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에 일어날 거라고 호언장담했지만 결국 8시 기상. 비는 안 오고 약간 흐린 수준이다. 부정적인 생각들과 피로감이 계속 발목을 붙잡는다. 겨우 이겨내고 다시 밖으로. 어제의 귀갓길 노선 그대로 다시 타고서 근처에 있는 츠키지 어시장에 발을 들인다. 빼곡한 사람들과 시장 특유의 분위기가 곧바로 눈에 들어오지만 지금의 상태로는 그 어떤 사진도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신이 나야 하는데 긴장이 된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최대한 억누르고 한 바퀴 둘러보기로 한다. 사진 유튜버들이 업로드한 영상에서 보았던 것보다 통로가 조금 더 비좁게 느껴진다. 늦은 줄 알았는데 곳곳의 가게들은 아직까지도 새로 들어온 식재료들을 정리하는 데에 여념이 없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에 약간 실망하고 나서 다른 곳이나 둘러보러 가자는 생각에 결국 카메라를 가방에 도로 넣는다. 노출 조정도 한번 하지 않은 채 다시 어두운 공간으로. 출구 쪽으로 가는 중에 작은 골목이 눈에 띈다. 한번 들어나 가보자. 외국인 손님들이 여럿 있는 작은 야외 카페다. 힘도 없는데 커피나 들이켜고 가는 게 낫겠다 싶어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영어와 일본어를 섞어 주문한다. 부부로 보이는 사장 둘은 영어가 꽤나 능통하다. 옆에 중동 사람들과의 대화를 대충 엿들으니 여러 나라를 여행한 듯 보인다. 영어는 자신이 있어서 그들의 대화에 눈치껏 난입한다. 경직되어 있던 몸의 겉과 속이 동시에 점점 녹아내린다.
그들이 자리를 뜨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물음을 구해본다. 살면서 처음으로 포트폴리오 페이지를 초면인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과연 이 데이터들이 그들에게 신뢰를 가져다줄 수 있을까? 나는 이 점이 너무나 궁금했다. 다행히도 흔쾌히 OK 사인을 준다. 오랜만에 손 벌벌 떨며 그들을 몇 장 찍는다. 한 사람이 페이지 주소를 달라고 하니 뒤이어 모두가 받아간다. 나중에 자기들 사진 올라가면 보겠다며 작별인사를 한다. 간단한 립서비스라는 것을 일전의 경험들로 인해 잘 알고 있었기에 나도 답례로 고맙다는 인사만을 전한다. 그렇게 골목을 돌아 나온 나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이후 꼬박 3시간을 이 장소에서. 돌 맞을 준비가 된 나는 다시 군중들과 가까워진다. 웃으며 반기는 사람, 멋쩍은 표정으로 거부하는 사람, 미친 사람 쳐다보듯 바라보는 이들까지 다양한 인물들과 마주한다. 내 사진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사람들이 한데 모아 이야기 하는 진부한 구도와 거리감, 흑백의 톤, 특이점 없는 안정적인 앵글이 모두 맞아떨어져 가기 시작한다. 시야와 노출 컨트롤이 그새 많이 회복됐다. 5점 만점에 3,4점 은 수두룩하게 쌓였지만 만점짜리는 찾아볼 수가 없다.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다음을 기약하기로 한다.
내친김에 도쿄 빅사이트를 찍고 오다이바까지 가보기로 한다. 갈수록 인파가 점점 줄어든다. 비가 조금씩 떨어진다. 바람은 거의 없어서 작은 사이즈의 우산으로도 다 커버한다. 밴쿠버 여행을 갔을 때 봤던 비슷한 풍경이 나온다. 거기에 조금의 벚꽃을 추가한다. 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커플 한 쌍 외에는 나밖에 없다. 지하철역까지 이어진 강 옆 작은 공원을 걷는다. 특별한 오전을 보낸 덕분에 오늘은 이런 여유도 기분 좋게 밟고 간다. 백그라운드로 깔리는 음악은 Bill Evans 모음집.
아주 약간 아쉬운 마음에 오이마치 역까지 갔지만 도착하자마자 비가 억수로 쏟아진다. 하나의 골목길만을 들어서고 나서 다시 귀갓길 열차에 오른다. 토요일인데도 열차 안과 밖은 생기 없이 풀이 죽은 모습이다. 날씨 때문인 건지, 도시가 사람들을 이렇게 만든 건지 궁금하다. 조금 더 지내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