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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브 Dec 23. 2022

우리 집 가는 버스를 같이 타는 남자

(4) - 출구도 없다는 순진남의 매력

기다리던 금요일이 왔다. 처음으로 단 둘이 만나는 날이자 처음으로 같이 영화, 첫 데이트(?).


금요일 오후 3시 영화였는데 단장 오빠는 아침 내내 연락이 없었다. 영화표는 이미 예매되어 있으니 약속이 무산될 리는 없었지만 이틀 전 노래방에서 '금요일에 만나요'를 부른 걸로 썸의 서막을 올렸다고 생각했던 나는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도 안 넘어왔단 말이지..?'


정오쯤 연락이 왔고, 우리는 넉넉히 두시쯤 영화관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게 소개팅이라던가 진짜 썸 타는 남녀의 정식 데이트였다면 점심도 같이 먹고 영화 보고 커피 마시고 맥주 한잔 하는 등 어느 정도 따라갈 루틴이 있었을 텐데, 아직 확실히 규정할 수 없는 우리 관계에서는 그저 '영화를 보기로 한 약속'이라는 목적에 집중했던 것 같다. (물론 나는 점심을 같이 먹자는 말이 없어 실망했지만)


영화관은 단장 오빠네 학교 근처에 있어서 시간 맞춰 부랴부랴 버스를 탔다. 영화관 바로 앞 상가에서 오빠를 만났는데, 나는 수업 끝나고 바로 와서 배가 너무 고팠다. 아직 한 시간이 남았으니 같이 뭐라도 먹고 싶은 마음에 오빠한테 물었지만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던 이 인간.


"오빠 배 안고파요? 저 수업 끝나고 바로 와서 영화 보기 전에 뭐 좀 먹었으면 좋겠는데"

"아 나는 오늘 수업 없어서 간단히 뭐 먹고 와서 배는 안 고픈데.. 너 뭐 먹을래?"

"(이 눈치 없는 인간) 아.. 그럼 저 그냥 저기 롯데리아 가서 뭐라도 하나 먹어야겠어요~"

"그래~ 먹고 가자 ㅋㅋ"


롯데리아에 도착했다. 나는 이때까지도 오빠가 아무리 그래도 가볍게 사이드라도 시켜 나랑 같이 먹을 줄 알았다. 그런데 주문대에서 조금 멀찍이 서 나만 바라보던 그. 


"오빠는 뭐 안 시키세요?"

"어 나는 진짜 배가 안 고파서, 너만 시키면 될 것 같아"

"아.. 네~"


그렇게 결국 마주 보고 앉아 나 혼자 버거 하나를 시켜 우걱우걱 먹었다.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을 정말 오랜만에 느껴봤다. 난 이게 어느 정도 데이트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개인플레이를 하게 될 줄도 몰랐고, 아무리 그래도 뭐라도 시켜 도란도란 나눠먹을 줄 알았다. 무엇보다도 나한테 관심이 있었더라면, 내가 본인 근처까지 왔는데 5천 원도 안 하는 버거쯤은 사준다고 하지 않았을까? 너무 남 일처럼 뚱하게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다 떠나서, 이 오빠는 나한테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보여서 그랬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정말 이성을 대함에 있어 순진한 사람이어서 이해는 됐지만 말이다.




킹스맨을 보고 나왔다. 앞선 화에서 밝혔듯 영화를 즐겨 보는 타입이 아니라 영화 내용에 엄청 감명이 깊었다거나 끝나고 영화에 대해 주절주절 하고 싶은 얘기도 딱히 없었다. 좋아하는 남자와 영화를 보는데 어떻게 영화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롯데리아 사건(?) 보다 더 실망스러운 일이 벌어진다.


이틀 전 조모임을 통한 두 번째 만남도 내가 추진하고, 오늘 영화도 내가 보자고 하고, 노래방에 가서 세레나데까지 열창을 했다. 그러니 영화를 보고 저녁 같이 먹자는 말이나 맥주 한 잔 하자는 말 까지는 도저히 내가 하기 싫었다. 그렇게 조금은 머쓱하게 버스정류장으로 함께 걸어가는 길,


'설마 이렇게 보내진 않겠지? 뭐 봉구비어라도 가자고 하겠지..?'


아니? 나만의 착각이었다.


"어 버스 온다~ 저거 타면 되지?"

"(설마.. 설마..) 네.. 저거 타면 되는데.."


버스에 올라탄 나에게 손을 흔들며 밝은 얼굴로 나를 배웅하던 그, 그날은 그렇게 2시에 만나 나 혼자 롯데리아 버거를 먹고, 3시 영화를 보고, 영화관을 나선 지 5분이 채 되지 않아 나는 버스를 타고 귀가했다. 버스에서 생각했다. 아 오빠는 진~짜로 나한테 관심이 없구나? 그냥 접어야겠다..


그 사이 나는 기숙사에서 자취방으로 이사를 했었다. 방에 돌아와 씻고 나왔는데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



- 잘 들어갔어?






마음을 접으려고 할 때마다 단장 오빠는 자꾸 새 희망을 심어줬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좋아하니까 별 것도 아닌 것에 하나하나 의미 부여하며 마음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갈대처럼 움직였다는 편이 더 맞겠지. 아니나 다를까, 오빠는 오늘 영화 재밌었다며 다음 주 개봉하는 영화 <위플래쉬>를 보러 가자고 제안했다. 


- 잘 들어와서 방금 씻고 나왔어요 위플래쉬? 좋아용 (사실 위플래쉬가 뭔지 관심도 없음)


오늘 하루에 조금 마음이 상한 나는 소심한 복수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평소와는 달리 웃음 기호나 이모티콘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딱딱한 말투로 답장을 했다. 


- 그래 그럼 다음 주에 연락할게~~




그 후로 일주일간 우리는 서로에게 연락이 없었다. 사실 사회에 나오고 나서 주변에 소개팅하는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번호를 교환하고 처음 인사를 나누면서 첫 만남 약속을 잡고 나면 그전까지는 일절 서로 연락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대학생 때까지만 해도 소개를 받거나 썸을 탈 때는 매일 수십 통씩 카톡을 주고받는 분위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 나는 오빠가 영화를 보자고 제안한 것에서 나한테 관심이 있나? 생각했다가도 그때까지 내내 연락이 없는 점은 또 의아하고 서운했다.ㅋㅋ 마음이 끌려다녀도 정말 이렇게까지 끌려다닐 수 있나, 여러 가지 생각에 희망과 절망을 오갔던 영겁의 일주일.


일주일이 지나 우리는 다시 만나 위플래쉬를 봤다. 그런데 이번엔 오빠가 맥주 한 잔 하러 가자는 것이 아닌가? 나는 너무 기뻤다. 좋아요! 하고 그를 따라 한 맥주집에 들어가서 가벼운 안주를 곁들여 두어 시간 정도 대화를 나눴다. 이젠 진짜 데이트 같다고 생각했다. 


다 먹고 나와 우리는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갔다. 내 버스가 도착해서 오빠한테 인사를 하고 버스에 올라탔는데 아뿔싸, 지갑이 어디 있더라..? 맥주집에서는 오빠가 계산해서 내 지갑을 꺼낼 일이 없어서 이제야 알았다. 너무 놀라 엇 죄송합니다 기사님, 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왜 그래? 지갑 없어?"

"네 지갑 잃어버렸나 봐요ㅠㅠ 하"

"일단 영화관이랑 맥주집 다시 가 보자"


-


"고객님 죄송한데 저희 쪽에는 들어온 지갑이 없다고 합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


낙담하며 우린 다시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오빠한테 버스비를 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빠, 죄송한데 저 버스비 좀 빌려주세요 다음에 갚을게요.."

"ㅋㅋ응 알았어. 지갑 어떡하냐.."

"뭐.. 카드 정지하고 민증 다시 만들고 해야죠 뭐.."


버스가 도착했다. 그런데 단장 오빠는 나보다 먼저 그 버스에 올라타더니 기사님께 "두 명이요, "하고 카드를 띡 찍고는 나에게 타라고 손짓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단장 오빠는, 지갑이 없는 나와 함께 우리 집 가는 버스를 타고 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는 다시 같은 버스를 타고 유유히 돌아갔다. 






머리모양과 옷에 있어서는 철저히 자기 스타일을 고수하던 단장 오빠는 연애 후 내가 원하는 대로 스타일을 바꿔 주었다.






그때만 느낄 수 있었던 감성의 연애 스토리, 총 15화 분량의 브런치북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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