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강박과 범죄학 (4)

유영철 사례를 다루기 전에 | 이론편(4)

by 숨듣다

현대의 법은 더 이상 신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그 자리는 인간의 이성, 시민의 자유, 사회질서와 같은 세속적인 가치들이 대신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작동 방식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법은 여전히 말의 봉인을 통해 권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종교적 질서와 본질적으로 유사한 구조를 지닌다.


법체계 내에서 범죄자가 발화할 수 있는 공간은 극히 제한되어 있으며, 그의 발화는 언제나 사전에 정해진 해석의 틀 안에서만 유효하게 작동한다. 범죄자는 자신의 경험을 설명하려 시도할 수 있으나, 그 설명은 곧바로 특정한 법적, 정신의학적 범주로 귀속된다. 그의 진술은 '정신병적 증상', '반사회적 성향', '충동조절 실패' 등의 범주로 분류되며, 그가 무엇을 말하든 간에 그것은 이미 마련된 의미 구조 안에서만 수용된다. 이러한 구조 바깥의 언어는 비이성적, 혹은 괴기스럽다고 간주되며 배제된다. 이로 인해 문제는 말의 내용이 아니라, 말 자체가 구조적으로 '들리지 않도록' 설정되어 있다는 데 있다. 사회는 범죄자의 언어를 경청의 대상이 아닌, 판단과 재단의 대상으로 다룬다.


이러한 작동 원리는 신의 질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종교의 시대에 죄인은 신 앞에서 회개해야 했고, 그 고통이나 내적 분열은 별다른 설명력을 지니지 못했다. 오직 규범의 위반과 그에 따른 처벌만이 문제시되었다.


오늘날 법은 초월적 존재를 배제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빈자리를 새로운 권위로 대체하며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범죄자는 여전히 '응답해야 하는 자'로서 소환되지만, 그 응답은 특정한 형식과 어휘 속에서만 허용된다. 법정에서의 발화는 가능하지만, 그것은 이미 구조적으로 해석 불가능하거나 들리지 않는 말로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말'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누군가의 발화가 아무리 날것의 진실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형식적 합리성이라는 기준에 의해 재단되거나 단순한 감정의 배설로 치부되는 순간, 그 발화는 증언의 가능성을 상실하게 된다. 사회는 누군가의 말이 말로서 받아들여지지 못하도록 만든 구조에 대해 책임지지 않으며, 설명 가능한 것만을 듣고자 한다. 그러나 설명은 결코 고통의 전부를 담아내지 못한다. 고통은 이성의 언어로 완전히 옮겨질 수 없는 특성을 지닌다.


만약 이러한 말을 들을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말은 결국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반복은 어느 순간 예고 없이 파국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우리가 마주하는 어떤 극단적인 행위는, 실은 이전에 들리지 않았던 말의 반복일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행위는 이미 수차례 발화되었지만 단 한 번도 진지하게 경청되지 않았던 말의 귀환일 수 있는 것이다.


설령 누군가의 말이 수없이 반복되고, 강하게 외쳐지더라도 그것이 들리지 않는 구조 속에 위치한다면, 그 말은 결국 사라지거나 파괴적인 형태로만 귀환할 수 있다. 특히 범죄자의 말이 그러하다. 그는 분명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듣지 않는다. 그 발화는 해석되거나, 진단되거나, 무시되거나, 심지어는 병리적 현상으로 치부되기까지 한다. 말은 남아 있지만, 그 말에 진정으로 귀를 기울이려는 사회적 태도가 부재한 상황에서, 말은 실질적으로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누군가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단순히 그 말의 논리적 정합성을 따지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 말이 왜 특정한 시점, 특정한 방식으로 반복되는지를 묻는 태도이다. 이와 같은 청취는 말해지지 못했던 것, 언어로 표현되기 어려운 고통이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기다리는 행위이며, 이 과정에서 듣는 자에게 일정한 감당을 요구한다.


그 이유는 어떤 말은 윤리적 판단을 잠시 유보해야만 들을 수 있으며, 때로는 청자의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는 방식으로 진동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청취는 해석, 납득, 설득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화자가 무엇을 말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왜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는가를 질문하는 방식이다. 이는 주체 자신조차 설명하지 못한 채 튀어나온 말, 구조적 고통이 스며든 언어의 흔적을 함께 감당하려는 윤리적 시도이다.


따라서 '듣는다는 것'은 말의 내용이 이해되지 않더라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일이며, 심지어 말이 끝난 후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 태도를 포함한다. 그 침묵조차 하나의 언어로 받아들이는 행위인 것이다.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자, 즉 '증언 불가능한 자'의 말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중단되며, 어디서 왜곡되는지를 통해, 말로 표현될 수 없었던 고통이 어떤 방식으로 사회적 공간을 획득하는지를 읽어야 한다. 그 말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그것을 처음부터 제대로 듣는 일뿐이다. 이해되지 않더라도, 그 말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를 지우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남겨진 자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응답이다.


일부 언어는 처음부터 '괴물의 언어'로 분류된다. 그러한 언어는 들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며, 분석과 해부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때 언어의 생산 주체는 '연쇄살인범', '조현병 환자', '사회부적응자' 등의 명명 아래 특정한 이미지로 고정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다루어야 할 텍스트는 그 말이 괴물의 언어였는지를 묻기 이전에, 그것이 무엇을 반복하고 있었는지를 먼저 질문해야 한다. '왜 그런 말을 했는가'가 아니라, '왜 그런 말밖에 할 수 없었는가', 그리고 '왜 그 말이 특정한 구조로 반복되었고, 특정한 타자에게 폭력적으로 향했는가'를 물어야 한다. 이러한 질문은 결코 범죄를 미화하거나 가해자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청취를 포기한 말이 어떻게 되돌아오는지를 추적하는 작업이다.


범죄자에 대한 사회의 반응은 일반적으로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범죄 행위는 법적 언어로 정리되며, 사건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처리된다. 언론은 범죄의 경위를 상세히 재구성하고, 대중은 분노와 혐오의 정서를 통해 질서 회복의 감각을 획득한다. 가해자는 사회적 공간에서 소멸되거나 철저히 고립되며, 그 존재는 더 이상 사회의 일부로 간주되지 않는 방식으로 봉인된다. 이때 사회가 제거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위법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범죄자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서술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 자체가 차단된다.


문제는 이 가능성의 차단이 매우 조용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 있다. 법정은 피고인에게 발언의 기회를 부여하나, 그 발언은 언제나 제도적 틀 안에서만 허용된다. "왜 그랬는가", "후회는 있는가", "정신과 진단 결과는 어떠한가"와 같은 질문들은 제도적으로 번역 가능한 언어만을 수용한다. 이러한 틀을 벗어난 발화는 두 가지 중 하나로 규정된다. 하나는 무의미한 '헛소리'로서, 다른 하나는 사회적 위협으로서이다. 범죄자가 자신의 고통, 세계에 대한 인식, 혹은 구조적 맥락에 대해 발화하고자 하는 순간, 사회는 그 발화의 내용을 논의하지 않고 오히려 그 형식을 문제 삼으며 침묵하거나 배제한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발화 내용이 아니라, 말이 구조적으로 들리지 않게 되는 방식에 근거한다. 범죄자는 말하는 주체가 아닌, 말해지는 객체로 위치 지어진다. 그는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요인'이자 병리학적으로 해석 가능한 '사례'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는 결코 주체로서의 언어적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다. 이는 단순한 상징적 배제가 아니라 실질적인 폭력이다. 말할 수 있는 자격이 박탈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존재를 증언할 권리 자체가 제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범죄자가 자기 자신의 언어로 세계를 설명하려는 순간, 사회는 강한 불안을 감지한다. 그의 설명은 대중이 기대하는 반성, 사과, 혹은 납득 가능한 병리적 진단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기 때문이다. 그는 때로 왜곡되고, 때로는 파괴적인 환상을 수반한 방식으로 자신이 처한 구조적 반복의 맥락을 말하려 한다. 그러나 사회는 이러한 언어를 이해하려 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언어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지워버리려 한다. 이는 사회가 외면하고자 했던 잔여가 여전히 존재함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증언이란 사건 이후에도 발화가 지속되어야 함을 전제한다. 그러나 사회는 그 '이후'를 허용하지 않는다. 발화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간주되며, 이미 충분히 설명되었다는 전제가 확립된다. 그러나 이 설명의 종결 선언 자체가 가장 강력한 차단 장치로 기능한다. 이는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무화시키기 위해 말의 장을 폐쇄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범죄자가 말하고자 했던 것과 말하지 못했던 모든 것이 무의미화된다. 증언은 시작되기도 전에 폐기되는 셈이다.


우리가 직면하는 것은 말이 사라진 자리가 아니라, 말이 애초에 허용되지 않았던 자리이다. 증언이 삭제된 자리는 반복을 야기한다. 이해되지 못한 말, 들리지 않은 진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재귀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또 다른 범죄이거나, 또 다른 파국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이 반복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며, 사회가 외면한 것들에 대한 응답으로 귀환한다. 따라서 증언은 단지 말하는 자의 책임에 그치지 않고, 듣는 자의 책임이기도 하다. 말의 가능성을 제거한 이들이, 그 부재로 인해 발생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말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무시된 말은 잠복하며, 의미가 지워진 자리는 언제나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그 흔적은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재등장한다. 이때 말은 더 이상 말의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 그것은 설명이 아닌 행위, 고백이 아닌 폭력, 구조화되지 않은 파괴로 귀환한다. 말이 실패한 자리에는 반복이 남는다.


반복은 그냥 습관처럼 생겨나는 것도, 충동적으로 튀어나오는 것도 아니다. 어떤 말은, 어떤 기억은, 제때 표현되지 못하고 마음속 어딘가에 가라앉아 있다가, 언젠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불쑥 되살아난다. 그게 바로 반복이다. 억눌렸던 감정, 제대로 인식되지 못한 기억, 감당하기 버거웠던 고통이 구조적으로 되돌아오는 방식. 그래서 반복은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그 말이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채 다시 돌아오는 한 형태다.


이걸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해선 안 된다. 반복은 말해지지 못한, 그리고 사회가 책임지지 않았던 구조의 그림자 같은 것이다. 여전히 들리지 않는 구조 속에서, 사람은 어떻게든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한다. 그 시도가 때로는 폭력적인 형태로 터져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사회는 그 폭력을 단지 '행위'로만 규정하고, 그 배경은 묻지 않는다. 그렇게 말의 가능성은 또다시 차단되고, 반복은 계속된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은 단지 침묵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언젠가는 말로 붙잡히길 기다리는 상태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다면, 증언은 말이 되지 못하고 결국 파국으로 이어진다. 사회는 이 파국을 예측 불가능한 사건으로 분류하려 하지만, 그 이면엔 늘 말해지지 못한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다. 반복은 바로 그것—여전히 말해질 자격이 있으나, 아직 누구도 들으려 하지 않았던 그 말—을 환기한다.


유영철이 남긴 말들은 일정한 구조나 서사를 따르지 않는다. 그 언어엔 감정의 과잉, 자기모순, 자학과 공격성이 뒤섞여 있다. 무언가를 말하려 애쓰면서도, 동시에 그걸 부정하는 방식. 그래서 그의 언어는 분석보다는 ‘견디는’ 것이 더 적절한 방식일지 모른다.


그렇기에 유영철의 편지는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들릴 수 있는 자리’에 놓여야 한다. 그의 말이 왜 실패했는지, 어떤 구조가 그 실패를 만들어냈는지를 따라가 보는 것. 그건 그의 말을 옹호하거나 정당화하려는 게 아니라, 그 말의 기원을 묻는 작업이다.


유영철의 말은 불편하다. 혐오를 자극하고, 윤리적 판단을 흔들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고민하게 된다. 이 언어를 ‘괴물의 언어’로 봉인해버릴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언어’로 감당해볼 것인가. 만약 이 말이 인간이기에 할 수 있었던 말이라면, 인간이기에 실패한 말이라면, 그리고 인간이기에 반복된 말이라면—우리는 그 앞에서 잠시 멈춰 서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아직 들리지 않는 증언이 언젠가 말이 되기 위해 필요한 불편한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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