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14일

by 이승윤





알람보다 눈이 먼저 떠진다. 시골 나들이 2탄이다. 예정대로 가도 2시간 반이나 걸리는 곳이어서 부리나케 움직인다. 어제 잠들기 직전에 짐을 꾸려 놓길 잘했어.



최악의 지옥철을 경험한다. 한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다. 매일 이걸 겪으라고 한다면 정말 쉽지 않을 것 같다. 그 와중에 가방에 들어있는 카메라가 구겨질까 봐 몸보다 더 애지중지 챙긴다. 하필 중간에 걸려서 왼/오른쪽 문이 열릴 때마다 내렸다 탔다를 반복한다. 이 고난은 아키하바라를 거치고 몇 정거장이 더 지난 후에야 사그라든다.



일면식 한번 없는 노선으로 갈아타고 1시간 반을 더 간다. 내 주변을 두르고 있는 사람들 80% 가 대학생인 듯 앳되어 보이는 얼굴들을 하고 있어서 순간 잘못 탔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시골 안에 대학교가 있다고?”라는 생각이 들 법도 하니까. 조금 지나서 ‘00 대학 앞’과 같은 역에서 우르르 내린다. 검색해 보니 분교가 여러 지역에 있는 명문 사립대라고. 나는 이후에도 40분을 더 들어간다.



내리자마자 ‘읍/면/군’의 분위기가 눈에 들어온다. 카와고에 보다 훨씬 시골이다. 한번 더 갈아타고 가야 하는데, 날도 좋고 시간도 널널해서 그냥 걸어가기로 한다.(그 거리는 자그마치 7km였다.)



기다란 하천 옆 길을 따라 쭉 걷는다. 간간이 지나치는 차량과 자전거 몇 대를 제외하면 나밖에 없다. 관광객들이 많다고 했는데 내가 길을 잘못 들었나?



민가를 지나 산기슭 밑으로 넓게 펼쳐진 밭들이 나온다. 뒤쪽과 옆쪽에는 작은 신사와 대나무 숲이 놓여있다. 그 중간에 덩그러니 서서 조금 강한 바람을 맞으니 스산함을 넘어 약간의 소름까지 돋는다. 흐린 날에 왔다면 꽤나 무서웠을 것이다. 빛이 너무 세서 잘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몇 장 찍는다. 솔직히 한국의 시골과 큰 차이는 없는데 여기는 나에게 있어서 엄연한 ‘외국’ 이므로 없던 흥미마저 생기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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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고등학교를 마주하고 나서 옆쪽 작은 길로 빠지는데 내가 이런 지역에서 보고 싶어 하던 그림이 앞에 나타난다. 구름이 해를 가릴 때를 놓치지 않고 방아쇠를 당긴다. 환경, 지형, 텍스쳐 등, 모든 요소가 완벽하다. 이 사진 하나만으로도 오늘의 미션은 완수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니까. 역시 어거지로라도 많이 걷는 게 답이라니까?



종착지에 다다르기 전에 편의점에 들러 점심거리를 산다. 안에 자리가 없어 옆에 있는 작은 놀이터로. 할머니 세 분 앉아계시는 벤치 옆에 홀로 자리하고 시작한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렇게 더운데 왜 추울 수 있으니 옷을 껴입으라고 했던 거야!” 라며 ChatGPT의 날씨 예보에 성질을 냈지만, 얼마 안 가 이 자리에 앉아 강풍에 녹아내리면서는 “역시 과학기술의 디테일은 대단해!”라고 말이 바뀌어 버린다. 빌딩 숲의 바람은 짧게 날카롭지만, 전원의 바람은 덩치 큰 쾌남과 같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서야 확신이 든다. 나는 분명 친구들이 알려준 장소와는 전혀 다른 곳으로 온 게 분명하다.(그 장소는 '하코네'였다.) 월요일이어서 주변 가게들도 대부분 문을 닫았는데 관광객들을 태운 버스는 저 멀리 다른 길을 달려가는 게 어렴풋이 보인다. 자그마한 역 앞 벤치에는 한 어르신이 졸고 계신다. 진짜 사람마다 기운이라는 게 있는 것인 지, 나는 꼭 이런 곳들을 본의 아니게 자주 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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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에서 4시 사이 즈음에 조금 넓은 공원에 다다른다. 많지는 않지만 기구들마다 각 연령층의 아이들로 가득하다. 나는 그 옆에 있는 야구장에 들어선다. 점수판을 보니 최근까지도 사용한 듯. 이것도 괜찮아 보여서 데이터에 저장한다.



교복 입은 고등학생 무리들을 마주친다. 저들은 이곳 생활을 ‘힘’으로 여길까, ‘결핍’으로 여길까?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 또한 몇 분 뵈었는데 모두 나에게 인사를 먼저 건네신다. 조금 어색하지만 나도 고개 숙여 답례한다. 그분들의 눈빛에 '나'라는 용모와 행동에 대한 반응은 공통적으로 ‘??’가 쓰여 있는 것만 같았다. 날카롭지는 않고 무심함에 가까운 느낌.



해가 슬슬 지기 시작할 때 즈음 돌고 돌아 다시 고등학교 앞에 닿는다. 분명 로망 까지는 아니고, 단순 호기심에 학교 안에 있는 운동장이 보고 싶어지는데 물어볼 곳이 마땅치 않다. 멍하니 기다리다가 학생 한 명이 나와서 그이에게 도움을 구한다. 당황하지도 않고 선생님을 불러주겠다는 말을 너무 칼같이 해서 되려 당황한다.



오늘 당직이신 듯한 6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선생님과 인사한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하셔서 “불편하시면 그냥 가도 괜찮다.”라는 말을 건넸는데 잠시 안으로 따라 들어오라고. 그 잠깐동안 내부를 봤는데 겪어보지도 않은 ‘국민학교’ 이미지가 자동완성 된다. 공허한 공간들을 해질녘 빛이 새어 들어와 부분적으로 비추는데, 아 이거 진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느낌입니다. 잠시 뒤 입국심사보다 더 빡센 질의응답 시간을 가진다. “무슨 목적으로 사진을 찍나요?” “판매 예정인가요?” 등, 이제는 익숙한 질문들을 늘 그렇듯 유연하게 대답한다. 그런데 마지막 질문이 가히 압도적이다.



“여기에 사진 찍으러 혼자 왔습니까?”



나에게는 너무 당연한 것인데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니 조금 신선한 충격일 수도. 대뜸 한국인이 시골 고등학교에 와서 운동장 사진을 찍고 싶다는 게 일상적인 일은 아니지 않나. 결국 선생님과 동행해 짧게 몇 장을 찍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찍고 싶었다’ 보다는 ‘보고 싶었다’가 더 알맞은 것이었는데, 모쪼록 나에게는 기억을 간지럽히는 에피소드로 한동안 자리 잡겠지.



정문에 다다를 때 즈음 번역기 앱에 무언가를 열심히 타이핑하시길래 속으로는 찍은 사진을 검수해도 되겠냐고 나에게 물어보실 거라 예상했다. 근데 웬걸. 번역된 문장을 읽는데 더 길게 이야기하면 그냥 앞에서 질질 짤 것 같아서 나도 후다닥 인사를 하고 도망치듯 정문 밖으로 빠져나간다.



“여행 조심해서 다녀. 일본을 즐겨.”



다음 열차가 오기까지 30분이나 남아서 정말 최소한의 것들로 꾸며진 간이역 주변을 여러 장으로 기록한다. 아까보다 더욱 거세진 산바람에 마음은 빠르게 가라앉는다. 산맥 뒤로 해는 거의 다 모습을 감추고 울타리 안에 모여있는 주택들은 색을 잃어간다. 짧게나마 영상으로도 남긴다. 그만큼 시원섭섭한 거겠지.



부활동을 끝내고 뒤늦게 나온 학생들과 같이 열차에 올라탄다. 도쿄로 돌아가는 선으로 갈아타기 직전까지 시선은 멀어져 가는 장소에 고정된다. 아무 연고도 없이 반나절 정도 마주쳤을 뿐인데 고향을 떠나 상경하는 느낌이 든다. 순간적인 감정에 치우쳐진 것이라 하더라도 오늘은 나쁘게 여기지 않기로 한다. 약간의 두통에 잠깐 눈을 감고 점점 ‘방’에 가까워진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