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타마 현 카와고에로 떠난다. 한국에서 도망쳐 도쿄로 왔건만, 그새를 못 참고 또 다른 곳으로 뛰어나가는 게 영 껄끄럽지만, 새로운 곳으로 향할 때마다 느끼는 의식 속 설렘의 파동은 여전하다.
스마트폰 화면에 집중된 두 눈은 마지막 노선에 올라타면서부터 바깥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조금 웃기게 들릴 수 있겠지만, 도쿄에서 보기 드문 ‘땅’ 이 보인다. ‘밭’과 ‘흙’,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거다. 전체적인 포맷은 유사할지 몰라도 조금은 다른 지역에 왔다는 게 실감이 되는 순간. 타 지역에서 온 듯한 사람들도 하나둘씩 사진을 찍기 시작하는 걸 보면 나의 느낌이 그리 유별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정거장이 3개 정도 남았을 때 팍 꽂히는 장면을 발견한다. 운전면허 시험장 같아 보이는데 일단 근처를 저장해 놓고 이후 상황에 맞춰서 진행하기로. 아무런 조사 없이 그저 “이런 곳이 있다고 한다~”라는 말만 듣고 온 터라 일단 배부터 채우기로 한다. 한 손에는 햄버거. 다른 한 손으로는 스마트폰으로 휘적휘적.
3km 정도 되는 것 같은 긴 시장 거리를 사람들과 함께 뒤엉켜 이동한다. 토요일이어서 몹시 바글바글하지만 동 시간대 시부야 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쾌적하다. 옛 정취를 풍기는 거리는 조금 뒤쪽부터 나오는데, 작년 홋카이도 여행 때 들렀던 오타루와 약간은 결이 비슷하다.
기대를 하고 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나에게는 그저 ‘관광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거쳐 온 90분이 아까워서라도 조금 더 눌러붙어 있어보고자 한다. 생선 뼈 바르듯이 골목 사이사이를 하나도 빼먹지 않고 다 헤집는다.
약간 주거지역에 치우쳐져 있어서 관광객들의 소음이 잘 닿지 않는 골목에 극장 같이 생긴 낡은 건물이 하나 보인다. 매표소의 모양과 분필로 그린 오늘의 상영표 덕에 더 마음에 든다. 이런 장소를 찾으면 잘 못 참는 나는 내부까지 들어가 보고 싶지만 대화의 두려움이 다시금 스멀스멀 올라온다. 때마침 기웃거리던 나를 발견하고 한 청년이 밖으로 나와 묻는다. “한국인 관광객이어서 일본어를 잘 못합니다. 이해해 주세요.” 는 이제 그냥 디폴트 값으로 깔고 간다. 이후부터는 번역기 행인데 이렇게 된 거 자초지종을 다 설명한다. 흐름은 요상한데 서로 소통이 잘 된다. 유일하게 그가 고개를 갸우뚱했던 게 나의 나이에 대한 유추였으니 말이다.
알바생이어서 조금 난처한 듯 보여 초강수를 둔다. “표는 살 테니 영화는 관람 안 하고 이따가 모든 상영이 끝난 뒤에 다시 오면 안 될까요?” 그러면 가능할 것 같다는 말에 지갑에서 1,000엔을 꺼내어 건넨다.(사실 25세 이상은 1,500 엔이었는데 사장님이 1,000엔 만 받겠다고 한 비하인드가 깔려 있다.) 올해로 119년 된 영화관을 기록할 기회를 얻는 건데 1,000엔 이면 거저먹는 거지. 고맙다는 말 여러 번 하고서 5시까지 여기에 다시 오는 걸로.
떨어진 당을 커피랑 아이스크림으로 채우는 와중에 짙은 구름이 하늘을 조금씩 덮는다. 느낌상 비가 올 것 같지는 않다. 내 기준 최적의 촬영 조건이니 남은 3시간 계속 발을 넓힌다.
저 만남 이후로 내가 이 지역을 받아들이는 감정이 완전히 뒤집어져서 그랬던 건지는 몰라도, 이 날 유독 많이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라는 말을 던졌는데, 대다수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사람, 동물, 장소 안 가리고 전부. 내가 도쿄에서 하려던 계획을 사이타마 현 작은 동네에서 이루어낼 줄이야. 도심지 정글에서 겪었던 냉소와 날카로움을 국가 전체의 색으로 일반화시키려 했던 게 난데, 그걸 멈추게 해 준 이곳 사람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한다. 근데 진짜 이번 달은 저번 달과 비교했을 때 달라도 너무 다르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기다가 다시 극장으로. 사장님한테 관객들이 다 빠져나가면 시작하겠다는 말을 하고서 조금 기다리다가 카메라 전원을 켠다. 연식 치고는 관리가 제법 잘 되어 있다. 군데군데 보수를 했겠지만 원형은 또렷하다.
상영관도 좋지만 그 얼마 안 되는 복도가 너무나 인상적이다. 이유는 모르겠다. 어디선가 보았던 과거의 기억과 비슷해서, 혹은 흑백의 톤과 잘 맞아떨어져 일 수도 있겠지. 중요한 건 지금이다.
20분 정도 걸렸다. 고맙다는 말만 하고 떠나려 했는데 사장님이 “여기 어떻게 알았어요?”라는 말을 영어로 하신다. “정말 그냥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고 답한다. 대화가 조금 길어진다. 오늘은 모든 소통이 편안하게 오고 간다. 무엇보다도 급박한 느낌이 없어서 숨이 트인다. 웹페이지가 궁금하다고 하셔서 보여드렸는데 이렇게 진지하게 구경하신 분은 근래 들어서 이 분이 처음인 듯.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마타네’라는 말을 배워서 작별인사로 활용한다. 남편 되시는 듯 보이는 분이 뒤늦게 나오셔서 한번 더. 소란스러웠던 거리는 많이 가라앉아 있다. 되돌아가는 초저녁 이 길이 왠지 모르게 서글프지만 오늘의 기록들을 잘 요리해서 보관하는 걸로 마음을 달래야지.
사람에 울었다가 다시 사람에 웃게 되었으니 쉽사리 잊히지는 않을 것 같군.
다시 도쿄에 들어선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