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생활 처음으로 제시간에 맞추어 기상한다. 일반쓰레기를 버리는 날이어서 바로 거실로 나가 쓰레기통을 비우는데 Tim 이 버릴 게 남아있다며 이따가 자기가 마무리하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오늘은 어디 가냐는 물음에 나카노 주변 둘러보러 간다 했더니 약간의 정적 후 “Why?”라는 단어를 뱉는다. 딱히 이유는 없다 했더니 자기는 별 게 없었다며, 사진 찍는 사람이라면 숨겨진 보물을 찾을 수도 있겠지 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방으로 들어간다. 그새 자란 수염을 세수하면서 다듬고 옷을 챙겨 입은 뒤에 새로운 하루를 본격적으로 맞이하기 위해 대문을 연다.
두 번째로 겪는 맑은 날. 이런 날이 흔한 게 아니라 손에 꼽게 될 거라는 것을 전혀 상상치 못했지. 출근 시간 때문에 어플에서는 어제저녁에 찾은 것과 다른 루트로 안내한다. 직장인들의 템포는 나보다 1.5 내지 2배 정도 빠르다. 20분 타고 내려서 갈아타고 30분 정도 걸려 도착. 애써 부정하며 이전 날들에 갔었던 곳들과는 전혀 다른 그림을 보듯이 눈과 발을 움직인다. 술장사 하는 점포들이 많아서 해가 높이 뜬 지금 시간 골목은 쥐 죽은 듯 조용하다. 구도보다는 프레임 안에서 영역 별로 빛이 반사되는 부분들을 세세히 관찰한 뒤에 셔터 버튼을 누른다. 조금이라도 신박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오늘은 고개를 자주 위로 치켜들어 보기도 한다. 덕분에 한 장 건졌다.
북쪽을 다 둘러보고도 시간이 남아 남쪽도 가본다. 주거지역이 비교적 넓게 포진되어 있다. 목에 카메라를 걸고 마구잡이로 앞으로 나아간다. 상권이 밀집된 지역에서 조금씩 멀어질 때마다 느끼는 신호를 감지할 때 즈음 한 이발소가 이목을 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야구’와 ‘이발소’의 조합이다. 슬쩍 내부를 바라보면서 지나가는데 딱 봐도 오래되어 보인다. 꽂히면 찍어야 하는 주의라 번역기를 켜서 소개말을 일본어로 옮긴 뒤에 안으로 들어간다. 믿도 끝도 없이 ‘스미마셍’으로 시작한다. 사장님은 예상보다 젊고 쾌활하다. 아는 야구지식을 총 동원해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대학선수 출신 사장의 30년 넘은 이발소라. 프로젝트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장소다.
5평 정도 되어 보이는 장소를 구석구석, 정교하게 기록한다. 흑백사진만 찍는다고 하니 더 신기하게 쳐다보신다. 문을 닫고 나가서까지 고개 숙여 인사하고 다시 역 앞으로. 왠지 모르게 오늘은 기필코 라멘을 먹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기분. 수많은 가게들 중에서 널찍한 곳으로 선택한다. 라멘과 교자, 공깃밥 세트에 한화로 11,000 원 정도. 맛은 상당히 안정적이다. 국물까지 전부 비우고 나와 기름때를 닦아 줄 카페까지 기세를 이어나간다. 카페는 주변에 3배 정도 더 즐비하게 흩어져 있다. 그러던 중에 ‘재즈킷사’라는 단어와 함께 한국어 리뷰가 최근에 쓰인 카페를 발견한다. 다른 리뷰들도 훑어보니 제약사항들이 좀 있어서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조금 겁이 나지만 도전해 본다.
선입견 때문인지 사장님의 인상이 조금 더 날카로워 보인다. 어르신 두 분이 따로따로 앉아계셨는데 그 중간, 재즈가 빵빵하게 흘러나오는 스피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펼친다. 번역기가 안정적일 것 같아 말 대신 화면을 보여드렸더니 인상을 조금 찡그리신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눈이 약간 침침하신 지 어떤 사물을 바라볼 때마다 버릇처럼 그러시더라. 아이스커피와 치즈케이크를 시켰는데 생각지 못하게 같이 딸려 나온 로터스 비스킷 한 개에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커피의 맛은 기대를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이다. 앞으로 남은 날들 동안 마실 커피들 중에서 이곳의 음료를 넘어설 친구가 나올지 모르겠을 정도로 좋다. 첫 LP는 비밥 스타일인 듯. 빠르고 경쾌하다. 협소한 장소에 사운드가 엄청나지만 귀를 불편하게는 않는 수준이다. 고수의 손길이 닿아서 그런 게 아닐지?
한동안 펼치지 않았던 노트와 펜을 꺼낸다. 아무 생각 없이 내키는 대로 쓸 때가 가끔 있는데 오늘이 그날인 듯. 첫 문장은 ‘What is a Photograph?’로 시작한다. 그 밑으로 줄줄이 오늘 있었던 일들을 적어낸다. 그렇게 멍 때리다가, 졸다가, 집중해서 음악 듣다 보니 2시간이 삭제된다. 가게에서 엉덩이를 간신이 떼어낸다. LP는 총 세 번 교체됐다. 다시 밖으로 나오니 햇빛이 구름에 가려져 있다. 아까 보았던 골목길을 다시 찾아 들어간다. 괜한 마음에 다 찔러봤지만 헛수고다. 오랜만에 일찍 일어난 것에 더해 어제 하체운동의 결괏값이 몸을 짓누른다. 걷다가 졸 것 같아서 조금 이른 시간에 다시 열차에 올라탄다. 눈을 잠시 붙일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지만 아직 나의 몸과 마음은 그 정도로 이곳에 정을 붙이진 못했나 보다. 좌석 가장자리에 고개를 기대는 것으로 만족하며 나카노에서 멀어진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