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 경장편 소설
가끔 하리가 만나는 영혼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무언가를 기다리거나 찾으면서 그 자리에 존재했다. 하리는 그들을 빛으로 보낼때마다 마무리 짓지 못한 과제를 제출하는 것처럼 답답함을 느꼈다. 이미 흩어진 이야기지만 조각이라도 기억해 줄 수 있다면. 죄책감이 클수록 허기도 커졌다.
“박주경! 너 진짜 그럴래?”
교실 문이 강하게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몇 초 후 머리카락이 세게 당겨지는 통증이 따라온다. 준비 없이 꺾인 목이 아프지만 티를 내면 더 세게 당기기 때문에 이를 물고 턱에 힘을 줘야 한다. 잔뜩 치켜 올라간 눈가에 짜증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차마 따라 할 수조차 없는 욕설과 그 뒤에 이어지는 비웃음, 차가운 무관심 속에 주경은 언제나 혼자였다.
무엇이 잘못된 선택이었을까. 홀수였던 그 애의 무리에 끼게 된 것? 어울리기 위해서 맞지 않는 꾸밈을 하고 과격한 일탈을 즐긴 것? 아니다. 태어난 것. 애초에 나라는 사람이 존재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고, 죽을 용기가 없어서 이렇게 폐만 끼치며 비루하게 버티고 있다는 게 주경이 하루 동안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이었다.
매일 밤에 눈을 감으면서 내일은 꼭 아침을 보지 않기를 기도하지만 결국 무거운 몸을 일으켜 교복을 챙겨입는 날들이 반복됐다.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고 적극적으로 맞설 수도 없는 매일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가끔 그들이 기분이 좋을때면 숨통이 트였지만 불량 학생으로 불리는 친구들의 기분이 좋은 날은 드물었다.
“반장. 담임이 불러.”
“이런 건 반장이 해야 하는 거 아냐?”
한계를 향해 달려가는 주경을 더욱 몰아붙이는 것은 같은 반 학생들의 눈빛이었다. 주경은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도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방법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몸소 깨닫고 있었다. 한심하게, 때로는 불쌍하게,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을 담아, 묘한 우월감을 담아, 자꾸 소란을 일으켜서 짜증이 난다는 그런 표정들 하나하나가 주경의 마음에 멍을 남겼다.
계속 늘어가는 상처는 교복 바깥으로 빠져나오기 시작했고 반장 역할을 위해 교무실을 자주 왕래하는 주경은 항상 긴장한 채 선생님들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피해 다녀야 했다.
“너 이거 왜 이래? 애들이 괴롭혀?”
당번은 따로 있었지만 자연스럽게 체육 수업 뒷정리를 하던 주경이 체육 담당 선생님에게 손목을 붙잡힌 적이 있었다.
“아. 넘어져서 다쳤어요. 괜찮아요.”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잔뜩 긴장한 몸짓을 유심히 살핀 선생님은 잡은 손에 힘을 풀고 한 걸음 물러났다.
“박주경. 너 당번도 아니잖아. 이거 왜 정리하고 있어? 솔직하게 얘기해 봐. 무슨 일 있는 거면 선생님이 도와줄게.”
다정한 말투였지만 주경에게 안정감을 주기에는 부족했다.
“괜찮아요. 정말요.”
입을 꾹 다물어버린 주경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선생님은 다시 한번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오라는 말과 함께 주경을 창고에서 내보냈다. 햇빛이 닿자 강하게 쥐고 있던 주먹에서 힘이 빠졌다.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잠시나마 갈등했던 자신이 한심했다. 절대로 말할 수 없어. 깊게 각인된 공포는 생각보다 크고 집요했다.
“반장은 마치고 따라와라.”
그날 종례 시간에 내려온 담임 선생님의 지시에 주경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체육이 얘기한 건가? 결국 다 알려진 거야? 어떻게 해야 하지? 아니라고 잡아떼는 게 맞나?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 거야? 핑핑 돌기 시작한 머릿속은 쿡 등을 찌르는 볼펜의 감촉 덕분에 순식간에 멈췄다. 돌아보지 않아도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주경은 다짐했다.
“그래. 수업은 들을만하고?”
묵묵히 앞장서서 교무실에 들어간 담임 선생님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질문을 던졌다. 주경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한 손으로는 살짝 올라가 있는 소매를 자연스럽게 내렸다.
“네.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래. 반 애들은 어때? 다들 사이는 좋아? 나는 못 보는 부분이 있을 테니까.”
담임 선생님의 시선이 팔목이나 다리, 얼굴 근방을 빠르게 훑었다. 소매를 미리 내리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다들 잘 지내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음…. 알았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언제든지 얘기하고.”
가봐. 무심한 한 마디에 주경은 서둘러 인사를 하고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체육 선생님이 담임 선생님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두운 표정이었다.
“좀 더 자세히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애 얼굴 좀 보세요. 절대 말 안 할 거라고 쓰여 있잖아요. 본인이 준비되면 얘기하겠죠.”
문이 닫히는 사이로 들리는 대화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한동안 체육만 피하면 아무 일 없을 거야. 대신 쓴 깜지를 넘겨주며 주경은 재차 다짐했다. 자신만 잘 참는다면 이것보다 큰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냥 별다른 이유 없이 따돌림을 당한 것 같아.”
“그정도의 따돌림에 이유가 있을리가. 있다고 해도 용납될 수 없지.”
방과 후 야자 시작 전, 셋은 구관 1층 구석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주가 기억을 더듬었고 하리는 주경의 미련이 무엇일지, 도희는 주경이 어떻게 생겼을지를 생각 중이었다. 각자 다른 생각을 하다 마땅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자 답답해진 도희가 손을 번쩍 들었다.
“도서관에 졸업앨범 있지 않아? 주경이라는 선배 언제 졸업생인지 찾아보고 쌤들한테 물어보자.”
“아…. 그러고 보니까 기억 속 체육 선생님, 지금 학생 주임이셔.”
“헐! 그럼 당장 가야지!”
“무턱대고 여쭤보기 좀 그런 문제잖아. 일단 그 영혼이 어떻게 죽었는지부터 알아야 해.”
하리의 말에 해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한 번 더 주경과 접촉하겠다고 말했다. 하리는 단호하게 해주를 말렸다.
“안 돼. 빙의 너무 자주 하는 거 안 좋아. 나 혼자 갔다 올게.”
하리는 두 사람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2층 화장실로 향했다. 문까지 잠가버린 하리 덕분에 덩그러니 남겨진 해주와 도희는 길을 잃은 강아지처럼 망연자실한 채 2층 화장실 앞에 서 있었다. 문에 찰싹 달라붙어 무슨 소리가 나는지 들으려고 시도하는 해주를 쳐다보던 도희가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확신에 찬 목소리에 홀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해주는 어느새 도서실 구석에서 앨범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네가 본 넥타이면 최소 10년은 넘었을 거야.”
곰곰이 생각하던 도희는 앨범 몇 권을 꺼냈다. 묵직한 앨범의 반을 건네고 작고 빠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 고하리가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끝내는 게 좋겠지?”
앨범을 넘기며 비슷비슷하게 생긴 학생들을 살펴보기 시작한 도희를 해주가 가로막았다.
“근데 주경 선배…. 졸업 전에 그렇게 된 거면?”
정곡을 찌르는 지적이었다. 시종일관 차분했던 도희의 표정이 깨졌다가 금새 돌아왔다. 실로 튼튼한 멘탈이었다.
“그럼 역시 선생님이네.”
“그렇지만….”
“내가 말할게. 너무 걱정하지 마.”
성큼성큼 앞서가는 도희는 별로 믿음이 가지 않았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동동거리며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문자에 답이 없는 하리도 걱정되고 직구를 던질 것 같은 도희도 불안했다. 이런 해주의 마음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도희는 이미 교무실 동태를 살피고 운동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멀리 창밖으로 운동부 학생들에게 무언가 설명하고 있는 체육 선생님이 보였다. 가벼운 운동복 차림의 선생님은 주경의 기억 속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생각보다 오래된 사건은 아니라는 뜻일까. 선생님이 기분 나빠하지 않으셨으면. 해주는 작은 희망을 품은 채 도희를 쫓았다.
“쌤! 저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도희 오랜만이네. 무슨 일이야?”
수업 시간에 예상한 것이지만 역시 도희는 체육 선생님과 관계가 좋은 듯했다. 해주의 희망이 조금 더 커지려는 찰나 도희는 시원하게 직구를 던졌다.
“박주경 선배라고 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