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9일

by 이승윤





긴 하루의 막이 오른다. 원래 계획대로 굴러갔다면 이른 아침에 에가와 해변으로 떠났을 테지만 전 날 저녁에 준 형님 연락을 받고 전부 뒤엎었다. 조금 늦은 점심 약속을 잡는다. 만남이 시작되고부터는 그것에만 집중하고 싶어 방법을 궁리하다 보니 새벽에 카메라와 산책을 나가게 된 것이다. 이렇게라도 시간을 덜 버리고 싶더라. 이러나저러나 잘 된 일이다. 어차피 한 번은 나가려 했었는데. 뒤로 갈수록 일정은 빡빡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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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시에 딱 맞춰서 집을 나선다. 걷기에 아주 적당한 온도에 밤하늘 또한 매우 맑다. 유산소 운동을 하고 나서 맞이한 날이라 그런지 늦은 시간임에도 정신이 말똥말똥하다. 일단은 센소지 까지 가보는 걸로 한다.



늘 의외의 모습들을 마주하지만 이 시간에도 내 머릿속 그림과는 다르게 흘러간다. 조용하지만 생각보다 차량도, 사람도 많이 움직이고 있다. 9시에 나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첫 주에 직장인들로 가득 차 있던 다리를 오늘은 혼자서 넘는다. 기문이 묘해서 영상으로 남긴다. 아사쿠사 역까지 왔는데도 야간 공사를 하고 있는 곳 말고는 빛이 희박하다.



신주쿠, 시부야 같은 화려한 불빛은 없지만 그렇다고 나쁜 것은 아니다. 복잡한 잡념들도 없어서 가볍게 움직인다. 1시 즈음되었을 때 돌아갈까도 했는데, 조금 아쉬워서 우에노 역까지 반경을 넓히기로 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뜨멈뜨멈 심야 영업을 하고 있는 식당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흘긋 보면서 지나간다. 취객이 직원을 잡아두고 설교를 하고 있는 모습, 구두는 멋대로 벗어두고 양복을 입은 채로 식사를 하고 있는 두 남자, 깊은 담배를 피우고 있는 주인 등등.. 새벽의 색깔은 다른 때만큼이나 다양하다.



우에노 역 주변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조금 더 많은 주점들이 불을 켜놓고 있다. 관광객 반, 현지인 반 느낌. 시장을 크게 한 바퀴 돌고 원하는 스팟에서 몇 장 건진다.



분명 몸은 잠겼지만 각성한 정신에 집중력은 그대로. 돌아가는 와중에도 계속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다. 다리를 건너기 전 작은 사거리에서의 기록을 마지막으로 카메라를 가방에 넣는다.



잠에 든 스카이트리 밑에 도착하니 3시를 넘어가고 있다. 리얼이었는지, 아니면 정신적 오류에 의한 허기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편의점에 들러 간식을 조금 사 근처 벤치에 자리를 깐다. 인기척 없는 환경에 홀로 자유시간을 맞이한다. 정말 만족스러웠단 말이지.



방에 돌아와 양치만 하고 알람을 재차 확인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11시 30분에 한 개, 11시 45분에 한 개를 더 설정하고 잠에 든다.




11시에 잠에서 깼는데 다행히도 개운하다. 침대에서 뒤척이던 중 형님으로부터 카톡이 날아온다. 생각보다 일이 일찍 끝나서 먼저 시부야에 가 계신다고. 준비라고 해 봐야 씻고, 옷 갈아입고, 한국에서 사 온 선물 챙겨가는 게 전부라 15분도 안 돼서 출발.



마지막 만남이 8년 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다행히 오랜만에 뵌 것 치고는 나 자신이 어색함을 드러내지 않는다. 에러 가득한 프린터가 다시 가동을 재개하듯 한국어로 미친 듯이 말을 쏟아낸다. 그래도 중간중간 실언을 할까 하는 우려에 이따금씩 스스로 제동을 거는 걸 보면 나도 나이를 먹긴 했나 보다.



서로의 과거사를 복기하는 것도 좋았지만 일본 짬이 상당한 형님 덕에 이해가 안 되었던 것들을 상당수 풀어낸다. 몹시 피곤해 보이셨지만 그걸 알아채고도 조금 더 붙잡았던 나를 용서해 주시길..



지하철 출구 앞에서 후일을 기약하고 헤어진다. 배꼽시계는 귀신같이 6시에 가까워지면서 신호를 보낸다. 빈자리에 앉으니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꽃가루가 많이 날린 날이어서 괜스레 내 두 눈도 간질간질한 것은 기분 탓일까? 내일부터는 나도 마스크를 챙겨 다녀야겠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