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가을 중부지방 여행 이야기
영화 ‘엽기적인 그녀’는 2000년에 개봉됐다.
전지현과 차태현이 주연으로 나왔던 그 영화는 당시에 특히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넘어서 매우 큰 화제를 낳았으며, 전지현에게는 말 그대로 ‘엽기적인 그녀’라는 별명이 불었다. 이 영화는 리얼리즘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사랑의 감정을 자극할 만한 코믹한 멜로드라마 영화다.
영화에서 전지현과 차태현이 2년 후에 다시 만나서 열어보자며 ‘타임캡슐’을 묻어두는 곳이 나온다. 그곳은 영화감독인 곽재용이 기차를 타고 가다가 산 위에 소나무 딱 한 그루만 서 있는 풍경을 기억해 두었다가 일부러 촬영지로 선택했다는 일화가 있다.
영화가 과거와 미래로 오가면서 시간 여행을 하는 가운데 두 연인은 운명처럼 헤어졌다가 맺어진다. 첫사랑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감정에 젖어 살갑게 보면 감동할 만큼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지만,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너무 작위적이라서 하품이라도 나올 만한 멜로 판타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비록 헤어지지만 나중에 다시 만나자는 약속은 설레지만 얼마나 아쉽고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인가. 그들은 결국 운명적으로 맺어진 사랑에 도달하는데, 거기서 곽재용 감독은 이런 명대사를 전해준다.
“운명이란 말이야. 노력하는 사람한테는 우연이란 다리를 놓아주는 거야.”
일반적으로 운명은 개인의 의지와 노력과 계획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노력하는 사람이 가는 길에 아주 우연스러운 상황과 조건과 사건으로 접목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순환논법처럼 운명=노력=우연이라는 묘한 아이디어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참신해 보이지만 자기모순적이다. 그러나 뭔가 멋있게 들리기는 한다.
“운명은 노력하는 자에게 우연으로 다가온다.”
아무튼, 영화에서 전지현과 차태현이 나중에 열어보자며 타임캡슐을 묻는 그 장소가 바로 강원도 정선에 있다. 정선군은 그 영화 촬영지를 공원으로 조성했다.
이름하여 ‘타임캡슐 공원’.
2.
이 공원은 해발 850미터 지점에 있다. 그곳으로 올라가는 길을 ‘엽기적인 소나무 길’이라고 하는데, 길이가 5킬로미터 정도에 이른다. 산으로 올라가는 절벽길이라 운전하기엔 약간 무서운 곳이다. 도로가 좁아서 반대쪽에서 차가 내려온다면 어떻게 피해야 할지 난감한 곳이기도 하다. 비탈진 절벽 도로에서 자동차가 뒤로 물러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올라가면서 다행히 그런 위기를 맞지 않았다. 사실 딱 한 번 반대쪽에서 내려오는 자동차를 만났지만 그렇게 좁은 곳이 아니었다.
우리가 자동차를 타고 ‘타임캡슐 공원’으로 올라가고 있을 때 중년의 여성 세 명이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등산복을 입고 배낭까지 메고 과감하게 산길을 걸어서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언제 어디서부터 저렇게 배낭을 메고 걸어왔는지 의아했다. 아무튼 이렇게 가파른 산길을 걷는 것을 보니, 참으로 용감무쌍하고 건강한 사람들임에 틀림없었다. 나라면 결코 엄두낼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이 엽기적인 소나무 길에 들어서기 전에 느꼈지만 이 산길은 도시나 읍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산으로 올라오기 전에 어디엔가 자동차를 주차했다고 추측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상상이다. 산 위에 넓은 주차장이 있는데 굳이 그렇게 할 리가 없다. 그들이 올라오는 엽기적인 소나무 길은 매우 가팔라서 걷기에 힘들고 시간도 무척 오래 걸리는 일이었는데도 그들은 태연히 대화하면서 걷고 있었다.
3.
타임캡슐 공원은 산 정상에 있다.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나는 경이로운 풍경을 먼저 보았다. 산 위에 고랭지 배추밭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고랭지 배추밭을 TV나 인터넷 화면으로 본 적은 있지만 내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산 위에 그처럼 광활한 농지가 있는 것도 신기했고, 그 넓은 밭에서 자라는 수많은 배추들을 보는 것도 신기했다.
위로는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시월의 하늘이었고, 아래로는 초록의 향연이 펼쳐져 있었다. 그 시원하고 상큼한 풍경은 정말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다. 오로지 그렇게 맑은 가을날, 그곳에 가야만 볼 수 있다. 산 정상 아래에 있는 주차장에 도착하기 전부터 우리는 배추밭을 보면서 반했다.
꽤 넓은 주차장에는 거의 아무도 없었다. 그곳에서 잠시 사진을 찍은 후 우리는 다시 가파른 데크길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올라가는 길에 바라보니 우주선처럼 생긴 카페가 산 중턱에 보였다. 거기에 앉아서 바깥 풍경을 내다보면서 커피를 마시면 근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우리 남자 넷은 그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이미 아침 식사 후에 마시던 커피가 차 안에 있었던 것이다.
산 위에는 넓은 평지가 있었고 거기에 정말로 잎이 싱싱하고 푸른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 소나무 주변에는, 영화의 주인공들이 그랬던 것처럼, 관광객들이 타임캡슐을 묻을 수 있도록 시설을 갖춰 놓았다.
타임캡슐을 묻는 것은 유료 서비스다. 조금 전에 말한 언덕 위 카페에서 그 서비스를 살 수 있다. 묻어 두는 기간에 따라 가격에 차이가 난다. 타임캡슐을 묻는 기간은 100일부터 3년까지다. 그런데 타임캡슐을 대여하는 것도 있고 구매하는 것도 있어서 가격 차이가 크다.
당신도 어릴 때는 그런 상상을 했었을 것이다.
타임캡슐을 묻는 것 말이다.
또는 유리병에 편지를 담고 바다에 띄우는 것도.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그것이 연인이든, 친구든 상관없다!) “우리 3년 후에 열어 보자”라고 할 메시지를 담아 두는 것. 또는 받을지 안 받을지도 모르는 연인이나 친구에게 또는 가족에게 편지를 유리병에 넣어 바다에 띄우는 것.
나는 그런 상상만 했지, 실제로 해본 적은 없다.
그러나 여전히 아름다운 상상이다.
우리가 공원을 둘러보고 나서 내려올 때 아까 산 위로 걸어서 올라오던 여인 세 명은 어느새 공원 입구 가까이 다가서고 있었다. 우리가 공원을 돌아보는 사이에 그들은 계속 그 절벽길을 걸어 올라왔던 것이다.
아, 대한민국 아줌마의 힘!
걷기와 등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힘이 깊이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2llF6u_H7Cs
Niccolo Paganini - "Cantabile" by Esther Abra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