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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천문화마을 한 할머니의 인생

부산에서 한 달 살기 10월 29일 (2)

by memory 최호인

2. 아미동에 사는 윤 할머니 이야기


감천 문화마을 축제 거리는 그리 길지 않았다.

산 위에 지어진 마을의 길은 자연의 결을 따라 휘어져 있었다. 중간중간에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포토존들이 있었는데, 날이 좋아서 그런지 많은 관광객이 포토존마다 모여들었으며 건너편 언덕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나 역시 틈틈이 사진을 찍으면서 천천히 걸었는데 30분 정도 만에 고개 정상을 넘어서 내리막길로 가기 시작했다. 투명하게 맑은 날이라, 언덕 아래 저 멀리 감천항이 뚜렷하게 보였다. 감천항 앞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했다.


골목 축제 거리의 끝에 이른 듯 더 이상 축제 장식물은 없었으며, 이후로는 경사가 심한 내리막길이 보였다. 축제가 벌어지는 언덕길 바로 아래에 집들이 있어서, 언덕 난간에 서면 바로 아래 있는 지붕과 마당과 창문들이 잘 보였다. 혹시라도 그곳으로 걷다가 떨어지지 않도록 언덕길 옆에는 쇠로 만든 난간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출발지로 돌아갈까 아니면 조금 더 내려갈까 고민이 됐다. 그때 언덕 위 도로 난간에서 두 할머니가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옆으로 가서 섰다. 그들의 대화를 잠시 들어보니 마을 주민인 듯했다.


알고 보니, 그들은 감천 마을이 있는 언덕 너머에 있는 아미동에 살고 있었다. 감천동에서 축제를 한다고 해서 산보 삼아 왔다고 했다. 할머니들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가 서 있는 언덕에서 골짜기 건너편에 있는 언덕까지는 감천이고, 그 언덕 너머부터는 아미동이다. 감천은 사하구에, 아미동은 서구에 속한다.


두 할머니 중 나는 85세인 윤00 할머니로부터 나는 우연히 그녀의 인생 이야기를 듣게 됐다.

그 이야기가 흥미로워서 여기에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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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할머니는 원래 대구가 고향이지만 16세에 부산으로 왔다. 한동안 부산에서 살다가 그녀는 8년 정도만 타지로 가서 살고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으며, 이후에는 줄곧 아미동에서 살았다. 대구를 떠난 것은 그녀가 어린 소녀였을 때였고 한국전쟁이 막 시작된 시기였다. 국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는 바람에 윤 할머니가 살았던 마을에도 매우 자주 총성이 울렸다. 이따금 총알이 머리 위로 지나가곤 했으므로, 그때는 할머니는 총소리가 무서웠다.


윤 할머니는 8남매 중 한 명으로 자랐지만 당신은 딸 하나만 두었다. 그렇게 함께 자라던 8남매 중 두 사람이 먼저 돌아가셨다. 그녀의 남편도 2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녀의 남편은 폐차된 자동차와 버스의 부품을 떼어내어 되파는 사업을 했었는데, 사업이 잘 돼서 한창 때는 점포가 세 개로 불어났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와 딸을 부산에 두고 사업을 위해 인천 등지로 나가서 살았다. 그러다가 군산 출신 여인과 눈이 맞아서 살림을 차렸고 그 둘 사이에서 아들까지 낳았다.


남편은 한동안 두 집 살림을 했다. 그는 나중에 부산으로 돌아온 후에도 군산 여인과 아들이 잘 살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돈을 보냈다. 그 와중에 윤 할머니는 갖은 고생을 하면서 살았다. 과거에는 감천동과 아미동에 건축 공사가 많았으므로 할머니는 공사판에서 막일을 하고 살았다.


과거에는 감천의 두 언덕 사이 골짜기로 맑은 물이 흘러내렸다. 윤 할머니는 언덕 아래로 물을 길어 갔으며, 독에 담아 머리에 이고 가파른 길을 올라와야 했다. 그 물로 밥도 짓고 빨래도 하고 씻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이 언덕에는 집들이 얼마 없었다. 그렇다 해도 민둥산 길은 지금처럼 시멘트로 바른 길이 아니었고, 계단이 잘 만들어져 있지도 않아서 툭하면 미끄러지는 흙길이었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북한군이 물밀 듯 내려오면서 수많은 피난민이 부산의 산비탈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공장에 다니고 먹을 것을 구걸하면서 겨우겨우 고단한 삶을 이어갔다. 여름에는 참을 만했지만 겨울은 혹독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여기저기서 땔감을 찾아서 아궁이에 태우면서 겨울을 났다. 나중에는 다행히 연탄이 배달되기 시작하면서 아궁이에 연탄을 태워 추위를 견디어냈다고 한다. (나는 그 옛날을 생각할 때마다 그들이 매서운 겨울 추위를 어찌 참아냈을까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매일 가파른 언덕을 오르내리면서 그 모진 세월을 어떻게 견디면서 살았는지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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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산과 바다 사이에 난 비좁은 땅에 들어선 도시라, 주택들의 다수는 산비탈에 만들어졌는데, 감천은 특히 비탈이 심해 보였다. 1호선 지하철 역에서 감천으로 오는 길만 해도 산비탈을 올라오는 것이므로 꼬불꼬불하고 가파르다. 버스는 그런 도로를 질주했는데, 그런 길에 익숙하지 않은 나 같은 승객은 흔들리는 버스에서 몸을 가누기도 어려웠고 멀미를 느낄 지경이었다.


그 길을 오가는 마을버스 요금은 1600원이다.

“노인들에게는 무료 아닙니까?”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교통비가 무료라는 말을 들었던 나는 윤 할머니에게 물었다.

“그건 지하철이고, 마을버스는 돈을 내야 하능기라.”


생선을 사러 자갈치시장까지 다녀오려면 그렇게 버스 요금을 내야 한다고 윤 할머니는 말했다. 그런 교통비도 만만치 않다고 할머니는 푸념했다. 나를 만나서 갑자기 둑 터진 듯 옛날 일을 더듬어 말하는 할머니의 얼굴에는 주름이 많아서 지나간 삶의 고단함이 잔뜩 묻어났다.


윤 할머니가 나에게 한 많은 인생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녀의 친구는 한동안 난간을 잡고 언덕 위로 조금씩 올라가더니, 윤 할머니의 말이 너무 길어지니까 어느새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런데 할머니, 친구분이 먼저 가셨나 봐요.”

“기다리다 지쳐서 먼저 갔나 보네.”라고 할머니는 낮게 말했을 뿐 신경 쓰지 않은 듯했다. 가봐야 집이지, 어디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말만 그렇게 했지, 할머니는 자신도 가야겠다고 이내 떠나려고 했다.


할머니가 떠나기 전에 나는 서둘러 물었다.

“여기서 송도로 가려면 저 산을 넘어가야 하나요?”


감천문화마을에서 비교적 가까운 송도해수욕장으로 갈 계획은 세운 나는 핸드폰에서 지도를 보면서 할머니에게 말했다. 감천항과 송도 사이에 산이 보였다. 송동해수욕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 산을 돌아가야 하는 듯했다. 나는 왔던 길로 되돌아가서 버스를 타야 하는지, 아니면 다른 길이 있는지 궁금했다.


할머니는 손을 들어 바닷가 항구 쪽을 가리키면서 저 언덕 아래로 그냥 쭉 내려가서 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고 대답했다. 감천항 쪽으로 가서 버스를 타라는 것이다. 카카오맵을 보니, 송도해수욕장까지 버스를 타면 20여 분이고, 걸으면 한 시간 정도로 나왔다. 나는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네 알겠습니다. 날도 좋으니까 천천히 걸어갈게요. 할머니 건강하세요. 말씀 고맙습니다.”


예전에 비해 참 살기 좋아졌다고 말하는 할머니가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기를 바라면서 나는 언덕 아래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수십 년간 이 가파른 언덕을 오갔던 할머니와 수많은 마을 사람들의 고단한 삶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전해지는 듯했다. 언덕 위에도 아래에도 낡은 주택들이 촘촘하게 붙어 있었고, 그 주택들 사이로 아주 좁은 골목이 계단이나 비탈과 함께 이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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