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 편집증, 동성애의 신경증적 메커니즘에 관하여-2

B.편집증(Paranoia)

by 숨듣다

편집증(Paranoia). 잘 알려진 이유로, 편집증 사례들은 대개 분석적 연구를 피해간다. 그럼에도 나는 최근 두 명의 편집증 환자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통해 내가 몰랐던 몇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첫 번째 사례는 한 젊은 남성으로, 완벽하게 정숙한 아내를 대상으로 한 질투 편집증이 완전히 발달한 상태였다. 망상이 틈 없이 그를 지배했던 격동의 시기는 이미 지나간 뒤였다. 내가 그를 보았을 때, 그는 며칠간 지속되는 잘 분리된 발작만을 일으켰는데, 흥미롭게도 이 발작은 (양측 모두에게 만족스러웠던) 성교가 있은 다음 날 정기적으로 나타났다. 이는 이성애적 리비도가 충족될 때마다, 함께 자극된 동성애적 요소가 질투 발작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도록 강요했다는 결론을 정당화한다.


발작의 재료는, 아내의 완전히 무의식적인 요염함(Koketterie)이 그에게만, 다른 이에게는 감지되지 않게 드러나는 아주 사소한 징후들을 관찰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아내가 옆에 앉은 남자의 손을 무심코 스쳤다거나, 그를 향해 얼굴을 너무 기울였다거나, 남편과 단둘이 있을 때보다 더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는 식이다. 그는 아내의 무의식에서 비롯된 이 모든 표현에 대해 비상한 주의력을 보였고, 그것을 항상 정확하게 해석해냈으므로, 사실상 그는 항상 옳았으며 심지어 자신의 질투를 정당화하기 위해 분석을 끌어들일 수도 있었다. 사실 그의 비정상성은 아내의 무의식을 더 날카롭게 관찰하고, 다른 이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그것을 훨씬 더 높게 평가한다는 점으로 귀결되었다.


우리는 박해받는 편집증 환자들 역시 아주 유사하게 행동한다는 것을 상기한다. 그들 또한 타인에게서 무관심한(indifferent)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이 타인들, 즉 낯선 사람들이 그들에게 주는 사소한 징후들을 자신들의 "관계 망상(Beziehungswahn)"에 이용한다. 그들의 관계 망상이 의미하는 바는, 그들이 모든 낯선 사람에게서 사랑과 같은 것을 기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타인들은 그들에게 그런 것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은 혼자 웃거나, 지팡이를 휘두르거나, 심지어 그들이 지나갈 때 바닥에 침을 뱉는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호의적인 관심이 있다면 결코 하지 않을 행동이다. 이런 행동은 오직 그 사람이 완전히 무관심할 때, 그를 없는 사람처럼 취급할 수 있을 때만 하는 것이다. 편집증 환자는 "낯선(fremd)"과 "적인(feindlich)"이라는 개념의 근본적인 유사성을 볼 때, 자신의 사랑 요구에 대비되는 그러한 무관심을 적대감으로 느끼는 것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이제 우리는 질투하는 편집증 환자든 박해받는 편집증 환자든, 그들의 행동을 두고 그들이 자기 내면에서 인지하고 싶지 않은 것을 외부의 타인에게 투사한다고 말하는 것이 매우 불충분하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물론 그들은 그렇게 한다. 하지만 그들은 말하자면 허공에, 즉 유사한 것이 전혀 없는 곳에 투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무의식에 대한 자신들의 앎(Kenntnis des Unbewußten)에 의해 인도되며, 자신의 무의식으로부터 거두어들인 주의력을 타인의 무의식으로 이동시킨다.


우리의 질투하는 환자는 자신의 부정 대신 아내의 부정을 인식한다. 아내의 부정을 엄청나게 확대하여 의식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부정을 무의식 상태로 유지하는 데 성공한다. 만약 그의 사례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박해받는 자가 타인에게서 발견하는 적대감 역시 이 타인들에 대한 그 자신의 적대적 감정의 반영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 편집증 환자에게는 바로 그 가장 사랑했던 동성의 인물이 박해자가 된다는 것을 알 때, 이러한 정서 반전(Affektumkehrung)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의문이 생기며, 그에 대한 가까운 대답은 항상 존재하는 감정의 양가성(Ambivalenz)이 증오의 토대를 제공하고 사랑의 요구가 충족되지 않음으로써 그것이 강화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감정의 양가성은 우리의 환자에게는 질투가 그랬던 것처럼, 박해받는 자에게도 동성애를 방어하는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


나의 질투 환자가 꾸는 꿈은 나에게 큰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꿈이 발작의 폭발과 동시에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망상의 지배하에 있을 때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꿈들은 망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으며 기저에 깔린 동성애적 충동들을 평소보다 더 심하게 위장하지 않은 채 드러냈다. 편집증 환자의 꿈에 대한 나의 적은 경험으로 인해, 나는 당시에 편집증은 꿈속으로 침투하지 않는다고 일반화하기 쉬웠다.


이 환자의 동성애 상태는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우정도 없었고 사회적 관심사도 없었다. 마치 망상이 뒤처진 것을 만회하려는 듯, 남성과의 관계 발달을 이어받은 것처럼 보였다. 가족 내에서 아버지의 미미한 중요성과 어린 소년 시절의 수치스러운 동성애적 외상이 함께 작용하여, 그의 동성애를 억압 속으로 몰아넣었고 승화(Sublimierung)로 가는 길을 차단했다. 그의 청소년기 전체는 강력한 어머니 고착(Mutterbindung)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는 여러 아들 중 공공연히 어머니의 총애를 받는 아들이었고, 어머니와 관련하여 정상적인 유형의 강한 질투를 발전시켰다. 나중에 그가 주로 어머니를 부유하게 만들려는 동기의 지배하에 결혼 상대를 선택했을 때, 처녀인 어머니에 대한 그의 욕구는 신부의 처녀성에 대한 강박적 의심으로 표현되었다. 결혼 생활의 첫 몇 년은 질투가 없었다. 그러다 그는 아내에게 불충실해졌고 다른 여성과 오랜 관계를 맺었다. 그가 어떤 특정한 의심으로 인해 겁을 먹고 이 애정 관계를 포기했을 때, 비로소 그는 자신의 부정에 대한 비난을 잠재울 수 있는 두 번째 유형, 즉 투사 유형의 질투를 터뜨렸다. 이는 곧 장인을 대상으로 하는 동성애적 충동이 더해지면서 완전한 질투 편집증으로 복잡해졌다.


나의 두 번째 사례는 아마 분석 없이는 박해 편집증(paranoia persecutoria)으로 분류되지 않았을 것이지만, 나는 그 젊은 남성을 이 질병으로 이행할 후보자로 간주해야 했다. 그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관계에서 극도로 폭넓은 양가성이 존재했다. 한편으로 그는 모든 면에서 아버지의 바람과 이상에서 벗어나 발전한, 가장 확고한 반항아였다. 다른 한편으로 더 깊은 층위에서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다정한 죄책감 속에서 자신에게 여성의 향유를 금지한, 여전히 가장 복종적인 아들이었다. 남성들과의 실제 관계는 분명 불신의 특징을 띠었다. 그는 뛰어난 지성으로 이러한 태도를 합리화했으며, 지인들과 친구들에게 배신당하고 착취당하도록 일을 처리할 줄 알았다. 내가 그에게서 새롭게 배운 것은, 고전적인 박해 사고가 그것에 대한 믿음이나 가치 부여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그의 분석 중에 때때로 번득였지만, 그는 그것들에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고 정기적으로 조소했다. 이는 많은 편집증 사례에서 유사하게 나타날 수 있으며, 그러한 질병이 발병할 때, 우리는 표출된 망상적 관념들을 새로운 산물로 간주하지만, 사실 그것들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을 수도 있다.


질적 계기, 즉 특정 신경증적 형성물의 존재가, 양적 계기, 즉 이 형성물들이 어느 정도의 주의력, 더 정확하게는 어느 정도의 투자(Besetzung)를 끌어들일 수 있는가라는 양적 계기보다 실질적으로 덜 중요하다는 것은 나에게 중요한 통찰로 보인다. 질투 편집증이었던 우리의 첫 번째 사례에 대한 논의는, 그 비정상성이 본질적으로 타인의 무의식에 대한 해석에 과잉투자(Überbesetzung)하는 데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이 양적 계기를 동일하게 중시할 것을 요구했다. 우리는 히스테리 분석을 통해 이미 유사한 사실을 알고 있다. 억압된 충동 충족의 파생물인 병원성 환상들은 오랫동안 정상적인 정신생활과 나란히 용인되다가, 리비도 경제의 전환으로 인해 과잉투자를 받기 전까지는 병원성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그제야 비로소 증상 형성으로 이어지는 갈등이 발발한다. 이처럼 우리의 인식이 진전됨에 따라, 우리는 점점 더 경제적 관점(ökonomischen Gesichtspunkt)을 전면에 내세울 수밖에 없게 된다. 나는 또한 여기서 강조된 이 양적 계기가, 블로일러(Bleuler)와 다른 이들이 최근 도입하고자 하는 "전환(Schaltung)" 개념이 포괄하려는 현상을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은지 묻고 싶다. 심리적 과정의 한 방향에서 저항이 증가하면 다른 경로의 과잉투자를, 그리고 그로 인해 그 경로가 과정에 개입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가정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나의 두 편집증 사례에서는 꿈의 양상에서 교훈적인 대조가 나타났다. 첫 번째 사례에서는 언급했듯이 꿈이 망상에서 자유로웠던 반면, 두 번째 환자는 동일한 내용의 망상적 관념에 대한 선행자 혹은 대리 형성물로 간주될 수 있는 박해 꿈을 대거 생산했다. 그가 큰 불안을 느껴야만 겨우 벗어날 수 있었던 박해자는 대개 힘센 황소나 다른 남성성의 상징이었으며, 그는 때때로 꿈속에서조차 그것을 아버지의 대리물로 인식했다. 한번은 그가 매우 특징적인 편집증적 전이 꿈(Übertragungstraum)을 보고했다. 그는 내가 자신의 면전에서 면도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고, 냄새로 내가 그의 아버지가 쓰던 것과 같은 비누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내가 그에게 나를 아버지로 전이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그랬다는 것이다. 꿈에서 선택된 이 상황은, 그가 자신의 편집증적 환상에 대해 경멸감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히 드러냈다. 왜냐하면 그는 매일 눈으로 확인하는 바를 통해, 내가 애초에 면도 비누를 사용할 처지가 아니며 따라서 이 점에서는 아버지 전이를 위한 어떤 근거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두 환자의 꿈을 비교하는 것은, 편집증(혹은 다른 정신신경증)이 꿈속에도 침투할 수 있는가 하는 우리의 질문 자체가 꿈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기반하고 있음을 가르쳐준다. 꿈은 깨어있을 때의 사고와는 달리 (억압된 영역의) 내용물, 즉 깨어있을 때는 허용되지 않는 내용물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그 점을 제외하면, 꿈은 단지 사고의 한 형태(Form des Denkens)일 뿐이며, 꿈-작업(Traumarbeit)과 그 조건들을 통해 전의식적(vorbewußt) 사고 재료를 변형시킨 것이다. 우리의 신경증 용어는 억압된 것에는 적용될 수 없으며, 그것은 히스테리적이라고도, 강박신경증적이라고도, 편집증적이라고도 불릴 수 없다. 반면에 꿈 형성에 사용되는 재료의 다른 부분, 즉 전의식적 사고는 정상이거나 어떤 신경증의 성격을 띨 수 있다. 전의식적 사고는 우리가 신경증의 본질로 인식하는 모든 병원성 과정의 결과물일 수 있다. 왜 그러한 병적 관념이 꿈으로의 변형을 겪지 않아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따라서 꿈은 히스테리적 환상, 강박 관념, 망상적 관념에 상응할 수 있으며, 즉 꿈의 해석을 통해 그러한 것이 도출될 수 있다. 두 편집증 환자에 대한 우리의 관찰에서, 우리는 한 환자의 꿈은 그가 발작 상태에 있는 동안 정상적이었고, 다른 환자의 꿈은 그가 아직 자신의 망상적 관념을 조소하는 동안 편집증적 내용을 담고 있음을 발견한다. 따라서 두 경우 모두, 꿈은 깨어 있는 삶에서 그때그때 밀려나 있던 것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것 역시 규칙일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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