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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란 이름의 빌런 : 중학교

by 상우

내 동네 병천은 순대가 유명한 조그만 동네다. ‘두 갈래로 흐르는 냇물이 아우르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아우내라는 순우리말 지역명을 일제강점기 때 왜놈들이 아우를 병, 내 천자를 써 한자이름으로 바꿔놓았다고 한다.


한 학년 전교생이 100명도 안되는 조그만 동네에 아이러니하게도 두 곳의 중학교가 있었다. 한 곳은 사립이자 교육이란 핑계로 학생들에게 도가 지나친 폭력을 허용하는 교육방침이 유명한 중학교였고 다른 한 곳은 이런저런 문제가 많은 공립 고등학교의 부속 중학교였다. 지역사회에 이 고등학교 하면 항상 언급되는 소문이 있었다. 신입생들이 입학해 10개의 반으로 학기가 시작됐다면 남자들은 일하러, 여자들은 애 낳으러 가서 5개 정도의 반만이 졸업식에 참석한다는 소문이었다.


이런 고등학교가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공립중학교로 진학을 원했던 이유는 옆집에 살고 있던 친척 형 누나들이 이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기 때문에 소문이 사실이 아니었음을 앎과 동시에 매일 마주치는 폭력 교사보다는 가끔 마주치는 무서운 고등학생 형, 누나들이 나을 것이란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람 소리만 가득하던 눈 발 날리던 그날, 93년도에 완공된 아파트의 13층 복도에는 변성기에 막 들어선 소년의 쾌재가 울려 퍼졌다.


태권 v에 나오는 카프 박사를 닮은 양 선생님께서는 도덕을 가르치셨다. 바짝 마른, 독사 같은 역삼각형 얼굴에 작고 날카로운 눈과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매부리코를 보고 있자면 '거 사람 참 꼰꼰 하겠네.' 하는 인상을 심어주는 분이셨다.


1학년 1학기 중간고사가 끝나고 며칠 뒤, 양 선생님의 수업 시간이 됐다. 시험 기간이 끝나고 1주일 만에 뵙는 양 선생님께서는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전원 책상 위에 올라가 무릎 꿇으라고 말씀하셨다. 짐작건대 ‘누군가 도둑질 같은 사고를 쳤구나.’ 싶어 책상 위로 올라가 무릎을 꿇었다. 일반적인 시나리오 대로라면 선생님께서는 우리들의 눈을 감게 하고 말씀하실 테다.


"누구 지갑이 없어졌다. 선생님 정말 실망이야. 그런데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 거야. 가져간 사람, 선생님만 알 거니까, 조용히 손들어."


이노센트하고 퓨어한 아이들은 책상 위에서 무릎 꿇었더래도 겁을 먹지는 않는다. 눈 감고 딴생각이나 조금 하다보면 몇 분 지나서 상황은 종료될 것임을 알고있다. 물 흐르듯 뻔한 시나리오였다. 그러나 상황은 시나리오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양 선생님은 짝다리를 짚고 교탁에 기대어 옅게 미소를 띠고, 들고 오신 a4용지를 들여다보고 계셨다. 너무 말라서 미소를 띤 볼 가죽이 세 겹으로 접혔다. 접힌 볼 가죽이 생선의 아가미 같다고 생각했다.


"늬들은 이게 공부를 해서 친 시험이냐? 한심하다. 한심해."


이어지는 대사가 조금 이상했다. 시나리오에 없는 잘못된 대사를 뱉으신 양 선생님께서는 앞자리에 앉은 학생부터 도덕 시험 점수를 읊으시며 틀린 문제 수만큼 허벅지를 전용 막대기로 때리기 시작하셨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뿔싸. 내가 무려 중학생이 되었음이 비로소 실감 됐다. 양 선생님께서는 바짝 말라 깊게 팬 볼살이, 아니, 볼 가죽이 떨릴 정도로 우리들의 허벅지를 매섭게 후드려 패셨다. 성장통이었다. 그런데 조금 지나친 성장통이었다. 한번 맞고 나면 며칠 동안 걸을 때마다 허벅지가 아팠다.


양 선생님께서는 매번 시험이 끝나면 ‘이 새끼들은 줘 패지 않으면 말을 쳐 듣지를 않아.’ 따위의 말을 내뱉으며 틀린 문제 수만큼 학생들의 허벅지 또는 엉덩이를 때리셨다. 그중 선생님의 기대에 못 미친 학생들은 타작 수가 가중처벌되었고 나는 다행스럽게도 선생님의 기대를 받지 못하는 학생이었기에 딱 틀린 문제 수만큼만 맞았다. 어머니께서는 ‘그럴 때는 가중처벌을 받는 게 좋은 거여.이새꺄.’라는 말씀을 하셨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는 것을 매로서 상기시켜주시던 양 선생님이셨다. 그러나 이렇게 학생의 본분을 강조하시던 양 선생님께서 '음주 선생'이란 별명을 얻게 된 일이 있었는데, 한여름 도덕 수업에 조금 늦게 들어오신 양 선생님의 상태가 이상했다. 양 선생님의 정체성인 커다란 매부리코는 빨갛고 전 수업 때 어디까지 진도를 나갔는지도 몰랐으며, 교과서의 페이지를 찾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이미 맛탱이가 갔는지 안경 뒤 눈알은 어디를 보는지도 모르겠고 내 옆을 지나갈 때는 꼬릿꼬릿한 이상한 냄새가 풍겼다. 당시 음주 경험이 없었던 나는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었지만 다음날 백숙 집 딸내미인 같은 반 친구에게서 어제 양 선생님이 왜 그 모양이었는지 듣게 됐다.


“어제 점심에 양 선생님 우리 집에서 술 먹었대.”


복날이었는지… 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날 양 선생님께서는 급식이 아닌 백숙으로 점심을 대체하셨고 친구의 부모님께서는 우리 딸 가르치는 선생님께서 식사하러 오셨다며 이런저런 서비스를 드리다 집에서 담근 인삼주까지 권하게 됐다고 한다. 양 선생님께서는 못 이기시는 척 ‘한 잔만, 아니 딱 두 잔까지만.’ 하시던 것이 어느새 만취에 이르렀고 그 상태로 수업에 들어오신 것이었다. 학생의 본분은 존나게 따져가며 틀린 문제 수만큼 학생들을 후드려 패시던 양반이 선생의 본분은 한잔 술에 털어 넘겼다.


학교에 두 분의 백 선생님이 계셨다. 한 분은 중학교 1학년과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시자, 국어를 가르치시던 백 선생님이시고 한 분은 체육을 가르치시던 백 선생님이셨다. 두 분 다 나를 싫어했지만, 체육을 담당하시던 ‘우리 백 선생님'께서 유난히 나를 싫어하셨다.


나는 중학교 3학년이 되어 전체 학생회장에 당선되었다. 시골에 있는 공립 중학교 학생회장 선거도 딱 그 수준이었다. 으레 그러하듯 나도 '제가 당선이 된다면 전교에 햄버거를 돌리겠습니다.' 따위의 공약을 걸었다. 여선생님들께서 주신 ‘네가 남자니까 여학생들 표를 가져오려면 여자를 부회장 후보로 데리고 나가야 해.’라는 팁을 참고해 3학년 여학생들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여학생 실세를 3학년 부회장 후보로 그리고 2학년의 인기 많은 남학생 한 명을 2학년 부회장 후보로 영입해 출마했다. 그리고 1학년엔 친동생이 재학 중이었고 친동생은 1학년 사이에서 나름대로 나를 밀어주고 있었다.


결과는 뻔했다. 1학년 동생 반에서는 몰표가 나왔고 2학년과 3학년 득표 수도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당선이 된 후 어느 날 어머니께서는 햄버거와 콜라가 잔뜩 실린 카니발을 끌고 학교로 찾아오셨다. 이 모든 광경을 체육을 담당하시는 원칙 주의의 표본, 정직 그 자체, 백 선생님께서는 아니 꼽게 보고 계셨다.


백 선생님께서는 나름의 법칙을 갖고 계셨다. 어떤 옷을 입으시던 항상 배바지를 하셨고 같은 운동화를 신으셨으며 검정 벨트를 착용하셨다. 항상 스포츠머리를 하고 다니셨는데 중학교 3년 내내 단 한 번도 이분의 옆 머리가 덥수룩해진 것을 본 적이 없다. 자신의 헤어스타일을 학생들에게도 교칙이란 명목으로 강요하시던 분이셨는데 이분께서는 자신의 헤어스타일을 '깡똥한 스포쓰' 머리라고 정의하셨다. 학생 부장이 되시자마자 아마도 흔히 교칙이라 일컫는, 학생 생활규정을 정독했으리라. 중학교 1,2 학년 때는 아니, 우리의 한참 선배들까지도 문제가 되지 않던 사항들이 점점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여느 학교 점심시간이 그렇듯 4교시가 끝나자마자 급식실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날은 운이 좋았는지 선두에서 달리고 있었는데 급식실 입구에 백 선생님께서 서 계셨다. 1등으로 달리던 나는 달리기를 멈추고 백 선생님을 마주했다. 달려오던 아이들도 자연스레 내 뒤에 줄을 서게 됐다. 백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남자들 교복 샤쓰 바지 안에 넣어라.”


줄을 선 학생들은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멀뚱히 서있기만 했다. 그동안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고 문제라고도 생각하지 않던 사안이 문제가 되자 인지 부조화에 빠진 것 이리라. 그중 몇몇이 백 선생님 말씀을 이해하고 우물쭈물 교복 셔츠를 바지 안에 넣기 시작했고 모두가 바지 안에 셔츠를 넣자 선생님께선 말씀을 이으셨다.


“야 학생회장. 교칙에 샤쓰 빼고 입어도 된다는 말 있냐?”


제일 앞에 서있는 내게 선생님이 물었다. 생각하는 시늉을 하려고 조금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는데요?”


“학생회장인 네가 그걸 모르면 다른 친구들은 뭘 보고 따라 하냐?"


내게 가볍게 면박을 주고 말씀을 이었다.


"교칙에 교복 샤쓰에 대한 얘기가 아직 없으니까 교직원 회의해서 결정할 때까지 다 넣어 입고 다녀라.”


교칙에 교복 셔츠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없다. 그러니 특별한 지시가 있기 전까지 백 선생님의 배바지 스타일이 디폴트가 되어야 한다. 교복을 입는 것은 학생이다. 그러나 교복을 어떻게 입을지는 선생님들이 교직원 회의에서 정한다. 학생들은 발언권이 없다. 학생들이 투표라는 민주적인 절차로 뽑아 놓은 학생회장도 회의에 참석 아니, 참관조차 못한다. 이런 권위적인 모습이 이해가 안 됐다. 자기들 입맛에 맞춰 학생들로 하여금 보고 싶은 모습만 보겠다는 그 심보가 재수 없었다. 괘씸했다.


뭣보다 셔츠를 교복 바지 안에 넣은 그 모습이 그 시절에는 너무 촌스럽게 보였다. 지금이야 미니멀이니, 턱인이니 하며 셔츠 따위를 바지에 넣어 입었지만 그때는 그저 배바지일 뿐이었다. 급식실에 들어가 배식을 받고 자리에 앉자마자 우리 모두는 수저를 들기 전에 바지에서 셔츠부터 빼냈다.


내 머리는 아주 연한 갈색을 띤다. 평소에는 그냥 검정 머리인듯하다가도 햇빛이 비치면 연한 갈색을 띤다는 것을 알게 된 계기가 있다. 하루는 점심을 먹고 자판기 앞에서 친구들과 노닥거리고 있었는데 지나가시던 백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너 염색했냐?"


물음에 당당하게 '아니요.'라고 답하는 내 말을 무시하고 선생님께서는 다시 물으셨다.


"너는 학생회장이라는 놈이 머리 색이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냐?"


무슨 말씀인지도 모르겠고 백 선생님께서 괜히 물고 늘어지는 것도 짜증 나고 그냥 이 상황을 빨리 끝내고 싶어 죄송하다고 답하는 내게 다시 백 선생님께서는 말을 이었다.


"죄송한 건 죄송한 거고 너 어떻게 해야 되겠냐? 너 교칙에 염색이 된다고 돼있냐?"


교칙이고 뭐고 염색을 한 적도 없는데 타고난 머리색을 나무라는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됐다. 몇 번이고 죄송하다고 하는 것이 이 상황을 가장 빨리 모면하는 것이라 판단했던 나와 다르게 백 선생님께서는 아마도 듣고 싶은 대답이 있으셨으리라. '일단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고 보자. 되는 대로 지껄여 놓고 나중에 추궁하면 무시하자.'라는 생각으로 시선을 땅으로 떨군 채 대답했다.


"검정으로 염색할게요."


만족한다는 듯 '크흠...' 하시며 자리를 떠나시는 백 선생님 뒤통수에 먹고 있던 레모네이드 캔을 던지고 싶었다. 백 선생님이 나를 나무란 이 상황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교칙에 염색 금지라고 되어 있다면서, 타고난 머리가 갈색이니 검정으로 염색하라는 백 선생님의 엄청난 논리가 너무나 엄청나 그저 범인인 나란 놈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날 저녁 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어머니께 이 일을 말씀드렸다. 선생님 말씀이라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시던 우리 어머니께서도 이날은 머리를 슬쩍 보시곤 '아이 괜찮어~'라고 말씀하시며 넘어가셨다.


그 후에도 몇 번인가 백 선생님께서는 나를 불러 물으셨다.


"너 지난번에 머리 까맣게 염색한다고 하지 않았냐?"


"죄송합니다."


"언제까지 할 수 있냐? 하고 검사받으러 와."


"다음 주까지 할게요."


물론 단 한 번도 검사받으러 가지 않았다. 그 후로 마주칠 때마다 몇 번 더 지켜지지 않을 약속을 하고 끝까지 머리를 검정으로 덮지 않자 백 선생님께서는 더 이상 말이 없었고 이 일로 나는 내 머리가 햇빛을 받으면 연갈색으로 빛이 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교내에서 우리 학년 중 누군가 흡연을 하다 선생님께 걸린 사건이 있었다. 전교생이 100명도 안되는 시골 학교에서 우리 친구들 중 누군가 흡연을 했다는 사실은 학교 측에서도 그랬겠지만 학생들 사이에서도 굉장히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어린 나는 흡연자 = 무서운 사람, 양아치, 날라리.라는 공식을 맘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랬던 내가 하루 한 값을 태우는 골초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아무튼 이 사건 때문에 학교에서는 급하게 금연 캠페인을 시작했고 캠페인의 일환으로 어느 토요일 교내 금연 글짓기 대회를 개최했다.


대회라고 해봐야 학교에서 수업 대신 글짓기를 하고 순위를 매겨 수상하는 것이 전부였다. 수업이야 듣기 싫으면 자거나 딴짓하면 그만이지만 4시간 동안 무엇인가를 계속해야 한다는 것을 맘에 들어 하지 않는 학생들도 있었다.


당시에도 나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행위가 아니었고 2교시가 끝남과 동시에 내 글짓기도 끝났다. 다른 학생들보다 빠르게 글짓기를 끝내고 아직 글짓기를 다 끝내지 못한 하지만 글짓기에 흥미가 없던 짝꿍과 시간이나 때우며 노닥거리는 내가 3교시 감독관으로 들어와 계신 우리 백 선생님께서는 영 맘에 들지 않으셨나 보다. 내 옆자리를 지나며 빼곡한 원고지를 집어 들어 내가 써놓은 글을 찬찬히 읽어보시던 백 선생님께서 내 책상에 다시 원고지를 ‘툭.’ 던지듯 놓으셨다.


“이거 베낀 거 아니고 네가 쓴 거냐?”


특유의 추궁 하듯 ‘냐?’로 끝내는 말투가 이날따라 유난히 거슬렸다.


“네.”


짧게 대답하는 내게 백 선생님께서는 다시 물으셨다.


“확실히 네가 쓴 거 맞냐? 인터넷에서 베낀 거 옮겨 적은 거 아니고?”


“네.”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대답하는 15살 꼬마의 눈을 똑바로 내려다보시던 선생님께서는 별말씀 없이 교탁으로 걸음을 옮기셨다. 아, 사실 똑바로 내려다보시지는 않으셨다. 우리 백 선생님께서는 말씀 중에 한곳을 응시하지 못하고 눈을 느리게 '꾸움뻑' 하는 틱이 있었다. 똑바로 내려다보실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 거짓말할 뻔했다.


아무튼 당시로 돌아가서, 떠들었다는 잘못에 대한 추궁이 없는 걸로 봐서 이번엔 ‘내가 이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돌이켜 생각해 보니 백 선생님과 있었던 어떤 일보다 제일 화가 나고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일이 이 일이다.


어린 나이였지만 능력을 의심당한 것이 이렇게까지 두고두고 화가 날 줄은 그때는 몰랐다. 여담이지만 나는 이때 쓴 글로 은상을 수상했다. 사실 금상을 기대했건만, 내 손에 쥐어진 상은 은상이었다. 이때 금상을 수상한 친구는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와 글짓기로 두각을 나타내던 친구였다. 현재는 방송작가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언젠가 풍문으로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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