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2일

by 이승윤





새벽에 듬성듬성 느껴질 정도로 쏟아지던 비는 멈췄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산을 챙긴다. 시부야로 한 번에 갈 수 있어서 조금 이른 점심을 먹고 출발하기로. 1시간 뒤면 우르르 몰려올 직장인들을 피해 좋은 자리를 선점하고 샌드위치를 주문한다. 서브웨이도 키오스크 주문 방식으로 바뀌었구나! 이것저것 눌러보지만 결국 답은 늘 먹는 조합으로 완성된다 : 통밀빵에 참치 / 야채 전부에 아보카도 추가 / 올리브 오일과 후추.



아직도 이 나라의 학교 시스템은 미스터리하다. 백수인 나의 불규칙적인 생활 패턴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매번 눈앞에 등장한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니 유연한 스케줄인가 보다 하고 넘긴다.



생각해 보니 저것보다 요 근래 날씨가 더 미스터리하다.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옷차림에 에버리지가 없다. 처음 왔을 때 입고 온 숏패딩을 다시 꺼내어 걸친 나의 용모가 특이한 게 아니다. 그래도 이틀 뒤면 다시 20도까지 올라간다니까 뭐.



내린 지 채 5분도 안 되어서 좁싸래기 같은 비(라고 하기도 뭐 한)가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한다. 살짝 야마가 돌지만 일단 가기로 계획했던 스파이럴 빌딩에 들어선다. 세 번째 도전 만에 아무런 제약 없이 아키텍처를 구경한다. 여타의 형체들에 비해 휘황찬란하지는 않지만 곡선과 여백을 잘 살린 게 아주 마음에 든다. 꽂혔으면 카메라를 꺼내야지. 카페가 바로 연결되어 있어서 조형물 근처에 있는 내 쪽으로 시선이 쏠리는 느낌에 약간 쭈뼛거렸지만 뷰파인더에 빨려 들어가면서부터는 보이지도 않는다.



1시간 정도를 이곳에서만. 나도 이렇게까지 오래 머물 줄 몰랐지. 과연 이것은 순수한 자극이었을까? 아니면 현재까지 크게 진척이 없어서 불안감에 강제로 파워를 끌어올린 것이었을까? 조금씩 땀방울이 일어난다. 후드티를 방에 놔두고 온건 아주 좋은 선택이었어.



밖에 왜 사람들이 서 있나 했더니 우산이 없어서 잠시 피신한 모양새다. 구름 표시만 되어있는데 아까보다 훨씬 더 휘갈긴다. 실시간으로 바뀌는 바람에 따라 떨어지는 방향도 움직이니 우산을 써도 몸으로 다 받는다. 시부야 전용 플랜 B를 가동한다. 매장들을 쑤시며 원하는 신발들을 물색한다. 신어보니 꽤나 괜찮네? 하지만 한국에서는 반값에 살 수 있으니까 돌아가서 구매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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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몰두하겠다고 유튜브 어플도 지우고 온 새끼가 신발 보러 돌아다니고 있다는 생각에 갑자기 피가 거꾸로 솟는다. 하지만 널려있는 건 사람들과 광고판들이고, 아이디어는 씨가 말라버렸는 걸. 표정이 좋으래야 좋을 수가 없다. 우산 다시 쑤셔 넣고 어슬렁거리다 보니 결국 종점인 시부야 교차로에. 영상에서나 보던 스트리트 포토그래퍼들이 속속들이 눈에 잡힌다. 각자의 장비들로 신나게 찍으면서 돌아다니고 있는데 왜 나는 주저앉아 울고싶은거냐. 저렇게 할 용기는 있는데 마음에 드는 방식이 아니다. 도대체 내가 원하는 게 뭐지?




라고 치이던 중에 맞은편 간이 흡연부스가 눈에 들어온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부스 안에 있는 사람들의 흐릿한 형태들이 눈에 띄었던 거다.




초록불과 함께 튀어나간다.




사람들의 시선이 등에 다트처럼 박히는 느낌이 들지만(실상은 다들 아무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저 때 내가 받았던 느낌을 적어놓았을 뿐.) 나는 지금 눈앞의 이 모습들이 매우 아름다우면서도 겨우 찾아내었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날 지경이다. 까놓고 보면 별 거 아닌데 감정은 부풀리기를 좋아하니까.




셔터 수, 구도, 노출 다 버리고 몸 가는 대로 홀린 듯이 찍는다.




이 감정의 극한이 적어도 일주일 정도만 함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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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껑이 열렸다고 해야 하나? 아이디어가 연쇄적으로 튀어나온다. 캘거리에 있을 때 시위사진을 장노출로 찍었던 친구의 컷들이 떠오른다. 그게 어떻게, 왜 머릿속에 나타났는지는 상관없다. 셔터속도를 3초로 바로 변경한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방식인데 본능에 취한 채로 따라간다.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망가진 건 망가진 대로.



결과물들은 확인하지 않고 교차로를 넘어 다니면서 계속 쌓는다. 카메라의 몸체가 달아오른다. 오랜만에 혹독하게 다루니 더 힘들어하는 듯.



배가 고파지는 시점에 맞추어 마무리한다. 허기를 못 이겨냈으니 난 아직도 덜 미친 사람인가? 생각의 회로가 이렇게 굴러가는 걸 보면 완전 제정신은 아닌 것 같은데.



20엔 더 써서 환승이 아닌 스트레이트 노선을 탄다. 나에겐 사치라면 사치다.



방에 돌아와 씻으려 하는데 누가 노크를 한다. 얼마 전에 입주한 예고르다. 두부를 샀는데 어떻게 먹는 건지 가르쳐달라고 한다. 찌개용 두부 같아 보이지만 괜히 더 헷갈려할까 봐 기초적인 것들만 알려준다. 나는 이렇게 썰고, 기름 둘러서 약간 노랗게 될 때까지 구워서 밥이랑 먹어.



씻고, 먹고, 치우고, 정리하고.. 결과물들을 열어본다. 몇백 장 중에 추리고 추려서 40장 정도가 남았다. 불태운 보람이 있었군.



보정작업은 옆에 내려두고 먼저 글을 써 내려간다. 내일 혹은 모레에 다시 읽으면서 닭살이 돋을 것 같지만 꾹꾹 눌러서 어떻게든 남겨놓아야 한다. 몇 년 뒤에 다시 꺼내어 보면 그때는 또 다르게 느껴지겠지.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