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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윤 Dec 25. 2023

[이방인의 일기 : 캘거리] #32

할리우드 키드





점심을 먹기 위해 차를 세우는 것조차 사치로 느껴졌던 탓에 그는 전날 사놓았던 에너지바와 생수를 간간이 들이키면서 계속 차를 몰았다. 마치 격투가가 도장을 접수하러 가듯이 내비게이션에 지정되어 있던 포인트들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기분이 왠지 모르게 통쾌하게 느껴졌다. 어느덧 3분의 2 정도 지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려주듯이 그의 눈앞에 희미하게 비행접시처럼 보이는 물탱크가 보이기 시작했다. 촉박한 스케줄에 크게 관심 없는 곳을 굳이 리스트에 넣었어야 하나 싶었지만, 어차피 같은 루트로 이어져 있던 곳이었고 무엇보다도 수많은 친구들이 입에 닳을 정도로 이야기를 했기에 그 입김에 못 이겨 텅 빈 인포메이션 센터에 그는 차를 세웠다. 







평소에 영화도 잘 안 보는 편인 데다가 SF 장르라면 학을 뗄 정도로 자신의 관심사의 정 반대에 놓여있었음에도 '스타 트렉'이라는 타이틀은 어렸을 때부터 머릿속에 가지고 있던 그였다. 거기서 나오는 외계 종족과 이름이 같아서 이와 관련된 콘텐츠들로 이미지를 구축한 동네였는데, 온통 관련된 포스터와 벽화들로 꾸며져 있어서 이 시리즈를 좋아하는 팬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장소인 듯 보였다. 



하지만 그와 같이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좀 특이한 동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조바심 때문에 더욱 그렇게 다가왔던 걸 수도 있지만 15분도 안 되어서 그는 정말 말 그대로 '발만 담갔다가 나온' 느낌으로 이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고서는 곧바로 다시 차에 올라탔다. 차량이 햇빛을 뒤집어쓰고 있었음에도 안쪽에는 에어컨의 냉기가 남아있었을 만큼 짧은 멈춤이었다.  







계획대로 잘 움직였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결국 오후 7시가 되어서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남아있던 장소는 총 세 곳. 서쪽의 마을은 아까 만났던 부부가 추천하지 않았고, 하이킹을 해야 했으므로 진작에 패스. 동쪽에 있던 곳 또한 알맞은 시간에 도착할 자신이 없어 남자는 남쪽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동네를 마지막 포인트로 첫날의 일정을 마무리 짓기로 했다. 



지리적인 요소 때문이었는지 1 킬로미터도 채 되지 않는 긴 거리 양쪽으로는 식당들과 모텔, 그리고 차량을 정비할 수 있는 공간들이 놓여 있었다. 여기도 세월의 흐름을 직격탄으로 맞은 듯 곳곳에 버려진 건물들이 방치된 채로 있었는데, 그가 이곳을 와야겠다고 생각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1920년 대 때부터 운영되어 온 오래된 극장 때문이었다.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찾았는데 보자마자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는 꼭 가야 해!"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리뷰와 사진들이 3년 전에 쓰여 있던 게 마음에 걸렸지만 다행히도 극장은 그가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불을 밝히고 있었다. 







이곳이 사진 맛집이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 말고도 웨딩스냅 촬영을 위해 극장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던 한 무리가 있었고, 그들이 촬영을 마무리하고 자리를 떠난 후에도 남자는 남아서 2대의 카메라로 하늘의 색이 바뀔 때마다 같은 모습을 프레임에 담았다. 한 차례 손님들이 들어서고 나서 잠시 바람을 쐬려 밖으로 나온 주인과 눈이 마주친 김에 그는 인사를 주고받았다. 




"안녕하세요. 극장이 꽤나 근사한데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여기가 앨버타 주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란다.


"정말요?? 그건 미처 몰랐네요. 저는 한국에서 온 사람인데, 이 장소를 찍기 위해서 오늘 캘거리에서 달려왔어요." 


"한국?! 너 혼자서 왔어???" 


"네. 친구들도 이 장소를 모르더라고요. 검색해서 무작정 온 거예요." 


"믿을 수가 없네. 이 작은 마을까지 오다니. 내 기억이 맞다면 이곳에서 처음 만난 한국인이 바로 너 일거야.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구나." 


"기록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어요. 다행히도 잘 온 것 같네요." 




이야기를 마치고 그녀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안 가 관객들이 관람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에 그 또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순간 주인이 다시 나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우리 지금 영업 끝났는데, 혹시 관심 있으면 안쪽도 둘러볼래?" 







이게 웬 횡재냐 싶어 그는 곧바로 카메라를 챙겨 극장 안으로 함께 들어갔다. 구석구석 나이 든 물건들과 1,2 층으로 나뉘어 있던 상영관 하나를 그녀는 소개해주며 손가락을 천장으로 가리켰다. 꽃 모양 사인이 트레이드 마크니까 놓치지 말고 찍고 가라는 말 또한 덧붙였다. 마무리 정리를 하고 있던 직원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는 최대한 빠르게 사진을 찍고 모두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특별한 사진들을 찍을 수 있었어요." 


"천만에. 근데 너 정말 운이 좋은 것 같다. 우리 내년부터 여기 리모델링 들어가거든."


"이런 이유 때문에 계속 사진을 찍는 것 같아요. 영원한 건 없으니까요. 항상 건강하시고요."


"그래. 남은 캐나다 생활 잘하고 조심히 돌아가. 네 sns 계정은 시간 날 때마다 찾아볼게." 







다시 밖으로 나온 그의 앞에는 여러 개의 네온사인들 만이 켜진 상태로 쥐 죽은 듯 잠에 든 거리가 눈에 비췄다. 어차피 이미 늦을 대로 늦어서 한 시간 덜 자는 게 대수는 아니라고 생각한 남자는 진공관을 타고 웅웅 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던 간판들 마저 모두 데이터로 저장한 뒤에 11시가 조금 넘어 다시 차에 올라탔다. 설령 내비게이션에 나와있는 예상 시간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씻고 정리를 마친 뒤 불을 끄면 4시간도 못 잘게 뻔했지만, 그는 이 날 본인이 생각했던 것 이상의 수확 덕분에 다음날에 대한 걱정보다는 지금 당장의 만족감에 한껏 취해 있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았던 장면들로부터 생긴 로망에 집착하듯 쫓은 불빛. 동 떨어진 것처럼 홀로 빛나지 않고 밤하늘과 섞인 채 자연스럽게 주홍빛 색을 띠고 있던 네온사인들을 보고 있으면 어떤 특별한 감정마저 불러일으켜지는 듯했다. 그가 미국으로 갔다면 수없이 다양한 사인들을 볼 수 있었겠지만, 캐나다 앨버타 주에서 겨우겨우 찾아냈기에 그 소중함이 더욱 배가 되어 각인되었던 게 아니었을까?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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