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단어의 모순된 의미에 대하여(1910)

by 숨듣다

출처 : 정신분석 및 정신병리학 연구 연감, 제2권(1), 비엔나 1910, 179-84쪽. — 전집, 제8권, 214-21쪽.

Jahrbuch für psychoanalytische und psychopathologische Forschungen, Bd. 2 (1), Wien 1910, S. 179-84. — Gesammelte Werke, Bd. 8, S. 214-21.


텍스트 출처 : https://www.textlog.de/freud/aufsaetze/ueber-den-gegensinn-der-urworte


나의 「꿈의 해석」에서, 나는 분석적 노력의 결과 가운데 이해되지 않은 하나의 명제를 제시한 바 있는데, 이제 이 글의 도입에서 그것을 다시 반복하려 한다.


“꿈이 대립과 모순의 범주에 대하여 보이는 행동은 지극히 두드러진 것이다. 꿈은 이를 그저 도외시한다. ‘아니오’라는 것은 꿈에게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대립물들이 특별한 편애를 받으며 하나의 통일로 묶이거나 하나의 것 안에 표상된다. 꿈은 또한 임의의 요소를 그것의 소망-반대(Wunschgegensatz)로 표상하는 자유를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그래서 어떤 대립 가능한 요소이든 그것이 꿈-사고 속에 긍정으로 들어 있는지 부정으로 들어 있는지 처음에는 알 길이 없다.”


고대의 꿈 해석가들은, 꿈에서 어떤 사물이 그 반대를 의미할 수 있다는 전제를 가장 널리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가능성은, 꿈에 대체로 의미와 해석 가능성을 인정해 온 현대의 꿈 연구자들에 의해서도 때때로 인지되어 왔다. 또한 나와 함께 과학적 꿈 해석의 길을 걸어온 이들은 모두 위에 인용한 명제가 옳다는 것을 확인했을 것이라 가정하더라도, 어떤 반대 의견도 불러일으키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꿈작업이 부정을 제쳐두고, 서로 반대되는 것들을 동일한 표상 수단으로 표현하려는 이 특이한 성향을 이해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우연히 읽게 된 언어학자 K. 아벨의 한 논문 덕분이었다. 그 논문은 1884년에 단행본 소책자로 출간되었고, 다음 해에 저자의 「언어학 논문집」에도 수록되었다. 이 주제의 흥미로움은, 내가 아벨의 논문에서 결정적인 대목들을 원문 그대로(대부분의 예시는 생략하더라도) 인용하는 것을 정당화해 준다. 우리는 곧 놀라운 해명을 얻게 되는데, 꿈작업의 위와 같은 관행이 우리가 아는 가장 오래된 언어들의 한 특질과 정확히 겹친다는 것이다.


아벨은 먼저 이집트어의 오랜 연륜을 강조하면서, 이 언어가 최초의 상형문자 비문들 훨씬 이전에이미 전개되어야 했다고 지적하고서 계속한다(4쪽):


“이 원시 세계의 유일한 유물이라 할 이집트어에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 단어들이 상당수 있는데, 그중 하나는 다른 하나의 정반대를 말한다. 독일어에서 ‘강한(stark)’이라는 단어가 ‘강한’과 동시에 ‘약한’도 의미한다고—이처럼 분명한 무의를 감수할 수 있다면—상상해 보라. 베를린에서 ‘빛(Licht)’이라는 명사가 ‘빛’과 동시에 ‘어둠’을 가리키고, 뮌헨 시민 하나는 맥주를 ‘맥주’라 부르지만 다른 이는 같은 단어를 물을 가리킬 때 쓴다고 해보라. 그러면 우리는 옛 이집트인들이 습관적으로 자기들의 언어에서 행하던 놀라운 관행을 얻게 된다. 누가 여기에 회의적으로 고개를 젓는다고 해서 그를 나무랄 수 있겠는가? …”


(같은 책, 7쪽): “이와 유사한 많은 대립적 의미(부록 참조) 사례들 앞에서, 최소한 한 언어에는 하나의 사물과 그 반대 사물을 동시에 지시하던 단어들이 풍부하게 존재했다는 점이 의심의 여지 없이 드러난다. 아무리 놀랍더라도 우리는 이 사실앞에 서 있으며, 이를 고려해야 한다.”


저자는 이 사실을 우연한 동음으로 설명하는 것을 배척하며, 이집트인의 정신문화의 저열함으로 돌리는 것 또한 단호히 거부한다:


(같은 책, 9쪽): “그런데 이집트는 결코 무의의 고향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 이성의 가장 이른 발현지가운데 하나였다… 그들은 순수하고 위엄 있는 도덕을 알았고, 오늘날 문명을 소유한 민족들이 피에 굶주린 우상에게 인신공양을 바치던 시절에 이미 십계명의 상당 부분을 정식화했다. 그토록 어두운 시대에 정의와 문화의 횃불을 지핀 민족이, 일상적 말과 생각에서 어리석음 그 자체일 수는 없지 않은가… 유리를 만들고 거대한 석괴를 기계적으로 들어 올려 옮길수 있었던 민족이라면, 한 사물을 그것 자체이자 동시에 그 반대로 간주하지 않을이성쯤은 최소한 갖추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그들이 이처럼 기이한 모순적 언어를 스스로 허용했는지—서로 가장 적대적인 생각들에 동일한 음형의 담지자를 주고, 서로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것들을 불가해한 결합으로 묶어버리곤 했던 사실을—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어떠한 설명 시도에 앞서, 이집트어의 이 불가해한 관행의 고양된 형태도 언급되어야 한다. “이집트어 어휘의 모든 기행 가운데 아마도 가장 놀라운 것은, 서로 반대 의미를 지닌 두 어휘가 합성되어 그 두 구성요소 중 오직 한쪽의 의미만을 갖는 합성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 비범한 언어에는 ‘강하다’와 동시에 ‘약하다’, ‘명령하다’와 동시에 ‘복종하다’를 의미하는 단어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늙-젊음(altjung)’, ‘먼-가까움(fernnah)’, ‘묶-떼다(bindentrennen)’, ‘밖-안(außeninnen)’같은 합성어들도 있는데, 이들은 그 상이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첫째는 오직 ‘젊다’, 둘째는 오직 ‘가깝다’, 셋째는 오직 ‘결합하다’, 넷째는 오직 ‘안쪽’만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개념적 모순들을 의도적으로 결합하되, 중국어에서 때때로 그러하듯 제3의 개념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 합성어를 통해 그 모순쌍 가운데 한쪽의 의미만—본래 그쪽만으로도 충분히 표현될—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 수수께끼는 보이는 것만큼 어렵지 않게 풀린다. 우리의 개념은 비교를 통해 생겨난다. “만일 언제나 밝기만 했다면, 우리는 밝음과 어둠을 구별하지 못했고, 따라서 밝음의 개념도 단어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명백하듯, 이 행성의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구별될 때만 독립적 실존을 갖는다….” “그렇다면 모든 개념은 그 반대항의 쌍둥이인 바, 그것이 어떻게 최초로 사유되었으며, 어떻게 그것을 사유하려는 타인들에게 전달될 수 있었겠는가? 그 반대항에 대한 측량(비교)을 통하지 않고서야 어찌 가능했겠는가?…”


(같은 책, 15쪽): “강함의 개념은 약함과의 대립속에서만 구상될 수 있었던 만큼, ‘강하다’를 의미하는 단어에는 그것을 존재로 이끌어 준‘약하다’에 대한 동시적 기억이 깃들어 있었다. 이 단어는 사실상 ‘강함’도 ‘약함’도 아니라, 그 둘 사이의 관계, 곧 둘을 동등하게 생성하는 차이를 가리켰던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단순한 개념들을 오직 그것들의 반대항과의 대립속에서만 획득할 수 있었으며, 점차에 이르러서야 그 대립쌍의 양쪽을 분리하고, 한쪽을 다른 쪽에 대한 의식적 측량 없이도 사유하는 법을 배웠다.”


언어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뿐 아니라 무엇보다 그것을 타자에게 전달하기 위한 것인 만큼, 우리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원시 이집트인’은 어떻게 이 양성(兩性的) 개념의 어느 쪽을 자신이 그때그때 의미하고자 하는지타인에게 알렸는가? 문자에서는 소위 ‘결정부호(Determinativa)’라 불리는 그림들이, 문자표기뒤에 붙어 그 뜻을 지정했으며, 그것들 자체는 발음되지 않았다.


(같은 책, 18쪽): “이집트어 ken이 ‘강하다’를 뜻해야 할 때는, 그 음가를 철자로 적은 뒤에 무장한 채 꼿꼿이 선 남자의 그림이 놓인다. 같은 단어가 ‘약하다’를 표현할 때에는, 그 음가를 나타내는 문자뒤에 쭈그리고 앉아 해이해진 사람의 그림이 따른다. 이와 유사하게, 대부분의 다른 양의적(두 의미) 단어들도 설명적 그림이 동반된다.”


구어에서는, 아벨의 견해로는, 몸짓이 말해지는 단어에 원하는 부호(부정/긍정의 표지)를 부여하는 데 쓰였다. 아벨에 따르면, 이러한 대립적 이중의미의 현상은 ‘가장 오래된 어근들’에서 관찰된다. 언어발달이 진행됨에 따라 이 양의성은 소멸했고, 적어도 고(古) 이집트어에서는 현대 어휘의 단의성(하나의 의미)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행을 추적할 수 있다. “본래 이중의미를 지니던 단어들은, 후대의 언어에서 각각 단일 의미의 두 단어로 분화되는데, 대립하는 두 의미가 각각 같은 어근의 음성적 ‘완화’(변형)하나씩을 점유한다.” 예컨대 상형문자 단계에서조차 이미 ken(‘강-약’)은 ken(‘강함’)과 kan(‘약함’)으로 분기한다. “다시 말해, 오직 대립적으로만 발견될 수 있었던 개념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인간 정신에 충분히 숙달되어, 그 대립쌍의 각 부분이 독자적 실존을 획득하고, 그 각각이 별도의 음성적 대표자를 부여받게 된다는 뜻이다.”


이집트어에서 비교적 손쉽게 입증되는 원초적 역의는, 아벨에 따르면, 셈어족과 인도유럽어족으로도 확장될 수 있다. “다른 언어계에서도 어느 정도까지 이것이 가능한지는 아직 두고 볼 일이다. 비록 역의가 원래는 모든 인종의 사유자들에게 현전했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어디에서나 의미에 드러나거나 보존되었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벨은 한편, 철학자 베인(Bain)이 실제 현상에 대한 지식 없이도 순수하게 이론적 이유에서, 단어들의 이러한 이중의미를 하나의 논리적 필연으로 요구했다는 사실도 상기시킨다. 해당 대목(『논리학』 1권, 54쪽)은 다음 문장들로 시작한다:


“모든 지식, 사유, 의식의 본질적 상대성은 언어속에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것이 어떤 앞선 것으로부터의 이행으로 파악된다면, 모든 경험은 두 측면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모든 이름이 이중의미를 갖거나, 그렇지 않다면 각 의미마다 두 개의 이름이 있어야 한다.”


아벨의 「이집트어·인도유럽어·아랍어의 역의에 관한 예시부록」에서, 언어에 밝지 않은 우리에게도 인상적인 몇 가지를 뽑아보자. 라틴어에서 altus는 ‘높은’과 ‘깊은’을 모두 뜻하고, sacer는 ‘신성한’과 ‘저주받은’을 모두 뜻한다. 여기서는 아직 완전한 역의가 어형 변화 없이유지된다. 반대 의미의 분리를 위한 음성적 변이는 clamare(외치다) — clam(조용히, 은밀히), siccus(마른) — succus(즙) 같은 예에서 입증된다. 독일어Boden은 오늘날에도 집의 맨 위와 맨 아래를 모두 뜻한다. 우리의 bös(나쁜)에 상응하는 bass(좋은)가 있고, 고(古) 작센어의 bat(좋은)와 영어 bad(나쁜)를 대조할 수 있다. 영어 to lock(닫다)과 독일어 Lücke, Loch(틈, 구멍), 독일어 kleben(달라붙다) — 영어 to cleave(쪼개다), 독일어 Stumm(벙어리) — Stimme(목소리) 등도 그러하다. 이렇게 본다면, 흔히 조롱되는 어원설 lucus a non lucendo(‘빛나지 않기 때문에 lucus[숲]라 한다)도 의미 있는것으로 바뀔 수 있을지 모른다.


아벨은 또 「언어의 기원」(1885, 305쪽)에서, 옛 사유의 다른 흔적들에도 주의를 환기한다. 영어화자는 오늘날에도 without(없이)을 말하기 위해, 문자 그대로 ‘with-out(함께-없이)’, 즉 ‘mit-ohne(함께-없이)’를 쓴다. with자체는 오늘날 우리의 ‘함께(mit)’에 해당하지만, 본래는 ‘함께’와 ‘없이’를 모두 뜻했음을 withdraw(떠나다), withhold(거두다)에서 볼 수 있다. 우리는 독일어wider(대항하여)와 wieder(다시, 함께)에서도 같은 변화를 알아본다.


꿈작업과의 비교를 위해, 고대 이집트어의 또 하나의 지극히 특이한 성질이 중요하다. “이집트어에서는 단어들이—우선 겉보기에—음형(소리)과 의미를 뒤집을수 있다. 독일어 gut이라는 단어가 이집트어였다고 가정하면, 그것은 gut과 함께 나쁨도 의미하고, gut과 함께 tug로도 소리 날 수 있다. 이런 음형 반전의 예는 우연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많으며, 아리아어족과 셈어족에서도 풍부하게 찾아낼 수 있다. 이를테면 우선 게르만어권에서만도 Topf—pot, boat—tub, wait—täuwen, hurry—Ruhe, care—reck, Balken—klobe/club등을 주목하라. 다른 인도유럽어들을 함께 고려하면 사례의 수는 더 늘어난다. 예컨대 capere—packen, ren—Niere, leaf(잎)—folium, [러시아어] dum-a(사유)—thymos—산스크리트 mêdh, mûdha(영혼), Mut(용기); Rauchen(연기나다)—러시아어 kur-ít, kreischen(비명 지르다)—to shriek등등.”


음형 반전현상을 아벨은 어근의 중복(Reduplikation)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언어학자를 따르기 어렵다는 난점을 느끼게 된다. 아이들이 얼마나 즐겨 단어의 음형을 거꾸로가지고 노는지, 그리고 꿈작업이 얼마나 빈번히 자기 표현 재료의 반전을 다양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지를 우리는 기억한다. (여기서는 더 이상 문자가 아니라, 그 순서를 뒤집는 ‘그림들’이 문제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음형 반전을 보다 심층적인 요인으로 돌리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된다.


서두에서 강조했던 꿈작업의 특성과, 언어학자가 밝혀낸 가장 오래된 언어들의 관행사이의 합치 속에서, 우리는 꿈에서의 사유 표현이 퇴행적이며 고대적(아르카익)인 성격을 지닌다는 우리의 견해가 확인된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정신과 의사들에게는, 우리가 언어의 발달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수록 꿈의 언어를 더 잘 이해하고 더 쉽게 번역할 수 있으리라는 점이, 부인하기 어려운 가설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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