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한 달 살기 10월 27일 금 아침에는 맑았다가 오후에는 흐림
1. 계획대로 되지 않는 날
오늘이 그런 날이다.
계획한 대로 되지 않은 날.
부산에 온 후 날이 계속 맑았으므로 약간 걱정이 될 정도였다.
쉬는 날 없이 계속 여행하면서 걸어 다니느라고 누적된 피로가 풀리지 않았으므로.
그러다 보니, 자꾸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게 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오늘은 하늘이 아침에만 맑았다가 이른 오후부터 흐려졌다. 게다가 바람이 약간 심하게 불었다. 부산에도 가을이 점차 깊어지나 보다. 부산보다 다소 추운 서울에는 이미 가을이 다가왔다고 한다. 그러나 부산의 나무들은 아직 거의 다 푸르기만 하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올 때는 10월이 끝나는 시점까지 단풍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비록 내가 살고 있는 미국의 북동부가 세계적으로 단풍이 아름다운 곳이라 한국에서 단풍 구경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해도, 조금 아쉽기는 하다. 그간 한여름에만 한국을 방문했으므로 이번에는 한국에서 가을 단풍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올해 한국에 단풍이 늦게 오기도 했지만 예년보다 아름답지 않다는 뉴스를 듣고 나는 이미 단풍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오늘은 원래 해운대해수욕장에서 송정역에 이르는 ‘욜로갈맷길’ 3코스 (5킬로미터 정도)를 걷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몸이 무겁고 바람이 강하게 불며 기온도 떨어진 듯해서 마음까지 쓸쓸했다. 그래도 온종일 방에 있기는 답답해서 오후 늦게 지하철로 송정역까지 가기로 했다. 가능하면 오늘도 ‘걷기’를 하기 위해서.
그런데 서면에서 송정역까지는 가는 길은 간단하지 않았다. 서면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송정까지 갈 수는 없었다. 지하철 2호선은 장산역에서 끝나는데, 거기서 송정해수욕장까지는 꽤 먼 거리다. 나는 동해선 부전역으로 가서 동해선 경전철을 타야 했다.
숙소에서 10분 정도면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동해선 부전역은 지하철 부전역과 다른 곳이라는 것을 서면역 위에 있는 부전역에 가서야 알았다. 나는 지하철 1호선 부전역에서 길거리로 나가서 조금 헤맨 끝에 동해선 부전역에 도착했다. 경전철은 지하철만큼 자주 다니지 않아서 나는 또 한동안 기다려야 했다.
더욱 난감하다고 느낀 것은 경전철의 송정역 위치다. 나는 송정해수욕장으로 가고 싶었는데, 경전철의 송정역은 송정해수욕장에서 1.3킬로미터를 걸어가야 했다. 열차 안에서 나는 내적으로 갈등했다. 오늘 계획했던 걷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경전철을 타고 가면서 카카오맵을 골똘히 보다가 나는 엉뚱하게 송정해수욕장 대신 ‘해운대달맞이길’을 떠올렸다. 이미 오후가 늦었으므로 차라리 달밤에 그곳에서 걷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갑자기 ‘해운대달맞이길’로 목적지를 바꾼 후, 나는 송정역 바로 전에 있는 신해운대역에서 내렸다. 거기서 달맞이길까지 곧바로 가는 버스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신해운대역에서 내린 후 카카오맵을 살펴보니, 가는 길이 복잡했다. 걷기에는 40분 넘게 소요됐고, 버스를 타려고 해도 기다리는 시간까지 합하면 비슷한 시간이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해운대역 앞 도로에 서서 나는 문득 내가 이방인과 같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밝은 오후인데도 걸어 다니는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는 한적하기 그지없는 거리였다. 이곳이 서울이 아니구나,라고 다시 깨닫는 순간이었다. 차도에 자동차들이 다니기는 했지만, 썰렁해 보이기까지 하는 보도에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빨리 결정할 수 없었다.
갑자기 길을 잃었다는 느낌도 들었다. 애초에 오늘 아침부터 무엇을 할 것인지 충분히 계획하고 나온 것이 아님을 후회했다. 중간에 결정을 바꾸었는데 새로운 결정마저 이행하기 쉽지 않아서 마치 벽에 부딪힌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된 것은 결국 나의 심신이 피곤한 상황이라, 판단력과 기동력이 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서부터 누적된 피로가 풀릴 새도 없이, 부산에 온 후에도 두 주 가깝게 연일 돌아다닌 결과이다. 한 달 살기라면 더러 차분하게 쉬기도 해야 하는데, 나는 계속 어딘가를 찾아가고 걸었던 것이다. 문득 그냥 숙소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힘없이 서면역에 도착한 후 버거킹으로 가서 샌드위치로 저녁을 때웠다. 11월 초까지 서면에서 주말마다 ‘빛의 축제’가 열리고 있기 때문인지, 차도 건너편에서 밴드음악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이끌려 나는 차도를 건넜다. 거리 하나를 막아놓고 작은 콘서트가 27일부터 29일까지 열리고 있었다. 공연장에 도착했을 때 마침 DAY BREAK라는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한참 듣다 보니, 오늘은 그만 노래하는 날이고, 내일과 모레는 다른 가수가 노래한다고 했다. 길가에 서서 잠시 듣고 돌아오려고 했던 나는 어느새 그의 공연을 다 보고 말았다. 노래를 대여섯 곡이나 들었으며 이미 40분이나 흘렀다.
오늘은 그래도 음악 공연이라도 보았구나,라고 느낌을 가지고, 뿔뿔이 흩어지는 관객들을 따라 차도를 건넜다. 숙소로 가기 전에 나는 다시 서면시장으로 가서 내일 아침 식사를 위해 찐빵과 야채고로께를 샀다. 내일은 그간 미뤄두었던 범어사를 찾아가야겠다고 다짐하면서.
2. 갈맷길과 욜로갈맷길과 해파랑길
갈맷길은 부산광역시를 걸어서 둘러볼 수 있는 둘레길이다.
부산의 상징인 갈매기를 둘레길 이름에 접목한 것이다. 갈맷길은 2022년 말 현재 총 9코스 21구간으로 구성됐으며, 총길이는 278.8킬로미터에 이른다. 21개 구간은 해안길 6곳, 강변길 3곳, 숲길 8곳, 도심길 4곳으로 만들어졌으며, 길가에 갈맷길을 표시한 리본과 안내판을 찾아가면서 걷도록 되어 있다.
이 가운데 주로 해안길을 걷기로 계획한 나는 이미 오륙도에서 해운대까지 2코스, 18.3킬로미터를 걸었다. 친구 Y가 왔을 때는 영도 끝 태종대부터 영도 해안을 따라 걸었으며, 영도다리를 건너서 자갈치시장과 남포동 족발골목까지 찾아갔다. 그것은 갈맷길 3코스와 4코스의 일부 구간을 합한 길이다. (그날 우리는 3만2천 보를 걸었다고 이미 밝혔다.)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했지만, 오늘 내가 걸으려고 했던 곳은 갈맷길 1코스(해운대~임랑해수욕장, 33.6킬로미터)에 포함된 한 구간이었다. (오늘은 비록 포기했지만, 나는 결국 나중에 이 욜로갈맷길을 걷게 된다.)
욜로갈맷길은 기존 갈맷길 가운데 대중교통으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10개 구간을 새로 선정한 둘레길이다. 갈맷길을 모두 걷기는 너무 길고 오래 걸리므로, 부산을 찾는 여행객들에게, 말하자면, 집약적으로 단축된 둘레길을 소개한 것이다. ‘욜로(YOLO)’는 ‘You Only Live Once’의 약자다.
욜로갈맷길은 총연장 100킬로미터이고, 각 구간은 4시간 내로 걸을 수 있도록 구성됐다. 굳이 욜로갈맷길 전 구간을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한 나는 주로 해안길을 따라서 걷는 욜로갈맷길을 선택했다.
욜로갈맷길을 걷다 보면 해파랑길 표식도 자주 보게 된다.
해파랑길은 총 10개 구간 50개 코스에 이르는 동해안 둘레길이다. 오륙도해맞이공원에서 시작하여 강원도 거진항을 거쳐 통일안보공원에 이르며, 총연장은 750킬로미터에 이른다. 해파랑이란, 말 그대로 ‘해’와 바다를 표시하는 ‘파랑’의 합성어다. 다른 의미에서는, ‘태양과 푸른 바다를 보면서 걷는 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루기에는 조금 힘든 희망사항일지 모르지만…
나는 언젠가는 해파랑길뿐 아니라, 남해랑길과 서파랑길까지 모두 걸을 계획이다.
한국을 사랑하고, 걷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꿔야 할 꿈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