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3일

by 이승윤






눈 잠깐 감았다 뜨니 새벽 4시 반이다. 예전에는 이런 적 없었던 것 같은데(과거는 미화된다고 그새 까먹었을 수도) 이번 여정은 이상하리만치 설렘이 안 느껴진다. 그래도 알람소리에 맞추어 칼같이 일어나 머리만 대충 감고 옷을 챙겨 입는다. 밤새 눈이 내려서 조금 더 일찍 출발하기로 한다. 엄마와는 집에서 헤어지고 아빠랑 단 둘이 차를 타고 김포공항으로. 늘 그렇듯 크게 의미 없는 대화 조금 나누며 비 같은 눈과 함께 새벽 도로를 헤쳐나간다.



생각보다 한적하다. 너도나도 일본에 간다고 뉴스에서 떠들어 댔던 것 같은데 새벽 비행과 더불어 3일 연휴의 마지막이어서 그랬는지 소문만큼 체감이 안 된다. 짧은 듯 길어 보이는 체크인 줄을 서서 기다리기 싫어 잠시 아빠와 앉아 TV 모니터에 비친 뉴스를 훑어본다. 비몽사몽 한 기운에 집중력은 떨어지지만 긴장감은 덜하다. 얼추 줄어들었으니 뒤에 서서 기다렸다가 캐리어 한 개를 직원에게 건넨다. 라인 타고 들어가는 거 눈으로 확인하고 출국장이 있는 층으로 올라간다. 무엇 때문에 줄이 막혔는지는 몰라도 너무 심하다고 생각해 아이스커피 한 잔 얻어먹으면서 시간을 태운다. 15분 정도 카페에 앉아있었는데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는지 원. 줄어들 틈이 안 보여서 그냥 뒤에 서 있기로 한다. 예전처럼 열몇 시간씩 타는 것도 아니고 넘어지면 닿을 곳에 짧게 갔다 오는 거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대충 얼버무리며 아빠와 작별한다. 살면서 남들보다 조금은 더 자주 겪었는데도 이 순간에는 항상 작은 제스처에 감정이 솟았다, 꺼졌다 하는 느낌이 든다. 약간만 늦었어도 제일 늦게 비행기에 탈 뻔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솔직히 눈 때문에 크게 지연되거나 취소될 줄 알았는데 너무나 수월하게 이륙한다. 벌써부터 일이 잘 풀린다. 이러면 괜스레 더 불안해지는데.



처음 마주한 하네다 공항. 한국어로 전부 다 표시되어 있어서 쉽게 입국심사까지 끝냈지만 마지막 자동문을 나서면서부터 숨이 턱턱 막힌다. 영어라도 들리면 좋으련만 온통 일본어 천지다. 하룻밤 지낼 숙소를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본다. 저런. 거리는 가까운데 어떻게 해도 최소 2번은 환승해야 한다. 괜히 겁먹어 택시도 고려해 보지만 금액의 크기는 두려움을 짓밟고도 남을 정도다.



어플에서 가라는 대로 몸을 맞추어 움직인다. 분명 한국어/영어/일본어 다 방송으로 나오는데 뭐가 어떻게 굴러가는 건지 모르겠다. 일단 올라탔지만 화면에서 나오는 설명과 다른 역의 이름이 나오기 시작한다. 뭔가 잘못됐다 싶어 바로 다시 내린다. 혼자서는 쉽지 않을 것 같아 눈앞에 보이는 중년의 남자에게 물음을 구한다. 영어부터 입에서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그새 기가 죽어서 몇 안 되는 일본어와 번역기를 사용한다. 다행히 아저씨도 대충 눈치를 채고 설명을 해 주시는데 모든 문장을 주관적인 해석으로 풀어내야 한다. 맞는 열차를 타긴 했는데 급행/준급행/고속급행/일반처럼 다 나뉘어있어서 헷갈렸던 것 같다고 들린다. 본인 또한 그 역으로 가야 하니 환승라인까지 안내해 주겠다고 하신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를 그 짧은 순간에 몇 번이나 말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갑자기 머리에서 떠올라 일본 야구 잘한다고 했는데 나조차도 대화의 흐름을 가늠할 수 없는 것에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다.



모든 건물들이 빈틈없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하나의 미로 같이 보여서 조금은 무서울 정도. 관광객들이 많이 타고 있어서 아직까지는 완전히 동 떨어진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렇게나 멀어 보였던 환승역에 내린다. "Here"라는 단어와 함께 손짓을 건네는 아저씨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다시 혼자가 된다. 그렇게 타고, 내리고, 표 바꾸고, 타고, 내려서 숙소 근처에 도착.



체크인 시간까지 4시간이나 남았는데 짐이 많으니까 더 이상 걸어 다니고 싶지 않다. 비도 점점 더 많이 온다. 현재 상황에서 극한의 효율을 취하기로 한다. 한국에서 만들어온 트레블 카드가 잘 작동하는지 확인하러 근처 편의점에 들어간다. 한국어를 읽어가며 2,000엔을 누른다. 문제없이 성공. 다시 나와서 지금 영업 중인, 가장 가까우면서도 유일한 카페에 들어선다. 문 여는 것부터 긴장의 시작이다. 그들이 이해를 못 하는 것보다 내가 이해를 못 하는 것 때문에 더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첫날부터 번역기 어플에 불이 난다. 그래도 내 생각보다 훨씬 잘 작동이 되는 듯 모든 대화의 프로세스는 성공적으로 흘러간다.



4시간이 무슨 영겁의 세상 같다. 이렇게 느껴지는 이유가 있다. 한국을 떠나기 직전에 모든 sns와 유튜브 어플을 삭제했다. 요즘 내 사진들이 약간 짜치게 느껴져서. "이렇게까지 하니까 제발 도와주십시오"라고 하늘에 이야기한 건데 솔직히 이런 행동이 더 짜치게 보인다. 지도> 이메일> 데이터 사용량 순서대로 왔다 갔다 하다가 다 내려놓고 유선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아무 생각 없이 최대한 집중해서 Duke Ellington의 곡들을 듣는다. 얼마 안 가 한 직원 분이 디저트와 과일을 몇 개 가져다주신다. 한 단어 말하는 게 매우 힘겹게 느껴지지만 거절하는 게 더 실례 같아 고개 숙여 인사를 여러 번 건넨다. 물론 말은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4시가 되자마자 몸을 일으킨다. 똑같은 패턴으로 인사를 하는데 갑자기 직원분들이 영어를 하신다. 유창하게 말하면 오히려 더 이해하기 힘드실 것 같아 최대한 단어 위주로 말한다. "Welcome"이라는 말과 함께 육개장 큰 사발면을 나에게 건네어 주신다. 너무 부담스러워서 멘탈이 나갈 뻔한 적이 살면서 있었던가? 아까 받았던 디저트 때문에라도 팁을 건네려 했는데 또 찾아보니까 여기서는 받는 게 더 곤란한 일이라고 한다. 웃으면서 나가는 내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살금살금 움직인다.



왼쪽 코너 돌자마자 숙소가 나온다. 공용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맞는 방에 들어가 짐을 내려놓는다. 어차피 하루만 머물 예정이니 다 꺼낼 필요 없이 가지런히 놓아만 둔다. 방 개수는 많은데 두어 명 정도만 들어와 있는 듯. 옷도 안 갈아입고 침대에 다이빙한다. 조금만 눈 붙이고 나가서 저녁거리만 사 오면 오늘의 미션은 끝이다. 이 생각에 아주 조금은 편안해지지만 기분 나쁘게 침체된 내 감정은 아직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바로 건너편 중국음식점에 갈까도 생각했지만 대문짝만 하게 '연중무휴'라고 쓰여 있던 간판이 무색하게 셔터가 내려가 있다. 비는 그쳤는데 바람의 세기가 상상 초월이다. 퇴근시간에 맞물리는 바람에 본인들의 집으로 도망치는 사람들과 함께 작게나마 골목 한 바퀴를 둘러본다. 첫날부터 편의점 음식으로 때우기 싫어서 작은 초밥집에 멈추어 선다. 창문너머 안에서 일하고 계시던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자 밖으로 나오신다. 또 다른 스테이지의 시작. '관광객'이라는 단어를 새로 장착해서 써먹어본다. 한국과 관련된 무언가를 설명하시는데 역시나 전혀 이해를 못 한다. 멋쩍게 웃으면서 1,000 엔짜리 초밥상자와 지폐를 건넨다. 항상 인사는 정중하게 고개숙여 한다. 이 제스처가 내가 할 수 있는 매너의 최대치니까.



샤워실이 비어있는 틈에 후딱 씻고 방에 들어와 식사를 한다. 혼자라면 아쉬웠을 텐데 컵라면이 같이 있으니까 매우 든든하다. 다 먹으니까 바로 졸리다. 부랴부랴 치우고 침대에 눕는다. 잡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다. 모든 게 다 수월하게 진행됐는데도 일주일 치 일정을 끝낸 것 같다. 내일은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으면 좋겠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