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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윤 Dec 25. 2023

[이방인의 일기 : 캘거리] #23

새벽부터 밤까지






여행의 셋째 날 새벽. 남자는 맞춰놓았던 3개의 알람들 중에서 마지막 시간에 겨우겨우 침대에서 일어나 카메라를 챙겨 차에 올라탔다. 잠깐의 예열을 마치고 나서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한 후에 텅 빈 도로를 30분 정도 홀로 달렸던 그는 명소 중 하나였던 작은 협곡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평일 새벽 이곳에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할 거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주차장에는 두어 대의 캠핑카가 나란히 잠들어 있었다. 



조금 쌀쌀했던 날씨에 가지고 나왔던 바람막이를 걸치고 보행로를 따라 걷기 시작한 그는 간단하게 어떤 위치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진을 찍으면 좋을 지에 대해 고민했다. 전날 이 장소보다 더 넓은 규모의 협곡을 이미 두 곳이나 갔다 왔었지만, 이 날 구상했던 아이디어는 그때와는 다른 느낌을 주고 싶어 조금 더 디테일적인 주의를 요했다.







햇빛이 조금씩 바위의 주름들을 비출 때부터 남자는 기억해 놓았던 위치에서 셔터를 눌렀다. 초점이 맞는지부터 시작해 프레임 안에 들어간 피사체들 간의 조화와 수직/수평 등, 한참이 걸려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계속 시도를 한 뒤에 다음 스폿으로 이동했다. 원래부터 컬러보다 흑백사진을 더 선호했던 사람이었지만 이 장소는 그 어느 곳보다 훨씬 더 모노톤과 잘 어우러졌다. 



전체적인 풍경보다는 조금 압축적이면서 지형들의 위치와 패턴들에 더욱 집중하고자 했던 이 날의 촬영은 대성공이었다. 그의 의도대로 모든 것들이 잘 맞아떨어졌던 덕분에 점점 더 쌓여갔던 피로감에 비례해 만족스러운 사진들이 여럿 카메라 안에 담겨 있었다. "사진은 고생해야 잘 나온다."라고 했던 한 지인의 말은 확실히 빈말이 아니었다는 것 또한 몸소 체감할 수 있었던 그런 시간이었다. 



6시 30분 정도가 되어 다시 숙소로 돌아온 남자는 새로이 알람을 맞추고 눈을 붙였다. 이 날은 캘거리에서 이곳만큼의 거리를 운전해야 갈 수 있는 국립공원이 리스트에 남아있는 유일한 목적지였고, 굳이 이른 시간부터 출발을 할 필요가 없었던 그는 잠깐의 여유를 틈타 며칠간 쌓였던 피로를 약간이나마 털어내려 했다.







간단히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하고 나서 기름을 가득 채우고 2시간 정도를 운전하다 보니 인포메이션 센터로 안내하는 표지판이 보였다. 내리막길 경사가 꽤나 가파르게 그려져 있어서 핸들을 잡고 있던 양손에는 약간의 땀이 맺혔다. 차량을 주차하고 앞에 있던 건물로 들어간 그는 데스크 앞에 있던 직원에게 입장료 2달러를 지불한 뒤에 간단한 설명과 작은 지도를 넘겨받았다. 



그는 공원의 모든 구역들을 도보로 움직여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알고 보니 차량으로 통행할 수 있는 비포장도로가 나 있었고 중간중간마다 멈춰 보행로를 따라 주변을 구경할 수 있도록 구성이 되어 있었다. 3일 중 가장 더웠던 날이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 그는 그 잠깐의 몇 분 동안 데워진 차를 끌고 광대한 자연 속으로 들어섰다. 







종아리 주변 피부 곳곳은 약간의 화상을 입었던 탓에 매우 따끔거렸고, 이제 좀 찍어볼까 하고 가방 안에서 꺼냈던 카메라 또한 제대로 달궈져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다 돌기도 전에 퍼지겠다는 생각에 그는 대미지를 최소화하기 위해 햇빛을 바라본 채로 뒤로 걷거나, 혹은 차량의 에어컨으로 카메라를 냉각시키는 등의 온갖 수를 동원해 가며 공원을 둘러봐야만 했다. 



곳곳에서 화석이 발견되었던 위치마다 전시관이 세워져 있어서 그 그늘로 잠시 몸을 피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완주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전체 면적은 상당히 넓어 보였지만 걸어서 구경할 수 있는 각 코스들은 그렇게 규모가 있는 편이 아니었고, 그로 인해 그의 생각보다 조금은 더 일찍 센터 앞으로 되돌아왔다. 주인 잘못 만나 고생하고 있는 렌터카도 조금 쉬어야 한다는 것을 핑계 삼아 나무그늘 밑에 주차를 해 놓고 벤치에 앉아 먹었던 소프트 아이스크림은 그렇게 달달할 수가 없었다.







남자는 저녁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 숙소가 있던 지역으로 다시 돌아왔다. 원래 같았으면 훨씬 더 강한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을 테지만, 다음 날 비 소식이 있어서 그랬는지 수더분한 구름과 함께 이전과는 조금 약한 정도로 거대한 물탱크와 건물들을 비추고 있었다. 무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마지막 날을 장식하기 위해 카메라와 함께 다시 거리를 걷기 시작한 그. 도대체 어디서 체력이 나왔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이지만, 아마도 다시는 오지 못할 이 지역에 조금의 아쉬움도 남기고 싶지 않았던 게 그를 끝까지 움직이게 만들었던 것으로 추측해 볼 뿐이었다.







사실 그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붙혔던 또 다른 이유는 한 극장 때문이기도 했다. 유일하게 거리에서 네온사인 간판을 가지고 있던 이곳을 담아내고 싶어 전날 저녁에도 이곳에 왔지만 너무 늦었던 탓에 불은 모두 꺼져있었고, 그로 인해 이 날은 전보다 더 이른 시간부터 대기를 했던 것이었다. 날이 완전히 어둑해지지 않았던 시간부터 간판 앞에 머물면서 사진을 찍고 있던 중에 극장의 주인으로 보였던 한 여자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제지를 당할 것 같다는 생각에 조금 긴장을 했지만, 오히려 반대로 그녀는 자신의 명함을 내밀며 작업물을 쓰여 있던 이메일로 보내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에 덧붙여서 그녀는 아직 관객들이 관람을 하고 있으니 필요하다면 원하는 시간만큼 더 불을 켜 두겠다고 했다. 지칠 대로 지쳐서 더욱 어눌했던 그의 영어로 최대한의 감사함을 담았던 그의 대답 이후에 혹시라도 더 필요한 게 있다면 들어와서 얘기를 하라는 말을 남긴 뒤 주인은 다시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36번째 컷이 찍힌 필름사진을 마지막으로 그는 자리에서 벗어나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첫날 방문했었던 햄버거 가게로 향했다. 2번째 만남이었지만 특이한 모양새 때문이었는지 직원은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생수와 함께 먹었을 햄버거와 어니언링이었지만, 그는 오늘만큼은 고생한 본인에게 작은 선물을 주고자 시원한 얼음이 담긴 콜라를 같이 주문했다. 근 7년 만에 마셨던 탄산음료의 맛은 예전에 군대 훈련소에서 먹었던 것과 동일한, 혹은 그 이상의 청량감을 그에게 전달해 주었다. 다음 날 캘거리까지 돌아가야 하는 일정과 함께 차량을 반납할 때까지 완전히 놓을 수 없었던 긴장의 끈이었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여행이 모두 끝난 것 마냥 축 늘어져 있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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