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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윤 Dec 25. 2023

[이방인의 일기 : 캘거리] #34

여름의 끝에서





8월 초 구름을 잔뜩 머금고 있던 날, 남자는 현상된 필름을 픽업하기 위해 다운타운 옆 작은 동네로 향했다.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있던 차에 이제는 식상하게 비추어졌던 도로 양 옆 건물들 사이를 서성거리던 중, 그는 사거리 횡단보도 신호 옆에 온갖 홍보물들이 덕지덕지 붙여져 있던 자그마한 게시판에서 눈에 띄는 포스터 한 장을 발견했다. 알록달록한 색깔들과 함께 큼지막한 서체로 꾸며져 있던 포스터에는 8월 마지막 주 주말에 비치발리볼 대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고, 그는 마침 비어있던 스케줄에 잘 됐다는 생각과 더불어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던 캘거리의 여름시즌을 이 페스티벌과 함께 마무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바람에 연락처를 스마트폰에 저장하고서 길을 건넜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sns 계정을 통해 메시지를 보냈다. 자신이 이런 사람이고, 현재 캘거리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데 혹시 행사 촬영을 도울 수 있는지에 관한 내용들과 더불어 이전에 찍었던 EDM 페스티벌 사진들을 몇 장 첨부했다.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원활히 소통이 이루어져 마케팅 담당자이자 행사 매니저였던 한 친구와 며칠에 걸쳐 이메일을 주고받았고, 행사 당일에 대회장에서 보자는 말을 끝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일이 잘 풀리면 나중에 큰 사고가 터지는 것이 정설처럼 여겨졌지만 이곳에서는 일단 지르고 보는 게 고득점의 원인 중 하나였어서 그는 이번에도 이전의 사례들과 같은 전략을 취했다. 







약속했던 시간에 맞추어 여러 개의 네트가 걸쳐진 모래밭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매니저를 찾았다. 떠나면서 메시지를 보냈지만 정신이 없었는지 읽지 않음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다짜고짜 가장 중앙에 보이는 텐트 쪽으로 다가갔다. 벤치에 앉아 동그란 안경을 쓴 채로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둘은 "여태 말로만 들었던 사람이 바로 너였구나!"라는 감정이 표정으로 드러나면서 인사를 나눴다. 




"그냥 쭉 돌아다니면서 사람들 위주로 찍으면 될까? 특별히 필요한 컷이 있으면 나한테 넘겨줘."



"아 맞아! 어젯밤에 정리한 리스트가 있는데 이것들은 스폰서십과 관련된 거여서 필수적으로 찍어주었으면 좋겠어. 나머지는 네 재량에 맡길게."



"알았어. 근데 오늘 영상 찍는 사람도 온다고 하지 않았어? 아직 도착을 안 한 건가?"



"오늘 아침에 갑자기 펑크가 났어. 그 친구도 페이를 받지 않는 거였지만 솔직히 섭섭하기는 하지. 사실 여기서는 조금 흔한 일이기도 해." 



"(이 말을 듣자마자 오늘은 정말 뭔 일 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이고... 아침부터 정신없었겠네. 일단 나라도 최대한 건져볼게. 날씨라도 도와줘서 다행이다." 



"너무 부담 갖지 마! 사진도 사진이지만 무엇보다도 네가 이 페스티벌을 최대한 즐기고 갔으면 좋겠어. 그게 우리 모토거든! 분위기가 1순위야!" 







매니저가 자리를 떠난 뒤에 다시 한번 리스트를 훑어보고서 카메라 전원을 킨 남자는 우선적으로 코트 외곽에 위치한 스폰서 이미지 촬영을 시작했다. 아무리 작은 행사라고 해도 매 해마다 대회를 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했던 게 바로 이 스폰서십인 만큼, 그들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홍보해 주어야 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목표 금액을 달성하지 못해 규모를 절반 이하로 줄이거나, 혹은 아예 행사 자체를 철회하는 일이 올해 들어 잦았다는 포토그래퍼 친구들의 이야기를 거진 매 달마다 듣다 보니 그에 대한 체감은 훨씬 더 크게 다가왔다. 



선물로 받은 버킷햇이 남자가 이 행사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을 잘 나타내어준 덕분에 참가자들 틈 사이를 파고들어 말을 걸기에는 이전보다 훨씬 수월했다. 설령 아이템이 없었다 할지라도 이제는 이런 모습들에 적응이 되어서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데 그렇게까지 큰 어려움에 부딪히지는 않았겠지만, 플러스 요인이 되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때보다는 조금 더 형식적인 느낌이 많이 드는 사진들이 sd카드에 담겼음에도 평소와 다르게 그가 자기 자신을 덜 쥐어짜게 된 데에는 아까 담당자가 언급했던 이 장소의 분위기가 크게 한 몫 거들었을 것이다. '사진 찍는 사람'이 아니라 카메라를 손에 쥐고 같이 어울리는 친구로서 사람들과 같이 코트 주변에 머물다 보니 어느덧 결승전 한 경기만이 남아있었고, 얼마 안 가 매니저와 함께 40대 중반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그에게 다가왔다.




"오늘 도와줘서 고마워. 혹시 이따가 대회 끝나고 우리 업장에서 애프터 파티하는데 그때도 올 수 있니?" 



"아~ 이미 알고 있었어요. 시간 맞춰서 갈게요. 전에 몇 번 가봤었는데 거기서도 촬영하면 잘 나올 것 같더라고요." 



"매니저는 일정이 있어 같이 자리를 못 하니까 바에 도착하면 나에게 귀띔 한 번만 해 줘. 혹시라도 중간에 마시고 싶은 술이 있다면 직원들에게 내 이름 대고 실컷 마셔. 미리 따로 얘기해 놓을게." 







 조금 일찍 행사장을 빠져나와 다시 집으로 돌아온 그는 간단히 저녁을 챙겨 먹고 9시가 다 되어서 북적거리는 한 술집에 도착했다. 본격적인 파티는 9시 30분부터였지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클럽 음악에 들썩거리는 손님들을 보아하니 이미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났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세팅이 다 끝나지 않아 비어있던 작은 소파에 기대앉아 쉬고 있던 남자에게 되게 낯익은 친구가 맥주 한 캔을 건네며 다가왔다. 분명 어디서 봤는데...라고 머리를 굴리던 찰나에 머리에 얹혀 있던 빵모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 경기장에서 만났던 친구였다.




"아까 우리 사진 찍어준 애 맞지? 여기서 다시 보니 반갑네. 이거 내가 산 거니까 한잔 해." 



"아니 또 뭘 이런 걸... 심심하던 찰나에 놀고 싶어서 간 거였어. 어쨌든 이건 잘 마실게. 다른 팀원들은?" 



"아마 안 올 것 같아. 나처럼 이런 자리를 즐기는 애들이 아니어서 말이지. 사진은 언제쯤 포스팅될 것 같아?" 



"아마 금요일 까지는 올라가지 않을까? 보정할 사진이 200개 좀 넘을 듯 해." 



"와.. 어마어마하구먼. 고생 많았다 야. 이따가 만나면 또 얘기하자고. 난 조금 더 기웃거려 봐야겠다." 







맥주가 거의 바닥을 드러내면서 그의 얼굴에 약간의 취기가 올라오기 시작할 때 즈음부터 한 직원이 마이크를 잡고 대회 상금 수상을 하기 시작했다. 다시 엉덩이를 떼고 카메라를 꺼내든 남자는 1시간 정도 왔다 갔다 하며 이 날의 마지막 장면들을 마저 기록했다. 대부분 모래밭에서 봤던 사람들이어서 그의 렌즈가 가까이 다가와도 크게 개의치 않은 채로 포즈를 취했고, 사람들이 슬슬 자리를 떠나는 기미가 보이면서부터 그도 덩달아 짐을 챙겨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귀신같이 울리는 메시지 알람 진동이 허리춤에서 느껴졌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이건 분명 매니저한테서 온 거라는 것을 알았던 그는 화면을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잘 마무리했어??" 



"일일이 다 확인은 못해봤는데 몇 컷 정도는 쓸만한 게 있을 것 같아. 내가 다 정리해서 금요일 전까지 보내줄게." 



"정말 고마워! 사실 이전에 몇몇 포토그래퍼들을 돈 주고 섭외한 적이 있었는데, 너무 멀리 떨어져서 게임하는 장면들만 찍었던 게 아쉬웠었거든. 그런데 너 오늘 찍는 거 보니까 그때보다는 나은 결과물이 나올 것 같아서 마음이 조금 놓였어." 



"난 그냥 아마추어니까 너무 기대하지는 마 하하. 네가 그런 모습을 캐치해 냈다는 게 난 오히려 놀랍다. 덕분에 좋은 경험 했어. 나중에 또 이벤트가 있으면 그때 연락 줘."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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