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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보다 '누구와'가 더 중요하다

부산에서 한 달 살기

by memory 최호인

10월 24일. 친구 Y가 부산에 온 지 두 번째 날

(친구 Y가 부산으로 온 후 이틀째 밤에 그가 자는 동안 쓴 글이다. 그가 왔기 때문에 그를 생각해서 썼다기보다 내가 평소에 여행을 다니면서 생각했던 바다.)


1.


친구 Y는 아침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다.

그는 웬만하면 아침마다 산책을 나간다. 그 습관은 부산에 와서도 이어졌다. 늦잠꾸러기인 내가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 그는 조용히 일어나서 부스럭거리더니 금세 밖으로 나갔다. 핸드폰을 보니 아침 7시였다. 얼마 후에 돌아오면서 뜨거운 커피를 들고 온 그는 산보 삼아 부전시장에 다녀왔다고 했다. 부전시장에서 활기찬 농산물 새벽시장을 둘러보고 아침 먹을거리로 떡과 튀김까지 사들고 왔다.


여행할 때 늘 계획을 철저하게 세워서 계획대로 실행하는 습관을 가진 그는 이번 부산 방문에도 이틀간 무엇을 할 것인지 미리 계획을 세우고 왔다. 내가 하는 것처럼, 대충 오늘 어디 어디로 다녀온다는 정도로 계획을 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 이틀 여정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는 거의 시간별로 계획을 세우고 온 듯했다. 또는 적어도 이틀간 어디로 걸어가서 어느 식당에서 식사해야겠다는 정도는 짜고 온 듯했다. 아마도 과거에 자신이 걷고 나서 식사했던 식당을 기억하고 하는 것이겠지만.


지난 초여름에도 그는 남파랑길을 걷기 위해 부산을 방문했었다. 남파랑길도 이미 절반 이상 걸었다는 그는 걷기를 좋아한 나머지, 전국의 주요 둘레길을 모두 걷고 싶은 욕심이 있어 보인다. 현재 한국에서는 둘레길 건설이 하도 유행이라, 어쩌면 그처럼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걷는 속도보다 둘레길이 만들어지는 속도가 더 빠를지도 모른다. 자고 나면 어딘가에는 또 둘레길이 만들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금세 유명해지기 시작한다.


아무튼 천주교인인 그는 지난 수년간 소위 ‘성지 순례길’을 꽤 자세히 탐방했다. 둘레길과 마찬가지로, 한국에는 수도자를 위한 순례길도 지난 수십 년간 급속히 증가했다. 조선은 천주교 성직자가 아니라, 평신도들이 주도하여 기독교를 전파하기 시작한 독특한 나라다. 18세기말부터 시작된 조선 천주교 전파의 역사, 그리고 그들에 대한 조선 정부의 간헐적 탄압으로 인해 한국에는 초기 전도자와 순교자들이 꽤 많다. 천주교는 그들의 역사를 기리는 순례길을 열심히 조성하고 있다. 친구 Y는 지난 수년간 그는 그 순례길을 거의 다 다녔다고 한다.


이렇듯 이미 충분한 여행 및 걷기 경험과 세심한 여행 계획을 가진 그가 부산으로 왔으므로 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 없이 그를 따라다니기로 했다. 그는 부산에도 수차례 방문하여 많이 걸었으므로, 부산에 관해서도 나보다 많이 알고 있었다.



2.


사람의 성격마다 차이가 있지만, 여행할 때는 출발에 앞서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 철저히 계획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고, 그런 계획 없이 무작정 떠나서 부닥치는 대로 대응하면서 여행하는 사람도 있다. ‘계획파’와 ‘무작정파’로 나누어진다는 말이다.


둘 가운데 꼭 어떤 것이 더 좋다고 말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여행의 이유와 기간과 과정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사람 또는 사람들의 성격도 중요하다. 다만, 사람마다 여행에 관한 성격 차이가 있다 해도 모든 여행에서 일괄적으로 같은 행위를 하기는 어렵다. 여행은 혼자 갈 때도 있고 여럿이 갈 때도 있고, 목적을 가지고 갈 때도 있고, 그런 것이 없이 갈 때도 있다. 계속 장소를 옮기면서 하는 여행도 있고, 그냥 한 곳에 푹 쉬러 가는 여행도 있다.


그러니, 자신의 상황에 따라, 그때의 분위기에 따라, 또 장소와 시간에 따라, 먼저 계획을 세워야 할 때도 있고 계획 없이 가도 되는 곳이 있다. 나아가, 누구든지 항상 같은 방식으로만 여행을 하는 것은 아니다. 평소에는 꼼꼼히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 어떤 경우에는 아무 계획도 없이 여행을 떠날 수도 있는 것이다.


여행의 계획 여부에 상관없이 인솔자를 따라다니는 사람도 있다. 여럿이 가면 꼭 누군가는 미리 계획을 세워서 그룹을 인도하고 다니기 마련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웬만하면 인솔자가 하자는 대로 따라다닌다. 아이디어를 첨가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때도 있지만 보통 인솔자가 다 알아서 한다. 그렇게 인솔자나 안내자를 따라다니면 여행에 관해 미리 머리를 쓸 필요가 없어서 편하다. 대체로 분위기만 맞춰주면서 인솔자와 다른 사람들이 하자는 대로 따라가고, 가끔 자신이 필요한 것, 가고 싶은 곳 또는 보고 싶은 곳, 그리고 먹고 싶은 것을 말하면 된다.


훌륭한 인솔자라면 자신을 따라오는 친구들을 위해 기꺼이 그들이 원하는 바를 여행 계획에 반영하곤 한다. 때에 따라 계획에서 어긋난다는 이유로 해줄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그런 이유를 친구들에게 설명해 주면 된다. 인솔자가 계획한 대로 하지 않으면 여행이 엉망이 될 경우에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서로 간에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을 때는 작은 일에서부터 틀어지기 시작한다. 무엇을 먹을까 결정하는 데서, 어디로 가서 무엇을 보고 어디에서 얼마나 시간을 보내야 하는 데서, 어디에서 숙소를 잡고 어떻게 잠자리를 배정하는가를 결정하는 데서 등등. 갈등은 작고 다양한 데서 시작되고 발전한다.


여행하다 보면 예상치 않게 의견이 맞지 않을 때가 많다. 서로 사이가 좋지 않거나 서로 비슷하게 적극적이거나 공격적인 기질이 있는 사람들은 그럴 때 잘 부딪힌다. 작은 갈등은 점차 큰 갈등으로 번져서 여행은 엉망이 되기도 하고, 중간에 깨지기도 한다.


그러니, 그것이 여행은 어디로 가는가 보다 누구와 가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아직 여행을 많이 다니지 않은 사람은 ‘어디로’ 가느냐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겠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서 사람들 간의 갈등관계를 잘 이해하고 여행 경험도 풍부한 사람이라면 금세 그런 말을 이해할 것이다. 항상 어디로 여행 가느냐면서 목적지를 중요시하기는 하지만, 또 왜 가려고 하는지 이유를 알고자 하기도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누구와 함께 가느냐이다.


흔히 여행의 목적지와 여행 이유가 더 중요하다면서 그것이 대의이고 그것을 위해서 서로 참고 지내자고 말하기도 하지만, 결국 여행 후까지 생각해 보면 누구와 함께 여행했느냐가 가장 중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좋고 유명한 곳을 다녀왔다 해도 결국 그곳에 누구와 함께 다녀왔는가에 따라 남기고 싶은 추억인지 잊고 싶은 추억인지 판가름 나기 마련이다.


사랑하는 연인이나 단란한 가족이나 좋은 친구들과 다녀왔다면 두고두고 그 여행을 다시 생각하고 그런 여행 기회를 그리워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해도, 함께 갔던 사람과 불행한 기억을 가지게 된다면 그 여행에 관해서 추억하기도 싫고 입에 올리기도 싫고 그곳에서 찍은 사진도 보기 싫어지는 법이다.


여행에서 ‘사람 관계’는 그렇게 중요하다. 그래서 그런 어려움을 아는 사람은, 즉 타인과의 관계를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예 여행을 혼자서 가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하기도 한다.


그러니, 다시 말하지만, 여행 가기 전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누구와 함께 가느냐 하는 것이다.


3.


아무튼 Y는 드물게 여행을 함께 가고 싶은 친구다.

여행을 할 때 Y와 같은 친구가 없다면, 나도 거의 주도적으로 미리 계획을 하는 편이지만, 나보다 그는 더욱 계획적이고 실천적이고 자신이 세운 계획에 엄격한 편이다. 그럴 때 나는 차라리 여행의 주도권을 그에게 주고 그가 하자는 대로 따라 하는 것이 훨씬 편하고 좋다. 그것은 나만 좋은 것이 아니라, 그 역시 자신의 계획대로 내가 잘 따라주어서 좋을 수 있다.


나는 내가 계획하고 다니는 것보다 이렇게 좋은 인솔자를 만나서 따라다니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 복잡하게 계획하지 않아도 되므로 그야말로 마음 편하게 여행할 수 있다. 물론 Y가 무리해서 여행을 추진한다면 나는 이의를 제기하겠지만, 그는 다행히 으레 여행에 자주 수반되는 ‘도전’을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지나친 ‘무리’를 피할 수 있을 만큼 현명하게 여행을 추진한다. 그는 그와 나의 상태를 출발 전에 미리, 또 여행 중에도 중간중간 재차 파악 점검하고, 그에 맞춰서 여행 계획을 추진할 수 있는 친구다.

항상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런 친구를 옆에 두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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