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들이란, 우리와 같은 속물이면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지역사회에서 성직자 대우를 받고 싶어 하는 존재들이다.’
-무라카미 류 ‘식스티 나인’ 중 겐-
21년 12월 13일 밤 9시 30분. 류이치 사카모토의 Merry Christmas Mr. Lawrence를 들으며…
1987년 6월 민주 항쟁이 끝나고 3년 뒤 10월 4일 이 몸께서 탄생하셨다.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며 군사정권의 암흑기가 종식된 이 시대는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가는 과도기였다. 하지만 한참 뒤까지 교단의 암흑기는 이어질 예정이었다. 다른 사람의 경우는 몰라도 내 학창 시절만큼은 그랬다.
선생님들과의 일화를 적기 전에 내가 어떤 학생이었던가를 생각해 본다. 나는 초등학교를 포함해 중학교 2학년 때 까진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하지만 숨겨뒀던 나의 잠재력은 중학교 3학년 때 결국 터지고 말았다. 학기 초에 학급 반장을 시작으로 클럽활동 회장과 전체 학생회장이라는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고 전체 2등이라는 쾌거를 1학기 중간고사와 2학기 기말고사 때 각각 한 번씩 달성해 냈다. 중학교를 졸업하며 교육감상 및 교과 우수상 개근상 등. 받을 수 있는 상들은 다 받아냈고 당시 내신점수는 만점에서 딱 2점이 빠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중학교 졸업식날, 우리 부모님 옆에 앉아 계신 동급생의 부모님 중 아버지를 담당하신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상이란 상은 상우가 다 쓸어가는 거 가트요~.”
나의 학창 시절은 퍽 화려했다. 선생님들께선 장학사가 온다면 꼭 내가 속한 학급을 선정해서 이 몸을 그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하셨다. 조금이라도 컨디션이 안 좋다 싶으면 묻지도 않고 조퇴증을 써주셨고 친구들과 다툼이 있을 경우에도 내 입장을 먼저 생각해 주시고 이해해 주시려 하셨다. 시험 기간에는 '우리 상우 얼른 집에 가서 내일 시험 준비해야 한다'라며 청소와 종례도 항상 열외 시켜주셨다. 심지어 중학교 때는 고등학교 진학시험에 필요한 모든 편의를 다 봐주시고 지원할 수 있는 특채는 다 지원해 주셨다면 전부 거짓말이고 오히려 나는 엄청난 미움을 받았다.
조숙한 탓에 하늘 같은 선생님들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에 군말 없이 따르는 그때의 또래들과는 다르게 꼭 한마디씩 허를 찌르는 질문을 던졌고 조금이라도 맘에 들지 않는다 싶으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 연속해서 선생님들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중학교 때는 전체 학생회장이란 놈이 모든 학교 행사에 비협조적이며, 그저 가산점과 내신 점수에 눈이 먼 오롯이 저만 아는 이기적인 놈이었고 머리를 기른다든지, 교복 셔츠를 바지에서 빼내어 입는가 하면 주류인 친구들 사이에는 섞이지도 못하면서 왜소하고 약한 친구들을 괴롭히는 되도 않는 반 날라리 짓을 일삼지만 딱히 성적으로는 깔게 없는 참 어려운 아이였다. 지금부터 하나씩 나의 지긋지긋한 은사님들과의 추억 보따리를 풀어보고자 한다.
어머니께서는 우리 형제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극성이셨다. 선생님들과의 추억을 적는다면서 왜 우리 어머니가 등장하냐고? 가만있어 봐라. 다 이어진다. 극성인 우리 어머니께서는 학교 행사란 행사는 항상 발벗고나서 도맡았으며, 스승의 날에는 누구도 모르게 선생님들의 주머니에 지금 들어도 이름있는 브랜드의 어떤 것들을 쑤셔 넣어 주셨다. 물론, 나도 그 덕을 톡톡히 봤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노년의 담임선생님께서는 말로 하는 가르침 보다 체벌과 폭력이 더 익숙하신 분이셨다. 그 시절 선생 노릇은 나름 편했을 것이라 넘겨짚어본다. 대충 자습시켜놓고 어디 나가서 담배나 한대 태우고 들어와 다 아는 듯 으레 묻는다.
“떠든 놈 나와.”
그럼 겁에 질린 아이들은 말 한마디 밖에 안 했어도 하나 둘 교탁 앞으로 나오기 마련이다. 항상 소지하고 다니시는 전용 막대기로 9살 아이들의 고사리 같은 손바닥을 몇 대씩 줘 패고 나면 자습은 다시 이어진다. 스승의 날, 우리 어머니가 선생님께 보낸 지금 들어도 누구나 알만한, 브랜드의 양말 세트를 선생이란 자식은 손에 넣었다. 그 후에 언젠가 떠든 놈 나오라는 말에 제일 먼저 나가 교탁 앞에서 선생님을 등지고 친구들을 바라보며 서있는 내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넌 들어가.”
영문도 모르고 그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 좋아 자리에 앉은 나는 안도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속 사정을 모르는 다른 친구들의 입장에서 선생님은 개새끼였다. 우리 어머니께선 이 일을 회상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때 엄마가 선생님께 양말세트 드려서 너만 안맞었잖아. 엄마가 늬들한테 그렇게 잘했다."
우리 어머니뿐만 아니라 몇몇의 학부모님들께서도 스승의 날이면 ‘내 새끼 잘 봐주세요.’ 하며 유명 브랜드의 여러 가지 것들을 담임선생님께 전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학부모들이 모여 십시일반 갹출하여 고가의 어떤 것을 전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행위는 촌지가 없어진 그 시절, 하나의 관례인 한편, 내 새끼의 담임선생님을 학부모님들 아래로 감아둘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쥐약 먹은 쥐새끼가 제 앞날 모르고 날뛰다 급사하듯, 학부모님들께서 전달한 유명 브랜드의 여러 가지 것들을 한가득 손에 넣고도 잘못된 선택을 연속한 선생님이 계시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셨는데 이 선생님께선 결과적으로 이듬해 저어기 남쪽 먼 곳으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워낙 문제가 많은 분이셔서 같은반 학무보님들 입살에 교장선생님께서 굉장히 힘들었을 것이라 어머니께선 말씀하신다.
내가 수업 시간에 떠들었는지 어쨌는지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 시간 내내 서있으라는 선생님 말씀에 교실 맨 뒤에 서있게 되었다. 혼자 서있었던 기억이 있으니 아마 떠든 것은 아니리라 추측해 본다. 떠든다는 행위는 ADHD를 앓고 있거나 미치거나 신들리지 않고서야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렇게 서있기를 몇 분 뒤 선생이란 것이 교탁에서부터 뛰어와 나를 세게 밀었다. 교실 뒤쪽에는 여기저기서 기증받은 책들을 꽂아둔 원목으로 된 책장이 있었는데 아무리 선생님께서 여자라고 해도 초등학생 1학년 아이는 그 힘을 유연하게 받아내지 못했고 그대로 책장 쪽으로 날아가 부딪혔다. 그리고 무너져 내린 책들과 엎어진 책장 사이에 처박혀 파묻혔다.
나를 덮고 있는 책 사이로 선생님의 화난 얼굴이 올려다 보였다. 짓누르는 책장과 책의 무게에 쉽게 일어나지 못하고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선생님의 얼굴을 올려보던, 물안개 낀 것처럼 흐릿한 시야가 아직도 생생하다. 선생님께서 나를 밀친 이유? 가만히 서있지 못하고 움직였다는 것. 아무리 초등학생 1학년이어도 아, 하늘 같으신 선생님께서 하사하신 벌을 받는데 다리가 아파도 꿈쩍하면 안 되지. 암, 그렇고말고. 복싱을 배운 지 1년이 됐다. 헤드기어를 착용했더라도 후두부는 때리지 않게 되어있다. 스파링 할 때 간혹 실수로 후두부 타격이 나왔을 때는 코치님들이 이유를 불문하고 잠시 게임을 정지 시킨다.
초등학교 1학년인 나는 원목 책장으로 후두부를 가격 당할 뻔했다. 아니지. 내가 후두부로 원목 책상을 가격할 뻔했다고 말하는 것이 맞겠다. 어린 나이에 사지 마비될 뻔한 것을 신이 도왔다. 당시 나는 어린 맘에 어머니께 혼날까 봐 이 일을 말씀드리지 못했고 어머니께서는 이 일을 다른 학부모님으로부터 전해 들으셨다고 한다. 이 일을 전해 듣고 어떤 기분이셨냐는 나의 물음에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하… 미친년이었어. 그 양반이 참 독했고 인성도 못됐었어. 화가 나서 어떻게 할 수가 없더라고. 그래도 어떻게 해. 선생님인데 참아야지. 엄마가…”
이 당시 교단의 분위기를 여실히 드러내는 말이지 않을 수 없다.
편부모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있었다. 당시 분위기는 편부모 가정이라는 사실이 또래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금기시되었다. 아직 배움이 부족해 미숙한 아이들에겐 아주 좋은 놀림거리가 그리고 따돌림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 짐작한다. 그렇기에 각 학급의 담임선생님들께서도 그런 사실을 새어나가지 않게 주의하셨으며, 혹시나 학부모님들께서 그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암묵적인 동의하에 절대 아이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했었다.
지금도 명절에 고향에 내려가면 가끔 만나는 친구 녀석이 그랬다. 어떤 사연인지는 지금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녀석은 아버지와 친할머니 손에 자랐다. 선생님께선 발설이 금기시되는 이 사실을 학급에서 공개적으로 발설하셨다. 이제 막 8살 된 녀석이 떠들었다는 이유로 녀석을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놓고‘ 어머님이 하늘에서 너를 보며 얼마나 힘들어하시겠어? 너 부끄럽지 않니?’ 따위의 말들을 서슴지 않았다.
기어이 눈물이 터진 녀석은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했다. 펴놓은 교과서를 녀석의 볼과 턱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떨어져 적셔놓았다. 아, 콧물도. 콧물도 같이 적셨다. 그런 상황에도 나는 ‘좀 더러운데…’라고 어린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모든 친구들이 이 사건을 계기로 녀석의 어머니가 안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됐고 다른 반 친구들에게도 그리고 그들의 학부모님들께도 이 소식이 퍼지기 까지는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다. 물론 나도 학교가 끝나고 이 사건을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녀석을 집으로 한번 데려오라는 말씀과 함께 이렇게 말씀하셨다.
“친구가 어머니가 안 계시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야. 절대 그런 걸로 따돌리지 말고 감싸줘야 해.”
어머니 말씀을 따르고자 그랬다기보다는 학년의 짱을 담당하고 있던 녀석이 무서워 놀릴 수 없었다. 여담이지만, 녀석은 그때 내게서 뺏어간 오백 원짜리 지우개를 아직도 돌려주지 않았다. 내년 3월. 그러니까 2022년 3월 녀석이 결혼을 한다. 그때 결혼식에 참석해 돌려받을 생각이다. 안 준다면 축의금을 안내는 것도 돌려받는 방법이 될 수 있겠다. 90년대 후반 화폐가치와 지금의 인플레이션을 고려한다면 녀석이 가져간 내 지우개는 축의금에 상응하는 가치일 테니.
이 사건 후에 녀석은 가끔 우리 집에 놀러와 식사를 해결하곤 했다. 다른 친구들과 이 녀석이 같이 놀러 오는 날에는 어머니께서 특식처럼 라면을 끓여주곤 하셨는데, 다른 친구들이 라면을 먹을 때 이 녀석 앞에 밥 한 공기와 반찬을 따로 차려 두시곤 녀석이 그것을 다 먹고 나서야 라면을 먹을 수 있게 하셨다.
"맘이 자꾸 쓰여서 밥이라도 한 술 더 먹일려고 그랬어. 네 엄마 참 과했어. 그치?'' 라며 어머니는 멋쩍게 웃으셨다.
같은 해 여름방학 숙제인 가족신문을 얼마나 잘했던지 표창장을 받게 됐다. 아침 조회시간에 교장선생님께서 수상자를 일일이 호명하셨는데 내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생애 처음으로 상장을 받게 된 것이다. 조회 때는 교장선생님께서 호명만 하시고 상장은 각자 교실에서 담임선생님께서 대리 수여하는 식이었는데 조회가 끝나고 화장실을 들렸다 교실에 가보니 상장이 덩그러니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인생 처음으로 받아보는 상장이 그런 식으로 수여됐다. 그때 당시에는 이 상장 수여가 잘못됐다는 것을 몰랐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와서 가방에서 꼬깃꼬깃한 상장을 꺼내자 어머니는 남들 앞에서 첫 상장을 받으니 기분이 어떻더냐고 물으셨다. 나는 말했다.
“몰라? 화장실 갔다 오니까 책상 위에 있었어.”
이제껏 잘 참아오신 어머니는 폭발하셨다. 폭력과 폭언에 관해 여러 일들이 있었더래도 ‘선생님이니까 참아야지.’ 하시던 어머니께서 아들의 교육적인 측면에서 발생한 문제는 참지 않으셨다. 다음날 어머니께선 교무실이 아닌, 교장선생님을 찾으셨다. 교장실에서 어머니는 교장선생님과 마주 앉아 물으셨다.
“선생님 상장은 왜 받는 거예요?”
분명 어머니의 질문은 그동안 교장선생님께서 학부모님들께 받아온 그것과는 조금 달랐으리라 생각한다.
“다른 아이들의 본보기가 되라고 칭찬하기 위해 수여합니다.”
당황한 교장선생님께서 뻔하지만 올바른 답변을 하셨다.
"그죠? 본보기가 되라고 주는 거지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표창을 받으시는데 상장이 그냥 선생님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면 교장선생님께선 기분이 어떠시겠어요?”
교장선생님은 아무 말씀 없으셨다고 한다.
“아이가 상장을 받아와서 제가 기분이 어땠냐고 물으니까, 화장실 들렸다 왔더니 책상 위에 있더래요 상장이.”
어머니는 말씀을 이어가셨다.
“상장이라는 의미가 여러 사람들 앞에서 본보기가 되라고 주는 것이라 하셨는데 어떻게 아이가 상장을 책상에서 집어가지고 올 수가 있을까요? 다른 아이들 앞에서 수여돼야 하는 것 아닌가요? 우리 아이 담임선생님께서 바쁘셔서 그러셨는지는 몰라도 조금 그렇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두 분의 면담은 길지 않았다. 어머니께선 이 사건을 계기로 담임선생님이 저어기 남쪽의 시골마을로 전근을 가게 되셨다고 말씀하시지만, 아마도 담임선생님 때문에 교장실과 교무실을 찾은 학부모님은 우리 어머니만이 아니리라 짐작해 본다. 상장 사건을 전후로 일어났던 사건들이 분명 교장선생님을 포함해 다른 선생님들의 귀에도 들렸을 것이고 선생님들께서는 학부모님들을 설득하든 담임선생님을 문책하든 일어난 사건들을 최대한 덮고 덮으려 하셨을 것이다. 가재는 게 편이니까. 그러나 사건들이 쌓이고 쌓여 선생님들 선에서 덮어줄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그런 결정이 내려졌으리라 생각한다.
학년이 하나씩 올라가며 많은 은사님들을 만났다. 남학생을 제외한 조숙한 여학생들을 얼마나 참 사랑으로 대하셨는지 과감한 스킨십도 서슴지 않은 분이 계셨는가 하면, 초등학생만 한 키가 콤플렉스였는지 예쁜 여선생님들 앞에서 덩치 좋은 남학생을 두드려 패가며 속된 말로 자신의 가오를 세우는 혼기를 한참 놓친 선생님도 계셨다. 체벌이랍시고 손톱으로 여기저기를 꼬집어 아이들의 얼굴과 몸에 영구적인 상처를 남기시는 선생님, 가정 형편이 불우한 학생을 타깃으로 삼아 폭력으로 화풀이하는 선생님 등 참된 교육을 고집하신 은사님들로부터 평생에 잊지 못할 가르침을 받았다.
2002년 대한민국은 한, 일 월드컵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무리 지었고 차차 월드컵의 흥분과 열기가 다 식어갈 무렵 겨울방학이 시작됐다. 긴 겨울방학 중 초등학교 졸업식을 얼마 앞두고 내가 진학할 중학교 배정 명단이 공개됐다. 그날은 눈발이 거세게 날리고 있었다. 어른들이 직장이며 모임이며 각자 다른 이유로 외출 한 시각, 아이들만 남은 95년도에 완공된 아파트는 고요했다. 13층 복도에는 세월을 맞아 녹이 슬어버린 알루미늄 창틀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 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그때 날이 흐린 탓에 대낮임에도 켜놓은 불빛이 새어 나오는 어느 집 창문에서 이제 변성기가 시작된 소년의 쾌재가 울려 퍼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