 만들게 된 것이다.


아이들이 놀이를 주도하면서 부작용이 생기기도 했다. 집안이 금방 난장판이 된다. 장난감을 줄였으나, 집안 모든 물건이 놀잇감이 되어 곳곳에 놀았던 흔적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함께하는 뒷정리를 가르치고 있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말하지 않아도 정리하는 날이 올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싸움에 대처하는 자세


같이 놀다 보면 아이들이 싸우기도 한다. 싸움이 커질 것 같으면 내가 개입을 하는데, '내가 괜히 끼어들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많았다. 아이들이 싸우는 건 굉장히 단순한 이유다. 그래서 싸우다가도 금방 웃으며 같이 논다. 그런데 내가 중간에 끼어들어 누군가의 편을 들거나, 두 사람 모두에게 잘못을 지적하면 싸움의 양상이 바뀌게 된다. 억울한 쪽이 덜 억울한 쪽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를 향한 분노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싸울 때는 잘 살펴야 한다. 피곤해서 신경질적으로 싸우는 경우라면 개입해서 둘을 갈라놓는 게 필요했다. 혹은 피곤한 쪽을 떨어트려놓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많이 억눌러 놓은 상태라 어딘가에 표출하는 싸움이라면 상대방이 아닌 다른 활동으로 풀게 했다. 최대한 몸을 격렬하게 쓸 수 있는 활동이 좋았다. 공차기, 발차기, 걷거나 뛰기 이런 놀이 말이다. 이 두 가지 경우가 아니면 대체로 싸웠다가도 알아서 화해하고 다시 놀았다.


"미안해."


이 한 마디를 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그걸 받아줄 수 있는 포용력. 그걸 아이들이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날이 많아지고 있다. 그 말에 진심이 담겨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사과도 잘 못하는 어른이 많다. 자존심 때문에. 하물며 사과가 뭔지도 잘 모르는 아이들인데, 진심을 담는 게 그렇게 중요할까. 지금은 아이들끼리 싸움을 조정하고 다시 놀이를 이어가는 경험을 갖는 게 더 중요한 것 같다. 언젠가는 그 말의 의미도 알고, 진심을 담을 줄도 알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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