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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윤 Dec 25. 2023

[이방인의 일기 : 캘거리] #31

남쪽으로 가자!






"남쪽에도 볼거리가 있어. 다른 사람이면 모르겠는데 너한테는 추천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 말하는 거야."




스탬피드가 막을 내리고 거의 한 달이 다 되었지만 도시는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남자의 걱정거리 중 하나였던 '도시의 노잼화'는 예상을 크게 벗어나 그를 계속 거리로 나오게 만들었고, 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그렇게 점점 9월에 가까워지면서 약간의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즈음, 그는 만날 때마다 자신의 경험을 공유해 주었던 한 친구의 말에 아이디어를 얻어 2번째 여행을 계획했다.



떠나기 이틀 전 남자의 2박 3일 스케줄을 본 친구들은 경악했다. "너무 빠듯하다" "혼자서 운전하면서 모든 곳을 가기에는 체력적으로 무리다" 등, 의문보다 걱정이 더 많이 섞인 말로 그의 일정에 손을 대려 했다. 그들의 반응에 약간 겁이 나기도 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정 안되면 당일에 조정을 할 거라고 남자는 웃어넘겼다. 늘 이런 시선과 우려에 "Now or Never"라는 문구를 함께 내뱉으면서. 







첫 번째 여행 때와 마찬가지로 날씨는 매우 맑았다. 차에 올라타기도 전에 챙겨 온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40여 분을 달려 도착한 첫 번째 마을. 그가 첫날 계획했던 다른 동네들에 비해서는 비교적 규모가 크고 생활 시설들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확실히 캘거리와는 다르게 평일 점심시간 때 중심 거리에 차를 주차하고 발을 땅에 디뎠음에도 한적함이 물씬 풍겼다. 은퇴한 어르신들이 살기 좋은 동네의 느낌이라고 한다면 적절한 표현이지 않을까? 



마을 자체의 역사가 꽤나 깊었는지 몇몇 건물들은 1920년대 때부터 시작해 지금까지도 운영이 되고 있었고, 주민들은 이런 역사에 꽤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간판이 낡아 부분적으로 손상이 되고 페인트가 벗겨져 있던 한 극장 앞을 거닐고 있을 때 점심식사를 위해 외출을 하신 할머니 두 분께서 10분 동안이나 남자에게 이곳의 옛이야기를 들려주셨던 것을 생각하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조금 더 대화가 길어졌으면 속으로 발을 동동 굴렸겠지만 다행히도 적당한 타이밍에 끊긴 덕에 그가 계획한 시간 내에 다른 장소로 넘어갈 수 있었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덜 걸렸지만 원하는 지점을 찾지 못하고 한동안 길을 헤매는 바람에 결론적으로는 늦게 도착하게 된 2번째 장소. 여기를 마을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 건지 한참 동안이나 의구심이 들었을 만큼 주택 몇 채와 허름한 주유소 하나가 전부였다. 그럼에도 이곳은 가 첫째 날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로 뽑은 곳이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버려져 있던 오래된 곡물창고들이 형태를 잘 유지한 채로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앨버타 주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이었지만 이것 외에도 주변에 같이 놓여 있던 열차 칸들과 버려진 자재들이 여러 스팟들과는 조금은 다른 차이를 만들어 냈다. 



생각보다 사람 손이 이곳저곳에 묻어 있었던 게 아쉬웠지만 첫 번째 솔로트립 때와는 다른 모습들이 눈앞에 보인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애초에 구상했던 대로 '캘거리에서의 1년 기록'이라는 플랜 A는 이미 저 멀리 사라지고 그 활동반경이 훨씬 더 넓어졌지만, 긍정적인 방향으로서의 변경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무리 봐도 그는 '장인'의 성격과는 거리가 먼 사람임이 분명했다. 조금 지루하다 싶으면 바로 새로운 것에 눈을 들이는 걸 보면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남자는 다시 차를 몰아 마을 입구 쪽으로 나와 그 주변들 또한 마저 찍고서 떠나고자 했다.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꾸며놓은 버려진 자동차와, 이곳에 하나뿐이었던 주유소가 기록으로 남기기에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덩굴이 휘감긴 갈색 올드카 주변에서 셔터를 누르고 있었는데 멀리서 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본능적으로 느껴졌지만, 일단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그녀의 제스처에 손을 흔들어 반응했다. 




"안녕. 혹시 어디서 왔니?"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온 여행자인데, 잠시 이곳에 들러 사진을 찍고 떠나려고 했어요." 



"그렇구나. 하지만 여기는 사유지여서 함부로 들어와서 촬영을 하면 안 되는 곳이야." 



"아.. 죄송합니다. 푯말을 못 봤어요. 사진도 지워야겠네요." 



"우린 그렇게 강직한 사람들이 아니란다. 다만 네가 모르는 것 같아 알려주려고 온 거야. 이 차가 이목을 끌긴 하지. 하지만 다른 장소에 갔을 때는 정말 조심해야 해. 농부들은 생각보다 말이 잘 안 통하는 사람들이거든." 




잠시 뒤 그녀의 남편으로 보이는 사람 또한 그들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이 나라에 대해서 계속 공부 중인데 아직도 실수가 많네요." 



"그럴 수 있지. 이다음에는 어디로 가니?" 



"아직 서너 개 마을 정도가 더 남았는데, 남쪽으로 쭉 내려가면서 차례대로 들를 것 같아요.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저 주유소도 찍고 떠나려 했어요." 



"주인이 괜찮다고 하면 문제 될 일은 아니야. 그리고 저 주유소 사장 가족은 중국에서 왔는데, 영어를 잘 못하니까 그냥 우리 이름을 대고 허락을 구하면 찍게 해 줄 거야.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고."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 지은 뒤에 남자는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주유소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말마따나 카운터에는 중년의 아시아인과 그의 아들로 보이는 어린 친구가 있었다. 인사 없이 멀뚱히 그를 쳐다보고 있던 사이에 냉장고에서 음료 한 병을 꺼내 계산대 앞에 내려놓고 촬영에 대한 허가를 구하기 시작했다. 영어 구사가 완만히 안 되어 남자아이는 "Yes"와 "Receipt"라는 단어만을 반복적으로 꺼내었고, 그런 남자 또한 그들에게 "Photo, little"이라는 단어들과 그의 손에 있던 카메라를 계속해서 가리키면서 상황을 해결하려 노력했다. 눈치껏 이해했는지 자신의 아버지를 한번 쓱 쳐다본 뒤에 고개를 끄덕인 소년을 보고 그는 Thank You를 마지막으로 가게를 나왔다. 




그가 이렇게까지 이곳을 기록하고 싶어 했던 이유는 여행 첫날의 주제에 들어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한 번쯤 상상하며 떠올렸거나, 혹은 영화에서 보았던 아메리카 대륙의 이미지를 사진으로 남기는 것.'을 바탕으로 그려 나가기 시작한 이번 여정. 스케줄의 3분의 1 정도가 완료된 시점에 아직도 갈 길이 멀었던 그는 다시 차에 시동을 걸었다. 날씨는 전날 보았던 예보와는 다르게 햇빛을 약간 가리는 정도의 구름을 끼고 있었고, 그는 평소에 자주 듣던 음악의 볼륨을 크게 키우고 끝없이 나 있는 아스팔트 위를 달려 나갔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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