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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어작 Apr 04. 2022

춤과 나

살사댄스 이야기를 풀기에 앞서

2009년 살사라는 춤을 배우기 시작했으니까 2022년 이면 13년? 12년 쯤 되는 셈이다. 살사 댄스 초급 수업을 들은 사람 중 최종 주기적으로 살사댄스를 즐기는 사람이 되는 확률이 대략 10-20%정도 되는 것 같은데 그 단계를 넘어 십년 넘게 춤추러 다니는 확률이 10-20%정도 되는 것 같으니 아주 흔한 경우는 아닐 수 있겠다. 여러가지 의지와 우연히 겹쳐 살사빠 고인물이 된 나는 내 인생 전반에서 '춤'이 언제부터 어떻게 등장했는지 궁금해졌다. 내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그런 경험이 지금의 나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기 때문에..


1. 어머니 : 전축, 에어로빅

당시 중산층이라면 전축과 엘피판을 갖추곤 했는데, 우리집도 그 중 하나였다. 우리 어머니는 지금도 라디오와 유툽, 종편 채널을 통해 음악을 하루 종일 들으시는 것을 보면 음악에 대한 애정을 좀 남달랐던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 중 조용필 옹의 고추잠자리에 맞춰 우리집 어린이 둘이 방방 뛰며 춤 비슷하게 음악을 즐겼던 장면에 기억에 남는다. 아.......당시의 어머니는 너무 쿨했고 핫했다. 

동생을 낳은 후 모든 주부들이 그렇듯 체중이 는다는 사실에 가족 내외부로부터 압력을 받았고, 당시 유행하는 에어로빅 이라는 것을 배우러 다니셨다. 몇번 나와 동생을 데려가기도 하셨는데, 거울 앞에서 알록달록한 타이즈를 입고 움직이는 여자분들이 너무 멋있었다. 통칭하면 타이즈 이지만, 뜯어보면 '장비빨' 수준이었다. 타이즈 처럼 하의에 입는 것은 발에 고리가 달려 있었고 긴팔 수영복 모양의 윗옷, 그리고 장식적으로 허리띠나 랩 스커트를 두르기도 했다. 여기에 댄스 슈즈라 불리는 덧신과 발목 토시가 있었고, 머리에 땀을 방지하는 헤어밴드와 팔목밴드는 옵션이었다. 조금 번거로우면서도 '전문적'으로 보이는 장비들을 능숙하게 착장하는 모습부터 에어로빅장에 입장하여 일사분란하게 자기 자리를 잡고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는 모습은 요즘으로 치면 슬로우 걸린 스포츠 브랜드의 광고 장면처럼 멋짐을 시전했다.

그리고, 가장 멋진 여왕벌~! 더 퀸의 자태를 뽐내며 강사 선생님이 들어왔고 수많은 수업으로 인해 상시 허스키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 그녀는 에어로빅장 내의 (거기도 아직은) 전축을 열어 음악을 틀었다. 그리고 나느 열살 평생 처음 느끼는 전율을 느꼈다. 두둥~ 집의 음향시설은 소리가 커져 귀를 채운다는 느낌이었는데, 에어로빅장의 음악은 바닥까지 울렸다. 비트가 몸을 때리는 느낌에 완전히 압도된 나는 함께 움직이고 싶다는 간질거리는 마음에도 완전히 얼어붙었던 것 같다. 물론 집에 와서 가슴과 엉덩이를 흔드는 에어로빅의 그 동작을 슬그머니 해보곤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내가 하면 그런 멋짐이 나오지 않았다.(이 때 내 춤 인생이 평생 구차할 것이라는 것을 눈치 챘어야 한다.)

출처: "에어로빅으로 삶의 활력을 찾았어요" 양산신문(2012.02.08)

2. 대학 : 서태지, 락카페, 명월관 / 바위처럼

많은 인문계 학생들이 그렇듯이 중학교 이후 학창시절은 의자에 묶여 지냈다. 있으나 마나 한 체육시간에 중3, 고3 때 체력장을 위해 약간 몸을 썼을 뿐. 평생을 함께 하는 구부정한 자세와 허리병은 어두웠던 청소년기의 증명 같은 것이겠으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최근까지 그 시절의 문제점을 모르고 살았다.

대학에 붙고 나서, 소위 'X세대'에 속하는 나는 당대의 댄스그룹, 서태지, 락카페, 그 중에서도 명월관을 영접(?)했고, 다른 한 축으로 따라나선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는 팔뚝질 외에 모두가 함께 추는 '율동'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락카페는 누구나 '자유롭게' 춤을 즐긴다는 컨셉의 장소였으나 플로어 공간이 없이 테이블 사이에서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크지 않은 동작으로 세련됨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 같다. 이는 지금까지도 클럽가서 춤을 춘다고 해서 열심히 흔들어서 될 일이 아니라는 룰과 관련이 있다. 물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와중 열심히 뛰는 사람이 있긴 한데...그게 나다. 그래서 홍대 앞 '명월관'은 실로 신세계였다. 몸부림도 춤처럼 인정해주는 것(같은 분위기). 실상 서로 뭐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는 나를 찌푸리고 봤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술을 많이 마시고 뛰어다녔기 때문에 그 때의 내 몸짓이 어떠했을지 전혀 기억할 길이 없다.

집회에서 노래에 맞춰 다 함께 팔뚝을 흔드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면 좀 이상하지만 일종의 군무이다. 어떨 때는 분노를, 어떨 때는 세상을 바꾼다는 자긍심을 담아 함께 움직이는 행위이다. 물론 이십대 초반의 젊은이가 한쪽 팔만 제한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 답답할 수 있다. 그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서인지 어떤지 집회가 지루해져 갈 때나 분위기를 끌어올릴 때, 단체 율동이라는 것이 있었다. 처음에 제목이 생각나지 않지만 라인댄스 같은 것이 있었다. 처음에는 라인댄스였던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정신 차리고 보니 '처음처럼', '바위처럼'의 발랄한 노래에 폴짝거리는 율동이 대중화되었다. 대체로 에어콘도 없는 땡볕의 야외에서 뭐가 그리 신났는지 모르겠는데, 단체로 같은 동작을 맞춰서 추다보면 그 무리에 속해서 함께 한다는 감정에 벅차오르곤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면서는 그닥 몸을 쓸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댄스그룹도 시들해지고, 락카페의 시대도 끝났다. 홍대 앞 클럽도 물이 좋은 곳이라면 노땅은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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