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지 않아도 괜찮아 / 1부. 3.

1부. 3. 가족 내에 형성된 내 역할을 점검하라

by 김희경 작가

이 책은 저자의 실제 삶에서 비롯된 기억과 감정,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심리적 통찰을 바탕으로 구성된 에세이입니다.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처리되었으며, 실제 인물과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이 글을 통해 과거를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건네고자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저자의 주관적 시각에 따른 해석이며, 법적 사실을 단정하거나 특정 인물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이 책은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비방하거나 공격하려는 목적이 아닌, 개인의 성장과 회복의 여정을 기록하고, 유사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위로와 통찰을 제공하기 위한 진솔한 성찰의 기록입니다.

이 기록이 비슷한 경험을 가진 누군가에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제 : <가족 편>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아



1부. 3. 가족 내에 형성된 내 역할을 점검하라




3. 가족 내에 형성된 내 역할을 점검하라


1) 역할 고착과 삼각관계, 그리고 세습되는 역할


가족 안에서 우리는 종종 ‘나’로 살아가기보다, ‘어떤 역할’로 살아가기를 요구받곤 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역할 고착(role entrapment)이라고 부른다. 이는 개인이 가족 내에서 특정 역할에 지속적으로 고정되어, 자율성과 정체성을 잃고 관계의 균형을 맞추는 도구처럼 기능하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예를 들면 아이가 부모의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늘 중재자의 위치에 놓이거나, 부모의 감정을 대신 떠맡는 보호자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역할은 ‘진짜 나’로 착각될 만큼 내면에 깊이 자리 잡게 되고, 성인이 되어서도 그 틀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더 나아가, 그 역할 속에 갇혀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주어진 기대에 부응하며 평생을 살아가다 결국은 자신으로 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이들도 있다.


이러한 역할 고착은 종종 삼각관계(triangulation) 구조 속에서 강화된다. 삼각관계란 가족 내 두 사람 간의 갈등이나 불안을 완화하기 위해 제삼자를 무의식적으로 끌어들이는 역동을 의미한다. 이때 대개 가장 약한 자녀가 그 제물이 된다. 아이는 부모 중 한 사람의 감정적 동맹이 되거나, 부모 간의 다리 역할을 맡고, 심지어 부모가 감당해야 할 정서적 부담까지 떠맡으며 성장한다. 이처럼 조기에 부모화(parentification)된 아이는 아이다움을 잃고, 감정의 컨테이너 역할을 하며 살아간다. 그 대가는 단순히 어린 시절의 박탈로 끝나지 않는다. 이는 머리 보웬(Murray Bowen)의 가족체계이론에서 강조하는 핵심 개념으로, 부모 간 갈등의 완충재가 된 아이는 정체성의 분화가 저해되며, 자기감정보다 타인의 감정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구조가 고착화된다. 그 결과, 성인이 되어서도 타인의 필요와 정서를 우선시하며 ‘좋은 사람’, ‘유능한 중재자’로 기능해야 한다는 강박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


아이다운 시기에 누렸어야 할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과 자기 결정의 기회를 잃어버린 아이는, 이후 삶에서도 고착된 역할을 반복하게 된다. 스스로를 희생하며 타인의 삶을 대신 살아야 한다는 무의식적 강박 속에서, 때로는 억눌린 감정이 분노로 변형되어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어내는 가해자의 위치에 놓이기도 한다. 이러한 역전은 역할 고착의 가장 비극적인 전이 형태다. 어린 시절부터 지속된 병든 삼각관계는 부모가 책임져야 할 갈등을 아이에게 떠넘김으로써 본질을 흐리고, 관계의 왜곡을 심화시킨다. 그로 인해 아이는 자율성과 독립성을 상실하며, 자신의 욕구보다 타인의 감정에 따라 움직이게 되고, 결국 정체성 자체에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이 구조는 세대 간에 지속적으로 반복되며 전이된다. 마치 귀족이 죽으면서 자신의 작위를 자식에게 물려주듯, 성인아이였던 성인은 자신이 맡았던 역할, 혹은 자신에게 투사되었던 부모의 역할을 다음 세대, 즉 자신의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이처럼 역할 고착은 단순한 관계 내 위치의 문제가 아니라, 무의식 속에서 되풀이되는 심리적 유산이다. 더 위험한 점은 이 모든 과정이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데 있다. 본인은 자신의 삶이 왜 그렇게 반복되고 고단하게 느껴지는지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어린 시절 내면에 새겨진 대본을 따라 관계를 맺고, 선택하고, 살아간다. 이 무의식적 반복은 마침내 자신이 원하지도 않았던 길로 인생을 이끌어가는 강력한 심리적 프로그램으로 작동한다.




2) 아이로 태어나 희생자가 되기까지


요즘 유행하는 표현 중에 ‘낳음을 당했다.’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출생이 축복이 아닌 의무와 고통의 시작이었음을 고백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 표현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한참 생각에 잠겼다. 삶에서 많은 것을 이뤘지만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양부모의 지지 아래 자란 이들조차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의 선택을 넘어 사회 전체의 정서적 흐름을 보여주는 징후다. 그들은 아이를 낳는 순간, 자신이 경험한 고통과 상처의 회로를 아이에게도 그대로 물려줄 수 있다는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이는 심리학의 애착 이론과 깊은 관련이 있다. 안정 애착이 형성되지 않은 채 성장한 개인은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불안을 해소하지 못한 채, 부모로서 동일한 불안을 반복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아이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받지 못한 것을 보상하려 애쓰거나, 오히려 무의식적으로 동일한 고통을 재현하기도 한다. 이 반복은 무의식적인 구조 안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축복 속에 태어나 자랐다고 생각했던 아이가 성인이 되어 "낳음을 당했다."는 표현을 하기까지 가정 내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해 왔는지 깊게 살펴볼 문제라고 생각했다. 내 주변의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들 중에도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들이 많다. 겉으로는 삶의 성취를 이룬 듯 보이지만, 그들의 표정에는 어느 한 구석 지워지지 않는 고단함이 묻어 있다. 그들이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말할 때, 그 안엔 단지 책임에 대한 회피가 아니라, “내가 겪은 고통을 반복시키지 않겠다.”는 결연한 다짐이 있다. 이는 단순히 저 출산의 원인을 설명하는 차원을 넘어, 한 개인이 어린 시절부터 경험해 온 심리적 역할과 감정적 체계에 대한 저항으로도 읽힌다. 특히 애착 형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아이는,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조건적 성과'로써 얻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본질이 아닌 교환 가치로 인식하면서 자율성과 독립성은 초기부터 파괴된다. "낳아줬으니까 이 정도는 당연히 감당해야지."라는 부모의 태도는 아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보기보다, 수행자 또는 가족 체계 내 기능으로 취급하는 사고가 만든다. 그렇게 자란 아이는 성인이 되어 자신의 고통을 반복시키지 않기 위해 아이를 낳지 않거나, 반대로 또 다른 누군가를 희생자로 만들어 자신의 역할을 대물림한다.


나 역시 오랫동안 내가 가족 내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했는지 돌아보았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이 태어난 직후부터 생애 초기에 형성되는 관계와 경험이 이후의 정체성과 삶의 틀을 결정한다고 본다. 특히 발달심리학자들은 만 3세까지 부모와의 안정된 애착이 자율성과 독립성의 기초를 형성한다고 강조한다. 다행히 나에게는 어머니와의 안정 애착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나만의 자율성과 경계를 분명히 갖춘 아이로 성장할 수 있었다. 친척들은 어린 시절의 나를 “자기 것과 남의 것을 분명히 구분하고, 부당함을 참지 못하며, 어른의 잘못을 지적하는 고집 센 아이”로 기억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단지 ‘고집’이 아닌, 내 존재를 지키기 위한 자기 보호의 본능이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장난감을 가지고 아이들과 함께 놀다가도 내가 어지른 것만 치우고 자리를 벗어난 나의 행동은, 분명하고도 정당한 경계 설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계를 설정한 아이의 태도는 어른들의 눈에 ‘버릇없고 이기적인 아이’으로 보였다. 그래서 나는 자주 혼나고 훈계를 들어야 했다. 심지어 "다른 아이들이 어지른 것까지 치워야 착한 아이지."라는 논리 앞에선 억울함조차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내 세계 안에 들어온 수많은 어른들은, ‘내가 가진 건강한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오랜 시간을 들여 나를 교정하려 했다.


억울함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사촌동생들의 숙제를 도맡아 했고, 방학이면 그림일기까지 대신 써주며 나는 스스로의 시간을 잃었다. ‘오늘은 ~를 먹었다. 참 맛있었다.’로 시작하고 끝나는 단조로운 나의 일기에는, 남을 위한 삶 속에서 사라져 버린 나의 잃어버린 시간의 기록들이 들어있다. 보다 못한 선생님은 여기에 이제 먹는 것 말고 다른 내용을 적으라는 첨언을 남기셨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모든 일기와 상장, 사진들을 어머니께서 나를 완벽히 떠나보내면서 기숙사로 보내주셨기 때문에 여전히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내 어린 시절이 온전히 증언된 기록된 기억이다. 동생들의 발명품을 대신 만들고, 그 발명품이 학교 복도 유리 상자에 전시되었을 때 도움을 줬다는 뿌듯함과 묘한 불쾌감을 느꼈다. 그때 느꼈던 이중 감정은 지금도 선명하게 마음을 누른다. 그리고 어느 날, 동생이 어머니의 지갑에서 돈을 꺼냈을 때, 어머니는 나를 의심했고, 손바닥을 때리고 마루에 손을 들고 한참 동안 서 있게 했다. 아무리 아니라 해도, 내 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하나님께 무서운 기도를 드렸다. ‘동생이 사라지게 해 주세요.’ 그리고 그날 오후, 동생이 친구들과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자, 나는 내 기도 때문일 거라 생각했고 눈물 콧물을 쏟으며 온 동네를 헤맸다. 결국 동생을 찾아 손을 꼭 잡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다시는 그런 기도를 하지 않겠다고 무릎 꿇고 회개했다.


어머니는 곧 동생이 돈을 훔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마저도 내 잘못으로 돌렸다. 그리고 ‘길에 떨어진 동전 하나도 줍지 말라.’는 교육을 받았고, 지금도 길에서 작은 돈이든 큰돈이든 돈을 발견해도 줍지 않는다. 뭔가를 얻으면 반드시 다른 데서 손해를 본다는 강박적 믿음은 그때부터 내게 깊게 뿌리내렸다. 나는 어린 나이에 이미 ‘대신 감당하는 사람’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성인이 되어 그때의 기도를 꺼내 사과했을 때, 동생은 매우 당황해했다. 그 기도에 대해 동생이 알리 없었을뿐더러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때 이상하게도 내가 이기적인 사람이 아닐까 하는 자책이 들었다. 이미 잊었을 일을 끝까지 끌어안고 있었던 나. 나도 모르게, 그 안에서 여전히 누군가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이러한 어린 시절의 기억은 단지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가족 체계 속에서 특정 역할을 맡게 된 아이는 종종 가족을 위한 기능적 존재가 되어 버린다. 마치 집에서 먹거나 팔기 위해 키우는 개나 소처럼, ‘존재’보다는 ‘용도’가 우선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이가 자율성과 독립성을 갖추면 오히려 위험한 존재로 인식된다. 내 경우, 두 명의 어른이 각각 자신 혹은 자신의 자녀가 저지른 일에 대해 나에게 책임을 묻고 화풀이했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내가 하지 않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자, 인정할 때까지 심하게 두들겨 맞았다. 멍이 들 정도였다. 어른은 “네가 했든 안 했든, 어른이 말하면 그런 줄 알아야지.”라고 말했고, “어른이 이야기할 때는 어른과 눈도 마주치지 마라.”는 말을 남겼다. 그 말은 내 안에 깊이 박혀, 성인이 되어서도 사람들의 눈을 보지 못하고,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하는 사람이 되게 만들었다. 보호해줄 울타리가 없던 나는 살아남기 위해 최고 권력자인 할아버지 곁에 붙었다. 굴욕적이었지만, 그것이 내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 방식이었다.




3) 희생양이 된 아이, 성인이 되어서까지 희생양을 자처하다


가정 내에서 희생자로 설정된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가정과 사회 속에서 자연스럽게 ‘희생자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이는 역할 고착의 연장선상에 있는 현상으로, 개인이 어릴 적 형성된 자기 역할을 자아의 일부처럼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심리학적으로는 자율성과 독립성이 훼손된 채 성장한 사람일수록, 타인의 감정과 요구를 우선시하며 자신의 경계를 지키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희생자 역할에 익숙해진 사람은 결국 심리적 탈진 상태에 이르고, 극단적인 우울감이나 무가치함 속에 갇히게 되며, 때로는 삶을 놓는 선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나 역시 그러한 경험을 그대로 거쳐 왔다. 어른이 된 이후에도 나는 어린 시절 내 세계를 재현하듯,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나와 비슷한 상처를 지닌 이들이나, 내가 감당했던 역할을 그대로 요구하는 사람들을 선택해 관계를 맺었다. 연인, 친구, 가족 안에서 나는 늘 상대의 감정과 요구를 우선시했고, 그들이 편안해지는 만큼 나는 점점 더 초라하고 불편한 존재가 되어갔다. 처음에는 그것이 나라는 사람의 본성인 줄 알았지만,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의식하지 못한 채 반복해 온 행동들은, 어린 시절 ‘편안한 아이’, ‘말 잘 듣는 아이’로 길러지기 위해 각인된 생존 전략이었고, 그 전략은 성인이 되어서도 고스란히 작동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스스로를 지옥으로 몰아넣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어릴 때 어른들이 편하자고 만들었던 내 안의 노예근성은, 성인이 되어도 관계 안에서 ‘기꺼이 감당하는 사람’으로 이어졌고, 그 덕분에 주변 사람들은 나와 함께 있으면 편안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편안함’은 나의 내면을 갉아먹는 감정으로 이어졌다. 나 자신을 초라하고, 불쾌하고, 불편한 존재로 느끼면서도 그 역할을 해내는 내 모습이 자랑스러우면서 동시에 혐오스러웠다. 만약 그런 상태에서 내가 어머니가 되었다면, 나는 나와 같은 아이를 키우거나, 나를 학대했던 사람들의 방식으로 아이를 대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내가 아이를 갖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신께 진심으로 감사한다.


이처럼 희생자 역할은 단지 개인의 성향이나 순응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심리적 구조의 반복에서 비롯된다. 고대 사회에서 공동체의 불안과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 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처럼, 가족 시스템 안에서도 불안정한 갈등 구조는 가장 약한 대상을 무의식적으로 제물로 삼는다. 르네 지라르(René Girard)의 『희생양 이론』에 따르면, 공동체는 “폭력을 대신 짊어진 희생양을 제거함으로써 일시적인 평화를 얻는다.”라고 한다. 그 구조는 지금 이 시대에도, 그리고 우리의 가족 안에도 여전히 작동 중이다. 가족이 갈등이나 스트레스를 경험할 때, 구성원 중 한 명(주로 감정이 예민한 아이, 또는 가장 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을 무의식적으로 타깃 삼아 분노와 긴장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긴장을 해소한다. 문제의 원인을 그 사람에게 모두 전가하고, 비난하고 고립시킴으로써 가족 전체의 불안을 통제 가능한 형태로 바꾸려는 심리적 움직임이다. 희생양 역할을 떠맡은 사람은 ‘문제아’, ‘늘 예민한 아이’,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이라는 낙인을 쓰게 되고, 가족의 분노를 대신 표현하고 흡수하는 감정적 쓰레기통이 된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결코 그 개인에게 있지 않다. 불안정한 체계, 분열된 정서 구조,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만든 병든 시스템이 문제의 핵심이다. 나 역시 그런 희생양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대지 위에서 자급자족 농사를 짓고, 수십만 마리의 닭을 키우며, 20명 가까운 대가족을 먹이고 입히는 시스템 안에서, 이 구조는 누군가를 정서적으로 짓밟아야만 유지될 수 있었다. 그 안에서 낳아주신 아버지는 ‘공동의 적’으로 설정되었고, 나는 그의 자식이라는 이유 하나로 ‘대신 맞아야 할 대상’이 되었다. 아버지의 재정적 지원으로 유지되던 농장조차, 겉으로는 “그는 양육을 하지 않았고, 우리는 버려진 아이를 키웠다.”는 서사로 바뀌었다. 그래서 나는 가족 모두의 분노를 투사받는 표적이 되었다. 투사(projection)와 대상전치(displacement), 그리고 희생양 메커니즘(scapegoating)이 교묘히 중첩되어 작동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내가 ‘문제 있는 인간’이라고 믿게 되었고, 내 자존감은 바닥을 쳤으며, 자기 이미지까지 왜곡되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 믿음은 내 안에 강하게 작동했고, 나를 필요로 하고 착취하는 사람들을 무의식적으로 끌어들이는 반복 강박(repetition compulsion) 구조를 형성했다. 이처럼 과거의 상처는 회복되지 않은 채 ‘재현’되고 있었고, 나는 언제나 ‘누군가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기 위해 존재했다. 나의 안위보다 타인의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 더 익숙했고, 거절은 어려웠으며, 순응은 습관이 되었다. 사회는 나 같은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 불렀고, 나는 그 이름이 자랑스러우면서도 나를 점점 더 미워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좋음’은 내 욕구나 감정이 반영된 결과가 아니라, 철저히 타인의 기대에 최적화된 결과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다시 희생양의 삶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들은 늘 나를 문제 있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단합했고, 내가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내 덮어씌웠다. 그렇게 조작된 이야기는 나에게 굴레가 되었고, 성인이 된 후에도 그들은 “우리가 너를 키웠으니 갚아야 한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내가 처음 아르바이트를 하고 받은 40만 원, 그 돈조차 ‘사치의 증거’로 비난받았고, 그것은 새로운 희생양 의식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들의 가족 재판은 아버지를 앞세워 열렸고, 시장 통 한가운데에 마련된 가족 가게에서 진행되었다. 내가 구입한 옷가지와 화장품은 ‘사치품’으로 낙인찍혔고, 그 안에서 나는 ‘배은망덕한 더러운 아이’가 되었다. 친동생이 남자관계를 언급하며 나를 비난했고, 나를 가장 사랑한다고 믿었던 아버지조차 그 재판에 나를 불러냈다.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서늘해진다. 그날, 나는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완전히 파괴되었다. 시장 한복판에서 2시간을 울며 무너졌다. 동생의 거짓 증언은 가족 재판에서 한 사람을 넉넉히 비난하기에 충분했다.




4) 희생자 가족 재판에 서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매장 사장님은 간단하게라도 화장을 하고 오라고 말했다. 손님들이 나를 중학생으로 본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나는 3천 원에서 1만 원 사이의 저렴한 옷과 신발, 화장 도구를 하나씩 사 모으며 아르바이트에 어울리는 외모를 갖추기 위해 애썼다. 그 준비는 내 생애 첫 자기표현이자, 사회적 역할에 어울리기 위한 조심스러운 발걸음이었다. 하지만 가족은 내 노력을 '사치'로 규정했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나를 시골로 불러들였다. 아버지는 내가 시골집에 올 때까지 매일같이 전화를 걸어왔다. “이번 주에는 올 거지? 기다리고 있다.”는 그의 말에 이끌려 시골에 들어갔다. 도착한 시골집 큰방에는, 동그랗게 어른들이 둘러 앉아 있었고 중심에 언제 챙겨갔는지 모를 내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마치 재판이라도 열리듯, 그들은 내가 하지도 않은 일들을 늘어놓으며 내가 사치스럽고 이기적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자신들의 실패와 고통을 덜어줄 희생양이 필요했던 그 시기, 나는 너무도 적절한 시점에 나타난 '공통의 적'이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그 모욕과 낙인을 위한 ‘증언’을 한 사람이 내 친동생이었다는 사실이었다. “00가 그러는데 너 밤마다 남자 만나서 아침에 들어온다며. 네가 만나는 남자가 한두 명이 아니라더라.” 이 한 마디로 나는 더럽고, 사치스럽고, 은혜도 모르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그 동그라미 안에는 내가 어릴 적 유일하게 나를 사랑해 준다고 믿었던 아버지도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주 깊게 침묵했다.


그들이 원하는 죄를 끝끝내 인정하지 않자, 결국 주황색 바가지를 담당했던 한 남자가 벌떡 일어나 30cm 정도 되는 쇠 기구로 내 머리를 내리쳤다. “네가 싸가지가 좀 없어야지. 맨날 거짓말이나 하고. 오늘처럼 인정도 안 하고. 그러니 네가 맞지 그냥 배겨? 니 오늘 맛 좀 봐라.” 그날을 잊을 수 없는 이유는 단순한 폭력 때문이 아니었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 바로 ‘내 편’이라 믿었던 이들이었다는 것. 내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지 않게 되자, 사랑은 제거의 이유가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 장소는 시골 장터 한복판, 가족들이 운영하는 고기 가게였다. 장이 선 날,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는 그날의 모든 고통을 감당해야 했다. 엄마를 잃은 아이처럼, 버려진 인형처럼 두 시간 가까이 울었다. 모두가 흩어진 후, 남겨진 옷가지와 화장품을 들고 사촌 언니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 집은 5만 원도 되지 않는 방, 말 그대로 ‘방’이라는 단어가 민망할 정도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서도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날 밤, 동생에게 물었다.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했어?” 동생은 “언니가 나를 안 챙기고, 집안일도 안 하니까.” 그리고는 끝내 사과 한 마디 없었다. 지금까지도 사과 한 조각조차 받지 못했다.


그 시절 나는 왕복 3시간이 넘는 거리를 오가며 대학교 수업을 듣고, 학교 근처에서 전단지를 돌리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귀가하면 곧장 잠들었고, 내 방은 점점 정리되지 않은 채 방치됐다. 그 시기, 우울증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기 때문에 정리정돈은 내게 사치처럼 느껴졌다. 그런 내 모습을 두고 동생과 사촌언니는 청소를 하지 않는다고 손가락질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청소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들은 수건들에 곰팡이가 필 때까지 세탁을 하지 않았고 필수품은 언제나 바닥나서 내가 사온 물건을 몰래 사용하고 채워 넣지 않았다. 어쩌다 내가 청소를 하려고 하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사촌언니는 대학생활을 시작하면서 사이비 종교에 빠져 있었고, 고등학생이던 동생은 사촌언니와 함께 받는 종교 교육을 핑계 삼아 집안일에서 벗어났다.


이후에도 그들은 내 삶을 지켜주지 않았고 그들이 받는 종교교육으로 인해 더 많은 거짓말들을 만들어 냈다. 당시에는 그들이 사이비 종교 교육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들의 거짓말과 그들이 말하는 모략들에 나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불편한 신념을 갖게 됐다. 그 당시에 내가 어렵게 마련한 물건은 알게 모르게 사라졌고, 함께 사는 이들은 나의 짐과 애써 구한 생활 용품들을 몰래 사용하거나 나 몰래 남에게 기꺼이 빌려주었다. 그 시절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나는 지금도 직장생활을 하는 남편에게 집안일을 시키지 않는다. ‘주부’라는 직업적 정체성을 스스로 자처하며, 남편에게는 “하고 싶은 걸 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일하고, 생존하고,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충분히 고된 존재라는 걸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5) 반복되는 구조, 멈출 수 있는 용기


역할 고착, 삼각관계, 고대 희생제 의의 심리학적 구조, 투사, 대상전치, 그리고 희생양 메커니즘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곤 한다. 왜냐하면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나는 어린 시절 경험한 세계를 무의식적으로 그대로 재현하듯, 남편과 사귀던 여자친구시절부터 시부모님과 동일한 구조를 복사하듯 구성했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그분들 역시 그 구조 안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정확하게, 심지어 아주 잘 수행해 주셨다는 점이다. 나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인 우울감에 사로잡혀 스스로 대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를 찾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이후 다른 장에서 더 깊이 나누고자 한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우리가 어린 시절 어떤 사람들과 어떤 세계를 구성했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했는지를 아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 인간은 성인이 되어서도 무의식 속에 각인된 과거의 감정 패턴과 관계 구조를 그대로 반복한다. 다시 말해, 과거에 잘못된 방식으로 프로그래밍된 상태에서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고, 사랑하고, 가정을 꾸리며, 심지어는 그 세계를 아이에게까지 그대로 물려준다. 왜냐하면 우리의 심리는 '익숙한 것'에서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불행하고 고통스럽더라도, 예측 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그 구조 안에 자신을 다시 놓는다.


그래서 나는 이제야말로, 내게 주어진 오래된 프로그램을 삭제하고 새로운 나로 살아가야 할 때라고 믿고 나와 누군가를 위해 이 글을 적는다. 이제 과거의 역할을 단호히 내려놓고, 타인의 감정과 요구를 위해 설계된 삶이 아닌, 내가 진정 원하는 방향으로 설계된 삶을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이야말로, 내가 더 이상 희생자가 아닌 주체로 살아가겠다는 선언이라고 생각한다. 역할 고착과 삼각관계, 희생양 메커니즘, 그리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작동했던 투사와 대상전치라는 모든 구조를 하나하나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나의 무의식은 오랫동안 반복된 그 구조 속에서 익숙하게 움직였지만, 이제는 그 반복을 멈출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삶은 더 이상 누군가의 기능이나 기대를 채우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나는 내가 선택한 방식으로, 내가 원하는 감정과 관계 안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매일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에게도 말하고 싶다. 당신의 역할은 당신이 선택할 수 있다. 타인의 기대나 과거의 낙인이 당신의 정체성을 결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더 이상 희생자가 아닌 존재로, 오늘부터 진짜 나로 살아가자.라고. 이 말을 나와 글을 읽는 당신 모두에게 조심스럽고 따뜻하게 건네 본다.



<가족 속에서 반복되는 심리 구조 6가지>



1. 역할 고착 (Role Entrapment)


가족 안에서 ‘나’로 살아가기보다, 특정 역할에 갇혀 살아가는 현상을 말한다. 예를 들어, 늘 분위기를 중재해야 하는 아이, 부모의 감정 쓰레기통이 된 자녀를 생각하면 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역할은 자아의 일부처럼 굳어져, 진짜 내 마음을 표현하기 어렵게 만들고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역할 고착을 반복해 자신의 세계를 파괴한다.


2. 삼각관계 (Triangulation)


두 사람 사이에 생긴 갈등을 해결하지 않고, 제삼자를 끌어들여 긴장을 분산시키는 구조로 부모의 갈등에 자녀가 정서적으로 개입되어 한쪽의 편을 들거나 중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역할을 담당하게 된 아이는 스스로의 감정을 돌볼 여유도 없이 가족의 불안을 떠맡게 되어 감당할 수 없는 우울을 갖게 되고 독립성과 자율성을 잃게 된다.


3. 고대의 희생제의 와 심리 구조


고대에는 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아 공동체의 불안과 재앙을 해소하려 했다. 심리학적으로 이는 집단이 자신들의 갈등을 감당하지 못할 때 누군가에게 책임을 몰아가며 심리적 안정을 되찾으려는 본능으로 오늘날 가족 안에서도 이 구조는 반복된다. 불편한 감정을 한 사람이 전부 떠맡고, 그 사람을 통해 가족은 ‘평온’을 유지하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


4. 투사 (Projection)


내 안의 감정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본다고 느끼는 심리 현상이다. 예를 들어, 내가 속으로 누군가를 질투하고 있지만 인정할 수 없을 때, "쟤가 날 질투하는 것 같아"라고 느끼는 것을 말한다. 투사는 갈등을 외부에 던져놓는 방식이에요. 그리고 그 감정을 상대방에게서 보게 만든다.


5. 대상전치 (Displacement)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보다 만만한 대상에게 옮겨 터뜨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상사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집에서 가족에게 푸는 식으로 표현된다. 이 감정은 ‘진짜 대상’에게 향하지 않고, 덜 위협적인 제삼자에게 향해 관계를 왜곡시킨다.


6. 희생양 메커니즘 (Scapegoating)


가족이나 집단이 불안하거나 갈등이 있을 때, 공통의 적을 만들어 그 사람에게 문제의 원인을 전가하는 구조로 공격 대상은 종종 가장 약하거나, 예민하거나, 눈에 띄는 사람이 된다. 이로써 갈등의 본질은 가려지고, 그 한 사람만이 문제의 책임을 떠안게 된다.




1부. 3. 참고자료


1. 보웬, 머리. 가족치료 이론: 가족체계이론의 이해. 학지사, 2014.

→ 삼각관계(triangulation), 가족 내 역할 고착 이론 참고.


2. Girard, René. The Scapegoat.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6.

→ 희생양 이론(scapegoat mechanism)에 대한 원전 자료.


3. Bowlby, John. Attachment and Loss: Vol. 1. Attachment. Basic Books, 1982.

→ 애착이론의 기반, 안정애착이 형성되지 않았을 때의 심리적 영향.


4. Freud, Sigmund. “Remembering, Repeating and Working-Through (Further Recommendations on the Technique of Psycho-Analysis II).” The Standard Edition of the Complete Psychological Works of Sigmund Freud, Vol. 12, 1914.

→ 반복 강박(repetition compulsion) 개념의 고전적 정의.


5. Judith L. Herman. Trauma and Recovery: The Aftermath of Violence--From Domestic Abuse to Political Terror. Basic Books, 1997.

→ 트라우마가 반복되는 심리적 구조와 그 회복에 대한 심층 분석.


6. 김혜남. 서로에게 무심해지는 가족들에게. 메이븐, 2018.

→ 한국 사회 내 가족 갈등과 감정의 투사에 대한 현실적 사례 서술.


7. 박성연. 「가족 내 자녀의 역할고착 경험에 대한 질적 연구」. 청소년상담연구, 제22권 1호, 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 2014.

→ 실제 가족 내에서의 역할고착과 희생양 경험에 대한 국내 질적 연구 논문.


8. 최광현. 가족의 발견. 부키, 2021.

→ 한국의 가족문화와 감정전이, 삼각구조의 일상적 재현에 대한 사례 중심 설명.


9. 박은정. 「투사 및 대상전치의 방어기제에 대한 정신분석적 고찰」. 한국심리학회지: 상담 및 심리치료, 제21권 2호, 2009.

→ 투사(projection) 및 대상전치(displacement)에 대한 국내 정신분석적 이론 정리.


10. EBS 다큐프라임. 「부모의 자격」 시리즈. EBS, 2011.

→ 부모의 역할 고착과 자녀의 정체성 형성 과정, 애착 형성 실패의 결과에 대한 실제 사례 중심 영상 강의.


11. 역할 고착 (Role Entrapment)

→ Bowen, M. (1978). Family Therapy in Clinical Practice.

→ 박성연. 「가족 내 자녀의 역할고착 경험에 대한 질적 연구」, 청소년상담연구, 2014.


12. 삼각관계 (Triangulation)

→ Bowen, M. (1978). Family Therapy in Clinical Practice.

→ 최광현. 가족의 발견, 부키, 2021.


13. 고대의 희생제의와 심리 구조

→ Girard, R. (1986). The Scapegoat.

→ 김종만.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에 관한 고찰」, 종교와 문화, 2003.


14. 투사 (Projection)

→ Freud, S. (1911). Psycho-Analytic Notes on an Autobiographical Account of a Case of Paranoia.

→ 박은정. 「투사 및 대상전치의 방어기제에 대한 정신분석적 고찰」, 한국심리학회지, 2009.


15. 대상전치 (Displacement)

→ Freud, A. (1936). The Ego and the Mechanisms of Defence.

→ 박은정. 위 논문 동일.


16. 희생양 메커니즘 (Scapegoating)

→ Girard, R. (1986). The Scapegoat.

→ 윤지영. 「희생양 메커니즘과 여성의 위치」, 여성연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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