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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윤 Dec 25. 2023

[이방인의 일기 : 캘거리] #33

980 km





새벽 5시 반에 울린 알람소리에 맞추어 곧바로 몸을 일으킨 남자는 간단히 물로 얼굴을 적시고 옷을 갈아입었다. 누워있었던 4시간 여의 시간 중 수면에 빠져 든 건 고작 2시간이 채 안 됐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뇌가 전날의 연장선이라고 오해를 하게끔 만들어 생각보다 피로감이 덜 느껴졌다. 새벽 시간에 잠깐동안 쌓인 냉기와 여름철의 온기가 섞인 차에 올라탄 그는 시동을 걸어 잠시 예열을 한 뒤에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설정하고서 여행의 두 번째 날을 시작했다. 



캘거리에서 남쪽에 위치해 있던 마을들을 둘러보았던 전날에 이어서 이 날은 조금 다른 방향인 서쪽으로 나있는 도로를 따라 국립공원을 둘러보고자 했다. 이전에 친구들과 함께 몇 번 드나들었던 곳이었지만 그때보다 훨씬 더 깊고 먼 곳까지 가 볼 계획을 세웠던 남자였기에 서서히 푸르스름 해져가는 하늘을 마주하며 부지런히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공원 초입에 들어설 때까지만 하더라도 구름 속에서 햇빛이 스멀스멀 밖으로 나오려던 것을 볼 수 있었지만, 채 10분이 되지 않아 다시 몸을 숨기고 나서는 한두 개씩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았던 기세는 점점 강해졌고, 결국 그가 첫 번째 목적지로 지정했던 강가 앞에 도착했을 때는 카메라를 들고 밖에 나가 사진을 찍기 힘들 정도로 거세게 쏟아졌다. 금방 그칠 것 같지도 않았고 어차피 이런 상황이라면 주변 다른 스팟들에서도 답이 없어 보였던 차에 남자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계획을 바꿔야만 했다.




"가장 먼 곳까지 멈추지 말고 달리자. 운이 따라준다면 되돌아 나올 때 잠잠해지겠지." 




약 300 킬로미터를 쉼 없이 달려도 오전 11시 30분 즈음에 도착할 거라는 내비게이션 화면이 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지만, 이번이 아니면 한국에 돌아가기 전까지 가 볼 기회가 없을 게 분명했다. 당위성을 만족시켰으니 이제 남은 프로세스는 실행에 옮기는 것뿐이었다.







통행소에서 직원에게 출입패스를 보여주고 난 뒤 곧바로 한 표지판이 그의 눈에 띄었다. 



"앞으로 230 킬로미터 동안 통신 제한" 



혹시나 차에 문제가 생겨 고립이 되면 어쩌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찾아왔지만, 그렇다고 이미 입장을 했는데 다시 돌아 나가는 것도 웃긴 모양새라 제한된 속도에 맞추어 1차선 도로를 달리며 1시간에 한번 꼴로 비가 많이 오지 않는 위치에서 잠시 주차를 한 뒤에 눈앞에 보이는 풍경들을 담았다. 뷰파인더 속 한정된 공간으로 경치를 바라봤음에도 자동으로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여기는 '급'이 다르구나.라고.  



사람들이 흔히 휴양림 안에 들어갔을 때 느끼는 모종의 기운보다 몇십 배는 더, 체감한 그대로 얘기를 해 보자면 산림의 기운이 몸 전체를 아예 감싸 안은 것 같은 정도로 여태껏 살면서 겪어왔던 공기의 질감과는 매우 다르게 다가왔다. 계속해서 수많은 포인트들과 하이킹 코스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아쉬운 마음을 애써 누르면서 나아갔다. 나쁘지만은 않았던 수였다. 반대편 차선 쪽이 조망하는 데 훨씬 더 나은 장소들을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예상시간과 큰 차이 없이 마을에 도착한 남자는 비에 옷을 적셔가며 눈앞에 보이는 식당들을 탐색했다. 추위와 피곤함, 거기에 배고픔까지 더해지니 사람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많은 간판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비교적 한적하고 요 근래 잘 먹지 않았던 인도 요리 전문점에 들어가 식사를 하고서 다시 밖으로 나왔지만 여전히 빗방울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구경을 안 하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바람막이에 달려있던 모자를 뒤집어쓴 채로 그는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시즌이 한창이어서 평일임에도 많은 관광객들이 그와 비슷한 옷차림으로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규모가 너무나 작아서 이곳에서 1년의 생활을 시작할까도 고민했었던 작년의 본인에게 화를 내고 싶을 지경이었다. 자연과 완전히 친해지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해 보였다.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하는 관광버스를 목격하고 나서 더 늦기 전에 본인도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남자는 주유소에서 기름을 한가득 채우고 몇 시간 전보다는 조금 더 익숙해진 풍경 속으로 다시금 들어섰다. 







빗줄기는 그가 마을에서부터 점점 멀어지면서 잦아들기 시작했다. 해가 온전히 뜨지는 않았지만 카메라를 아무 걱정 없이 차량 밖으로 꺼내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커다란 빙하로 뒤덮인 정상으로부터 이어지는 기다란 강줄기,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들, 그리고 구름 모자를 쓴 산봉우리까지. 200킬로미터의 거리 안에서 가능한 한 최대한 다양한 사진들을 찍고 다시 통행소를 빠져나오니 시간은 어느새 오후 6시를 지나고 있었다. 







곧바로 그는 관광객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 중 하나로 손꼽히는 호수로 향했다. 사실 이전에 몇 번이나 호스트와 이곳을 올 기회가 있었지만 이상하게 계속 스케줄이 꼬이는 바람에 결국 홀로 발을 디뎠다. 저녁 시간이 코앞이어서 들어가는 차량들보다 밖으로 빠져나가는 행렬이 더 길었고, 그 덕분에 악명 높았던 주차대란 없이 수월하게 차를 대고 에메랄드 색 물가를 그는 맞이했다.



여전히 인산인해를 이루긴 했지만 남자는 "내가 드디어 이곳에 왔다!"라는 생각 하나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아마도 별다른 문제없이 여행의 대부분을 마무리 지었던 시점이라 더욱 그 기분이 배가 되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보행로를 따라 걸으면서 마지막 3컷의 필름 슬라이드를 마저 채워 넣고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남은 거리가 100km가 조금 넘게 남아있어서 안도감 속에 긴장감 또한 그의 마음속에 팽배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날 대략 10시간 정도를 운전석에서 보냈던 남자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저절로 눈이 감겼다.

끼니를 때우고 자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이 날은 도저히 그럴 힘조차 남아있지 않아 렌터카 반납 시간에 맞춰 오전 알람을 설정하고 잠에 들었다. 그렇게 2박 3일이었지만 12박 13일의 여정 같았던 그의 2번째 솔로 트립은 끝을 맺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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