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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Oct 22. 2023

귀촌, 그 후 1년의 시간

자연육아

인생의 반은 시골에서, 또 다른 반은 서울과 수도권에서 살아왔다. 종종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을 그리워하며, 나이 들면 고향(전남)으로 내려가서 조용히 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곳(경북),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시기(40대 초반)에 귀촌을 했다. 


그 당시, 난 셋째를 임신한 상태였고, 첫째 아이는 6세, 둘째 아이는 3세였다. 남편은 홀로 시골에 내려와 단 돈 100만 원으로 마당 있는 집 한 채를 빌렸다. 그리고 우리를 데리러 올라와 대강 이불과 옷가지를 챙겨 시골로 향했다. 정들었던 도시를 떠나던 그날,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눈물이 핑 돌았다. 영영 올 일이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다시 올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육아만 하다가 겨우 뭔가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 포기해버리고 싶기도 했다. (특히 인간관계가 컸던 것 같다.)


그렇게 안 내켜하면서도 남편을 따라나서기로 결심한 이유는 간단했다. 남편을 믿기 때문이다. 비록 '이혼' 얘기까지 꺼내면서 귀촌을 강요하긴 했지만, 그만큼 남편이 절실했다는 것도 안다. 아마 '이혼' 카드를 꺼내지 않았더라도 남편을 따라 귀촌을 했을 것이다. 다만 결단을 내리는 데에 시간이 한참은 더 걸렸을 것이다. 남편도 내 스타일을 아니까 그 방법을 썼을 것이고 말이다. 





현실 귀촌


시골행을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하지만 그중 귀촌을 한 사람은 아직 없는 것 같다. 남이 하는 귀촌은 '이상'이지만, 내가 하는 귀촌은 '현실'이니까 쉽게 결정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나 역시 두렵고 불안하고 막연했지만, 방법이야 어쨌든 남편의 끈질긴 설득에 귀촌을 결심했다. 그러니 그 결심에 책임을 지고 후회하지 않도록 살아내야 하는 것도 내 몫이었다.


귀촌, 우리의 현실은 낭만적이지 않았다. 하필이면 때는 바람이 세차게 부는 겨울이었고, 하필이면 남편이 구한 집은 들판 한가운데에 있는 외딴집이었다. 집안에 있으면 금방이라도 집을 날려버릴 것 같은 바람 소리가 들렸고, 밖에 나가면 거센 바람에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그나마 남향집이라 한낮에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따뜻하고 좋았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주변에 가로등 하나 없어 밤이 되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 한밤중이면 집 앞 농로를 세차게 달려가는 차도 있었다. 집이 워낙 오래되어 방음이 안 되니, 그렇게 지나가는 차 소리가 엄청나게 요란해서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었다. 그래도 겨울밤, 눈이 시린 밤하늘에는 쏟아질 듯 별이 빛났고, 노을 지는 풍경은 예술이었다. 


봄이 될 무렵 면허를 땄고, 간신히 운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좁은 농로에 SUV를 몰고 다니다가 몇 번 긁긴 했지만, 그래서 남편한테 욕을 좀 먹긴 했지만, 시골생활에 꼭 필요한 요소를 획득하게 되어 굉장히 기뻤다. 그전까지는 남편이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었다. 우리가 터를 잡은 곳은 쥐구멍만 한 슈퍼도 없는 동네였고, 남편은 바쁜 와중에 운전사 노릇까지 해야 해서 굉장히 힘들어했다. 대도시 살 때는 운전면허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시골에 와서야 운전면허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막내 출산 전에 면허를 딴 것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시골 인심


우리 집은 그 동네에서 유일하게 어린아이가 있는 집이었다. 그래서 금방 동네에서 유명해졌고, 어르신들은 우리 집 아이들을 예뻐해 주셨다. 아이들 덕분에 동네 사람들과 안면을 트는 게 수월해졌다. 애들 먹이라며 먹을거리도 나눠주시고, 한 마디라도 더 붙여주시는 느낌이 들었다. 시골 인심이 예전 같지 않다고들 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다만, 그 안에 포함되려면 몇 가지 노력이 필요했다. 특히 그 마을에 터를 잡고 오래 머물 거라는 인상을 주어야만 '인심'을 내어주는 느낌이랄까. 


사람들과 좀 친해지면서 우리는 '집' 혹은 '땅'을 구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을 가장자리 쪽 양지바른 곳에 있는 집을 팔 계획이란 얘길 듣게 되었다. 집을 살 생각으로 몇 차례 오가며 동네와 집을 살펴보고, 집에 살고 계신 어른들과 인사도 나눴다. 오래된 한옥을 고친 집이라 손 볼 데가 상당히 많았지만, 마당이 넓고 햇빛이 잘 드는 게 마음에 들었다. 7,000만 원쯤 제시를 했고, 우리는 그보다 낮은 금액을 제안했다. 동네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얘길 해보니 7,000만 원은 터무니없는 금액이라는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집주인은 꼭 그만큼을 받아야겠다며 양보하지 않았고, 계약서 쓰기 직전에 계약을 파기했다. 


"요즘 젊은 사람들 시골 오면 지원도 많이 해준다던데..."


정부에서 지원해 주는 건 빚이다. 공짜로 주는 게 아닌데, 마치 그 돈을 공짜로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얘길 했다. 게다가 귀촌은 지원이 별로 없다. 대부분의 지원은 '귀농'을 대상으로 한다. 농사꾼이 되어야만 하는 것인데, 얼마나 농사를 크게 지어야 빚 갚으며 살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농사로 돈 버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집을 급하게 팔아야 했던 집주인들은 결국 그 집을 6,000만 원인가에 팔았다고 들었다. 우리가 제시했던 가격보다 더 낮은 가격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말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집주인과 동네 어르신들의 인심을 사는 데 실패한 것이다. 우리를 그 동네 사람으로 완전히 받아들였다면 우리가 제시했던 가격에도 그 집을 내어주셨을지도 모른다. 가계약금을 버리긴 했지만, 좋은 경험을 한 데에 지불한 비용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가끔 지나가다가 그 집을 보면 그때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누가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귀촌으로 얻은 것


우리가 살던 그 집은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집안과 외벽 여기저기에 균열이 심하게 난 상태였고, 화장실 바닥은 이미 상당히 가라앉아 있었다. 다 무너져가는 그 집에서 우리는 1년 2개월 정도를 살았고, 알맞은 집과 땅을 구하지 못한 채 바로 옆 도시의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예전에 우리가 살던 도시보다는 작지만, 이곳도 도시는 도시다. 아파트의 편리함을 느낄 때마다 1년 넘게 시골생활을 했던 것이 꿈만 같다. 


시골생활은 정말 불편한 것도 많은 반면 매일매일이 풍족했다. 매 순간 돌봐야 할 것이 많았고, 힘써야 하는 일도 많았다. 집밖으로 나가면 마당이 있었고, 무성했던 잡초를 뽑아내고 햇빛 잘 드는 쪽에 애호박, 깻잎, 상추, 케일, 방울토마토, 가지, 고추 같은 걸 심어서 키웠다. 아파트에서는 아무리 정성껏 키워도 웃자라기 일쑤였는데, 땅에 뿌리를 내리고 햇빛 받으며 자라는 식물은 대충 물을 줘도 잘 자랐다. 특히 애호박과 가지는 정말 쉬지 않고 열려서 잘 먹었다. 


새로운 식구도 찾아왔다. 동네 어르신께 받은 강아지 한 마리(풍산개 잡종), 이웃에게 받은 청계 병아리 다섯 마리, 남편이 학교에서 받아온 토끼와 병아리. 동물을 돌보는 것은 식물보다 더 어렵고, 번거로운 일이었다. 잠시 정신을 놓치고 돌보는 걸 잊으면 금방 비실거리면서 힘들어했다. 마당을 나서면 죄다 논이고 밭이었다. 집 뒤쪽으로는 얕은 산이 있었고, 조금 걸어 나가면 개천도 있었다. 나름 배산임수 지대였다. 


아이들은 매일 밖으로 나가 논밭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해가 일찍 뜨는 계절에는 일어나자마자 마당으로 나가기도 했다. 종종 일찍 일어나는 날은 새벽 산책을 하기도 했다. 아빠, 엄마가 바쁘거나, 기분이 안 좋을 땐 형제 둘이 마당에 나가 흙을 파고 놀았다. 7세, 4세 아이에게 호미와 삽을 쥐어주자 흙 파기는 더 즐거운 놀이가 되었다. 지천에 널린 흙, 돌멩이와 들꽃은 장난감이 되었고, 개구리, 잠자리, 여치, 메뚜기 같은 건 친구였다. 매일 옷과 신발에는 흙먼지가 가득했고, 온 집안이 흙투성이 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행복해 보였다. 


자연은 매일 그 자리에 있지만, 매일 다른 모습으로 천천히 바뀌면서 변해갔다. 그렇게 변해가는 자연을 몸으로 느끼며 사계절을 보내고, 다시 아파트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예전에 살던 아파트보다 훨씬 넓은 평수라 덜 답답하긴 하지만, 가끔 시골생활의 광활함이 그립다. 바로 문 열고 나가면 자연이 있던 풍경이 그립기도 하다. 비록 내 땅은 아닐지라도 공짜로 즐길 수 있었던 자연의 광활함과 여유로움은 아파트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만큼 아이들을 잘 품어주는 곳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연은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품어줄 뿐이었다. 하물며 일부러 자연을 찾아다니는 어른은 어떻겠는가. 


우리의 첫 귀촌은 1년 2개월로 끝이 났지만, 여전히 진행 중이기도 하다. 언젠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갈 예정이니까. 나와 우리 가족을 위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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