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감상 4시간도 못 잔 것 같은데 몸과 머리가 가볍다. 목적지가 있지만 압박을 받지 않는 정도라 편하게 움직인다.
너무나 익숙한 느낌에 계속 두리번두리번. 저번에 왔던 곳이다. 같은 곳을 자주 마주하는 게 나쁜 건 아니다만 이 주변은 그리 달갑지 않아서 강이 흐르는 쪽으로 나아가 본다.
이곳 지리에 많이 적응이 된 듯하다. 지도에서 ‘강가’가 표시된 곳을 인식하기만 해도 그 주변이 어떤 식으로 그려져 있을지 대략적으로 예상이 가는 게 지금 수준이다. 항상 80% 이상 일치한다. 어제도 실컷 보았던 벚꽃길을 여기서 또 목도한다. 그 밑으로는 6개의 테니스 코트가 2개씩 나뉘어 펼쳐져 있고, 어르신들은 전부 흩어져 운동을 하고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나의 심장이 조금 뛰지만 그렇다고 간절하게 그리운 정도는 아니다.
다리 밑에서 ‘가벼운 발견’을 해 낸다. 10장 이상 찍을 것을 5장으로 줄이는 데 성공한다. 마음속 기류가 많이 바뀌었다는 게 조금씩 체감이 된다.
어제보다 따뜻해서 이케부쿠로 까지 걸어가기로 한다. 최대한 대로변은 피해서 간다. 지도 또한 정말 헷갈릴 때만 펼쳐본다. 덕분에 시선 집중이 줄곧 외부로 고정된다. ‘실험’ 과는 별개로 ‘주제’에 걸맞은 장면들을 몇 장 잡아낸다. 가벼운 기분에 날개가 달린 듯.
나와 비슷한 행색으로 떠돌아다니는 한국인 2명을 스친다. 우리는 정녕 방랑을 좋아하는 민족이란 말인가. 뜻밖의 만남에 이상한 전우애(?)가 잠깐이나마 형성된다.
어딘지도 모르는 중간 지점의 놀이터에서 잠깐 앉아 쉰다. 남/녀 아이들의 놀이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지치지 않는 당신들이 조금 부럽소.
최근의 날들만큼 인상적인 기록은 없지만 심심한 장면들을 계속 주워 담는다. 조금 전에 텅 빈 낡은 놀이터를 하나 발견해서 찍었는데 오늘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이 될 것 같다.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간토 지방 사진들’이라는 프로젝트에 아주 찰떡이다. “이건 나도 똑같이 찍을 수 있겠다.”라는 말이 나온다면 대성공이다.
도로 중간에 한 자판기가 신기해서 스마트폰을 꺼내 체크만 하고 다시 걸어가려던 찰나, 뒤에 자전거를 타고 오던 남자가 중얼거리며 지나간다. 나에게 한 말인 게 분명하다. 진로를 방해했으니 나였어도 기분 나빴을 것이다. 정말 웃긴 건 여기에 더해 약간의 고마운 감정마저 들었다. 차라리 마음에 안 든다고 표현을 해 주시라. 가만히 서서 표정만 짓고 있지 말고.
돈 내고 놀러 왔는데 이런 경험을 하게 되면 기분이 상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상당한 공부가 되기도 한다. 솔직히 사진을 찍으면서 여러 비판과 별 같잖은 비아냥들을 이미 캐나다에 있을 때부터 숱하게 들어왔기에 내성이 많이 생겼다. 가장 큰 차이는 이러한 상황들에서 같은 언어로 핑퐁이 되느냐, 아니면 일방적으로 얻어맞냐의 차이인데, 이 각각의 갈래로부터 오는, 마음속 응어리가 뭉치는 크기가 상당히 다르다. 결론적으로 내가 일본어 공부를 하지 않고 조금 거만한 태도로 이 나라를 맞이했으니, 누굴 탓할 것도 없는 일이다.
이케부쿠로와 니시-이케부쿠로 모두 돌아본 직후에 체력이 한 번에 방전된다. 아무 생각도 안 들고 오로지 ‘돌아가야 한다’라는 의식만 떠오른다.
먹을거리는 전부 냉장고에 넣어 놓고 씻자마자 잠깐 침대에 엎드려 있는다. 감았다 떴는데 1시간 반이 지나가 있다. 눈 다시 뜨자마자 바로 입에 음식물을 손쉽게 집어넣는 게 나의 재능이라면 재능이다.
사다 놓았던 물이 다 떨어져서 소화시킬 겸 마트로. 왜 밤만 되면 바람이 잦아드는지 원. 꼼꼼히 가격 비교하면서 고른 물품들을 계산대에 올리며 직원과 마주하는데 처음 듣는 문장이 출제된다.(사실 바로 전 사람을 통해 눈치를 채긴 했는데 반응이 안 됐다.) 피곤하면 한국어도 더듬거리는 나의 입에서 일본어는커녕 영어도 무소식이다. 큰일이다 싶었는데 세상에. “일본인 아니세요?”라는 말이 들려서 한국인이라고 대답했더니 웃으면서 영어로 말을 건네준다. 이렇게나 고마울 수가. 훗날 분명히 복 받으실 거예요.
궁금해서 소다 맛 아이스바 하나를 사 봤는데 농도가 우리나라 것보다 조금 더 진하다. 왠지 이 마트에 올 때마다 사 먹을 기세다. 저렴한 가격 또한 아주 마음에 든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