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 경장편 소설
하리의 능력은 그가 자랄수록 성장했다. 처음에는 흐릿한 형체만 보이다가 어느순간부터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고 점차 또렷해진 형상은 만질수도 있었다. 약한 영혼은 하리의 손끝이 살짝 닿는 것만으로도 빛이 되어 흩어졌다. 차가운 드라이아이스를 만지는 느낌이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라지는 영혼이 빛의 따뜻한 온기를 남길때마다 뭉클한 기분이 들었다.
“해이라는 사람을 봤는데….”
하리는 어느새 크림이 들어간 빵을 꺼내 먹고 있었다. 해주는 빵 대신 우유로 배를 채우고 자신이 본 장면을 되짚었다.
“나는 교복을 입고 있었고 해이는 낡은 개량 한복 같은 걸 입고 있었어. 둘이 되게 친한 사이 같았는데…. 해이가 이제 오지 말라고….”
그 뒤로는 단편적인 기억들이었다.
새 옷을 차려입고 단장을 한 해이, 미주를 막아서는 어른들, 화재, 그리고 남겨진 머리 장식, 원망. 하나씩 내뱉을수록 가슴 깊은 곳에 갇혀 있던 것들이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토하는 기분으로 한 마디 한 마디 내뱉는 해주의 손에 온기가 느껴졌다.
“얼마나 맺힌 게 많았을까.”
한참을 여운에 잠겨있던 두 사람은 진실을 찾기 위해 도서관으로 향했다. 조각난 과거의 퍼즐을 완성한다면 미주도 마음을 풀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폐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걸음을 재촉했다. 손을 꼭 잡고 하나둘 빠져나오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쳤다.
“아무래도 기사부터 봐야겠지?”
내가 이쪽. 너는 저쪽. 빠르게 이동한 하리가 익숙한 듯 컴퓨터를 켜 검색을 시작했다. 도서관이 낯선 해주는 조금 쭈뼛거리다 사서에게 다가갔다.
“저… 혹시 옛날에 이 동네에 있었던 사건 자료 같은 걸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친절한 사서는 과거 기사 보존 코너와 이용할 수 있는 검색창구, 참고하라며 고문헌들이 분류된 책장 번호까지 적어주었다. 황송한 대접에 얼굴이 빨개진 해주가 허둥지둥 책장 사이로 사라지는 모습을 힐끔거리던 하리가 숨죽여 웃었다. 영 어설프고 순수한 게 밉지 않았다. 이내 다시 신문에 집중한 하리의 시야에 짧은 기사가 들어왔다.
<미신에 사로잡힌 일가, 30년간의 잔혹사>
흐릿해서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분명히 그들이 갔던 저택이었다. 양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뻣뻣한 자세로 서 있는 사진이 나와 있었다. 페이지 인쇄 버튼을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나 해주를 찾았다. 해주는 노을 지는 창가에 살짝 기댄 채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다. 제목이 잘 보이지 않아 가까이 다가가니 저주, 무당, 굿 같은 단어들이 적혀있었다. 잠시 장난기가 올라온 하리가 후하고 해주의 귀에 바람을 불었다.
“흑!”
이목이 쏠릴 만큼 큰 소리가 나진 않았지만 해주의 손에서 책이 빠져나갔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날아간 책은 하리의 발등을 찍은 뒤 무사히 안착했다. 짜릿하게 몸을 타고 오르는 고통에 눈을 질끈 감고 애꿎은 해주를 붙잡았다.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리를 살핀 해주가 웃음을 꾹 참았다.
“그러게 누가 장난치래.”
옆구리를 쿡 찌르고 발이 괜찮은지 살핀 뒤 용건을 묻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하리가 해주를 데리고 자리로 향했다. 해주 역시 기사를 보자마자 폐가를 떠올렸다. 그리고는 자신이 읽던 책을 펴서 하리에게 내밀었다.
<한 가문에서 수명을 연장하거나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또는 부를 축적하기 위해 긴 세월 동안 사용한 저주. 제물이 될 대상은 신성한 공간에 가둬놓고 기른다. 바깥과 접촉하지 않게 주의한다.>
“해이도 바깥으로 못 나가는 것 같았어.”
“제물이었던 거야.”
둘은 같은 생각을 하며 짧게 눈을 마주쳤다. 이어지는 내용은 상상 이상으로 끔찍했다.
<의식을 치르는 날이 오면 제물을 깨끗하게 씻기고 상대의 옷을 입힌다. 자정이 될 때까지 주문을 외우게 한 다음 재만 남을 때까지 태운다. 그 재를 탄 물을 마시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
“진짜 역겹다.”
속이 메스꺼워져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노을이 저물고 어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도서관 식당에서 먹는 컵라면이 별미라는 하리를 따라 지하로 향했다. 편한 차림의 사람들이 각자 휴대폰이나 노트를 보며 김밥 등을 먹고 있었다. 다들 자기 삶에 충실해 보였다. 오랫동안 갇혀 있던 해주는 새삼스러운 기분을 느끼면서 하리가 내미는 참치김밥을 꼭꼭 씹었다. 평범한 김밥과 싸구려 컵라면이었지만 최근에 먹은 식사 중에 가장 맛있었다.
“친구랑 도서관 온 거 처음이야.”
초등학생 때야 천방지축으로 놀기 바빴으니 가본 도서관이라고는 학교 내 작은 도서관뿐이었다. 그마저도 중학생이 되고 나서는 민폐가 될까 봐 교실 구석에만 있느라 다른 장소에 가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남들은 이미 다 경험한 것들을 19살이 되어서야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싹 튼 것이다.
해주는 격하게 사양하는 하리를 붙잡아 근처 카페로 향했다. 딸기가 들어간 생크림 케이크와 햄치즈 샌드위치, 초콜릿 머핀까지 누가 보면 이제 저녁을 먹는다고 착각할 만큼 푸짐한 후식이었다.
두 사람은 빵빵해진 배를 붙잡고 수상한 주술에 대한 자료를 더 찾아봤으나 쓸 만한 내용은 없었다. 다음을 기약하며 피곤한 상태로 돌아온 해주는 씻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주말 하루가 더 남아 있어 다행이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진실을 알았으니 가위에 눌린다고 해도 이전만큼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 하리가 잘 들어갔는지 문자를 보내려고 휴대폰을 잡는 것보다 수마에 홀리는 속도가 더 빨랐다.
확실하게 다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꿈속 여자, 미주는 새빨간 눈물을 흘리며 바닥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는 화가 아니라 후회와 슬픔에 빠진 게 느껴졌다. 가위에서 깨려고만 해왔던 해주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저기요….”
어느새 해주의 손에 폐가에서 봤던 머리끈이 들려있었다. 미주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깨진 유리 장식을 바라봤다. 피에 젖어 축축한 얼굴이 서서히 가까워졌다.
해이는 나 때문에 죽었어.
“당신이 저주의 혜택을 받을 사람이었던 거죠?”
미주는 답이 없었다. 하리가 뭐라고 했더라. 영혼이 떠나지 못하게 붙잡고 있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서 대화한다고 했다.
“왜 그 집에 남아 있었는지 알려줄 수 있어요?”
피로 이루어진 웅덩이에 미주와 해주가 비쳤다. 미주가 내민 손을 잡자 낮에 봤던 저택이 나타났다.
까만 외관을 화마가 집어삼키는 중이었다. 미주는 무섭게 생긴 사람들에게 붙잡혀 울부짖었다. 해주는 집 안에 있을 것이 분명한 해이가 떠올라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투명한 벽 같은 것이 가로막았다. 멀리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미주야. 난 괜찮아.”
불길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창문가에 해이가 서 있었다. 울고 있는 걸까 웃고 있는 걸까. 아프고 무서울 텐데. 해주 역시 마음이 미어졌다.
“악!”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웅성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고 총알 같이 달려 나온 미주가 집 뒤편으로 사라졌다. 허둥지둥 쫓아가니 미주가 잠겨있는 정문 대신 각종 잡동사니로 막힌 후문 쪽 담을 뛰어넘고 있었다. 미주를 먼저 발견한 해이가 뒷문으로 내려왔다. 커다란 쇠사슬과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있어 문을 열 수는 없었다. 미주는 거침없이 돌을 들어 창문에 집어 던졌다. 해이가 다급하게 외쳤다.
“미주야! 위험해! 얼른 돌아가!”
사람들이 가까이 오자 주춤한 미주가 깨진 유리 조각을 잡았다. 해이와 해주가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가까이 오기만 해! 죽어버릴 거야! 전부 헛수고로 만들고 싶은 건 아니겠지?”
사나운 기세에 다들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불길은 점점 커지고 연기와 열기 때문에 버티는 데도 한계가 있을 것이었다. 목에 유리 조각을 겨눈 채 한 걸음씩 해이에게 가까워진 미주가 남은 한 손을 뻗었다. 머뭇거리는 해이가 답답했는지 창문 쪽으로 더 다가감과 동시에 자재가 무너지며 미주 위로 쏟아졌다.
해이가 미주의 등을 힘껏 밀쳤다. 흙먼지와 연기로 인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미주의 신음만이 들려왔다. 해이가 있는 힘을 다해 밀었음에도 미주의 오른 다리가 무거운 목재 아래 깔려있었다. 바람에 날린 불씨가 옮겨붙었고 모두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미주의 표정이 그제야 조금 홀가분해졌다.
장면이 바뀌었다. 미주는 망가진 저택 안에서 눈을 떴다.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곳에 있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었지만 누군가를 찾아야 한다는 강렬한 이끌림에 집안 이곳저곳을 헤맸다. 미주는 늘 그곳에 있었고 낯선 사람들이 온갖 짐을 챙겨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했다. 그들 중 누구도 미주를 알아채지 못했다. 미주가 주로 시간을 보내던 2층 복도 끝방 앞에 커다란 거울이 놓였고 그제야 사람들은 복도를 누비는 미주를 발견했다. 때로는 십자가로 때로는 목탁 소리와 불경으로, 때로는 화려한 무복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 미주를 쫓아내려고 했다. 미주는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시끄럽게 굴면서 괴롭히는 사람들이 싫었다. 모두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어느덧 분노만이 남아 본래의 모습을 잃은 미주는 악귀라고 불리게 되었다. 소문이 퍼진 덕분에 한동안은 고요했지만 도시의 발달은 미주에게 안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미주는 반짝이는 장식을 머리에 달고 온 작은 아이를 보았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무언가가 탐이 났던 적은 없었는데 미주는 자신도 모르게 아이의 머리카락을 잡았다. 부드러운 감촉과 손끝에 걸리는 장식이 가지고 싶었다. 힘을 주자 놀란 아이가 넘어지며 머리끈이 끊어졌고 동시에 미주는 아이와 연결이 되었다.
아아,여기에서 기다려야 하는데. 무엇을 그리워하는지도 몰랐지만 안식처에서 자신을 끌고 나온 아이가 미워 미주는 매일 해주를 괴롭혔다. 날 얼른 되돌려 놔. 괴롭지? 무섭지? 그러니까 다시 그 집으로 가. 아니면 너도 죽여버릴거야! 미주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해주는 말라가면서도 버티고 또 버텼다. 귀신을 오래 담고 있으면 영이 실리기 좋은 체질이 된다. 미주와 해주 모두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해주와 하리가 폐가에 들어가 머리끈을 발견하자 미주는 모든 기억을 되찾았다. 손을 떨면서도 자신에게 말을 거는 하리의 당찬 눈빛을 보며 해이를 떠올렸다. 스스로의 죄이자 삶. 모든 걸 끝내고 싶으면서도 함께 살고 싶었던 소중한 또 다른 나를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었는지. 아직 꺼지지 못한 불길이 속을 태웠다.
해주가 과거에 갇혀 있던 동안 미주는 해주를 내보내기 위해 겁을 주었으나 하리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
“도와줄게요. 제 친구를 돌려주세요.”
해주는 가야 할 곳으로 떠날 수 있게 한을 풀어준다는 약속을 했다. 해이와 만나게 될까? 아마 자신은 해이와 영겁의 거리로 떨어져 죗값을 치르게 되지 않을까. 미주는 오랜 시간 얽혀있던 아이를 바라봤다. 진실을 알게된 해주는 본인이 더 아픈 얼굴을 하고 대신 울어줄 것 같았다. 얼른 떠나볼게. 힘들게 해서 미안해. 말하지 못한 마음이 전해졌는지 해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