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 경장편 소설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있는 사람들은 그 목표 때문에 시야가 흐려지기도 한다. 신은 모든 기도를 듣지 못하고 가끔 악한 것들이 그 빈틈을 파고 들어온다. 그들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악의는 반드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그것은 때로 목숨과도 연결되어 큰 해를 끼친다. 그러나 우리는 나의 바람을 들어주는 손길이 따뜻한지 차가운지 고려하지 못한다.
전형적인 모범생의 특징을 고루 갖춘 채은은 수업 시간 내내 집중하지 못했다. 몇몇 선생님들이 의아하게 쳐다볼 만큼 빠르게 지쳐가던 채은은 점심시간이 되자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일어나 수행평가 노트를 들고나가려다 그대로 쓰러졌고 쭉 채은을 지켜보고 있던 하리가 채은을 업고 보건실로 향했다. 도희는 채은의 가장 친한 친구인 지혜와 함께 담임 선생님을 모시러 갔고 해주는 흐트러진 자리를 정리 한 뒤 하리를 따라갔다.
“반장은 좀 어때?”
“열은 없는데 두통이 심하대. 지금 진통제 먹고 쉬다가 조퇴할 건가 봐.”
“이대로 집에 가도 되는 거야?”
“음.”
해주에게 설명을 들어 얼추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도희가 물었다. 하리는 대답 대 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동전 크기만 한 반짝이는 검은색 단추였다. 자세히 보니 날카로운 도구로 긁힌 흔적이 있었다. 글씨 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했다.
“아마 괜찮을 듯.”
“저 단추….”
“단추 기도.”
어느 학교에나 있는 괴소문처럼 하리의 학교에도 소원을 이루기 위한 몇 가지 미신이 있었다.
그중 단추 기도는 꽤 많은 아이들이 지금도 시도하고 있는 유명한 미신으로, 다른 사람의 단추를 몰래 뜯은 다음 뒷면에 바늘이나 샤프로 긁어 소원을 새긴 뒤 잃어버리지 않고 잘 갖고 있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내용이었다. 오래 보관할수록 효과는 확실해지지만 소원이 이루어지면 바로 태워버려야 했다. 그렇게 까다롭지 않은 조건이었기에 유행처럼 다수의 학생들이 미신을 따랐고 단추 한두 개가 없는 셔츠나 재킷을 입고 다니는 학생들이 자주 보였다.
학교를 쉬었던 해주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별로 위험해 보이지는 않는데?”
“그렇지. 원래 사람이 많은 곳에는 소원도 많고 잡념도 많으니까.”
어떤 재료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며 하리가 단추를 들어 형광등에 비췄다.
“재료?”
“응. 확실히 교복 단추는 아니네.”
하리의 시선을 따라 단추를 살핀 도희가 말했다. 겉옷 외에 일상복을 입지 못하는 교칙도 있었고 요즘 날씨는 하복을 입게 해 달라는 의견이 나올 정도로 화창했다. 가벼운 교복에 달릴 단추가 아니니 적어도 채은이 최근에 학교에서 얻은 단추는 아닌 것 같았다. 하리는 온기가 흘러나오는 단추를 노려봤다. 분명히 싸한 기운은 느껴지는데 아무리 주변을 살펴도 아까 봤던 검은 형체가 보이지 않았다. 수상한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
혹시 또 해주에게 빙의했을까 싶어 고개를 내리자 말끔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헤헤하고 웃는 입꼬리에 하리도 긴장을 풀었다.
“뒤에 뭐라고 쓴 거지?”
여전히 단추에서 눈을 떼지 않은 도희의 질문에 셋은 머리를 맞대고 글씨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집? 돈?”
“도움 아닐까?”
“근데 이거 때문에 반장이 아픈 게 확실해? 소름 돋긴 하지만….”
알쏭달쏭하다는 표정의 도희를 향해 어깨를 으쓱한 하리가 단추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거의 90%.”
“아닐 수도 있다는 거야?”
“오늘 내가 밤새 갖고 있어 볼게.”
단번에 울상이 된 해주를 하리가 애써 모른척하자 웃음이 터진 도희가 손을 내밀었다.
“아냐. 이건 내가 갖고 갈래.”
“왜?”
너는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지 않냐는 뒷 문장이 생략된 말을 알아들은 도희가 여전히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만약에 진짜 귀신이 나오면 넌 혼자 해결해 버릴 거고 구해주는 위험해질 테니까.”
딱 하루만 갖고 있겠다고 여러 번 약속을 한 끝에 도희는 단추를 챙길 수 있었다. 해주는 더욱 울상이 되었고 하리도 마땅찮은 눈빛을 보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단추를 이리저리 살펴보는 도희의 표정은 마냥 해맑았다.
“지혜 있잖아, 반장 베프. 걔한테 혹시 최근에 반장한테 무슨 일 있었는지 물어봤거든.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는 걸 보면 이걸 주운 게 아주 아주 최근의 일일 거야.”
그럴듯한 추론이었다. 해주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발을 동동 굴렀다. 정작 두 사람은 단추에 정신이 팔려 그런 해주를 신경 쓰지 않았다.
“나 이거 무슨 글씨인지 알 것 같은데….”
해주의 작은 목소리와 동시에 보건실 문이 열리고 지혜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빠져나왔다. 아직 복도에 서 있는 셋과 눈이 마주치자 살짝 놀란 듯 멈칫하더니 이내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완전히 닫히지 않은 문 너머에서 들릴 듯 말 듯 한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싸웠나?”
“쓰러질 정도로 힘든데 얘기 안 했으니까 베프 입장에서는 서운할 만하지.”
하리가 슬쩍 해주를 쳐다봤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조금 부끄러워진 해주는 시선을 피했다. 문득 억울함이 고개를 내밀었다.
“하리 너도 힘든 얘기 잘 안 하잖아.”
먹잇감을 발견한 도희가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하리에게서 작은 한숨이 툭 새어 나왔다.
“그래. 얘기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