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제의 이별
형이자 친구이자 때로는 엄마고, 또 때로는 아빠 같기도 했던 형이 기숙사로 가고 다음 날부터 시온이는 학교 생활 중에는 활달하게 잘 지내다가 집에 오면 이내 힘이 빠지고 입맛도 잃고 급기야 미열이 나기 시작했다.
자기 몸의 컨디션이 이상한 걸 느꼈는지 체온계를 꺼내 두 귀로 체온을 재어 보더니 왼쪽은 37.5도, 오른쪽은 37.8도란다. 시온이의 장난기는 이때도 발동을 해서 배꼽은 괜찮은지 살펴본다. 다행히 배꼽 온도는 괜찮다며 미소를 짓기도 했다. 시온이는 밤새 열이 식는지 땀을 흘리면서도 깨지 않고 푹 자고 일어났다. 아침이 되면 컨디션은 또 정상에 가까웠다. 학교에서 가서도 신나게 지내다 온 이야기를 늘어놓았으니, 어딘가 아픈 건 아닌 듯했다. 그런데 오후에 귀가를 하면 미열이 났다. 이렇게 3일을 보냈다.
평소에 어디가 아프면 비교적 정확하게 그 느낌을 말하던 아이인데, 괜찮다고 말하지만 괜찮지 않은 얄궂은 상황이었다. 시온이의 모습을 보면서 꼭 짝사랑하던 소녀를 떠나보내고 상심한 마음에 몸져누워 버린 어린 소년의 모습이 떠오를 정도였다. 각별했던 형제애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 사이, 형인 시안이는 낯선 기숙사 생활에 적응하느라 분주한 한 주를 보낸 것 같았다. 세 아이 중에 유독 예민해서 잠자리가 바뀌면 잠을 잘 못 자고, 대변은 꼭 집에서 보고, 공기 온도에도 알레르기 증상으로 코가 막히는 유별난 아들이다. 일주일 만에 시안이를 보니, 엄마가 보기에는 좀 퍼석해 보였지만 시안이는 3일간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불편했지만 그 후로는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형을 떠나보낸 막내 시온이는 3일간 미열 증상을 보이며 형의 빈자리로 인한 변화에 적응해 나갔고, 시안이는 엄마의 살뜰한 돌봄이 있는 집을 떠나 적응하느라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사느라 바빴다.
# 엄마의 처음보다 나은 두 번째 이별
우리 부부가 선택한 대안학교는 중학교부터는 기숙사 생활을 하기 때문에 아이와의 이별은 시안이가 두 번째다.
시온이가 미열과 싸우고, 시안이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동안 엄마인 나도 허전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시안이를 보낸 적적한 마음이 첫째 나빈이를 보내고서 느꼈던 마음을 불러왔다.
몇 년 전에 육아하며 일하기 가장 좋은 엄마의 직업 1위로 교수가 나왔다는 설문조사를 본 적이 있다. 그 기사를 봤을 때 나는 너무 바쁜 일정들을 소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1년 6개월을 되돌아보니, 그때 본 기사처럼 시간의 자율성이 다른 직업보다 허용되기에 내 직업이 엄마로서 참 좋은 직업인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아이들과 시작해서 아이들과 끝나고, 아이들이 학교 간 시간 동안만 일에 최선을 다해도 충분히 내게 주어진 역할들을 소화할 수 있었다.
엄마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었던 시간. 1년 6개월.
지금 생각해 보니 '충분한 엄마'로 처음 살아본 1년 6개월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하는 엄마로서 나는 '충분한 엄마'이기보다 '최소'와 '적절'의 사이 어딘가를 내 삶의 좌표로 알고 살아온 것 같다.
아이 셋을 지금껏 키우면서 일을 하며 밤을 새운 기억은 있지만 아픈 아이를 애타게 살피며 밤을 새운 기억은 없다. 약을 먹이고 아이가 자면 나도 지쳐서 잠이 들었다. 충분히 합리적으로 육아와 일을 병행했다. 하지만 내 마음에 아이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실감하며 엄마로 살아보지는 못했다.
시안이가 기숙사에 들어가고, 두 번째 이별을 하고서야 나는 지난 15년 세 아이를 낳고, 키우며 내가 어떤 엄마였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내 삶과 자녀, 일과 양육 등등 '나'를 요구하는 모두에게 균형감을 잃지 않고 감싸 안으며 살아내기 위해, 그 어느 것에도 '진한' 몰입이나 향기를 느껴보지 못한 것 같다. 특히, 토닥이는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함에, 늘 사랑한다고 말해 주지만 엄마가 정말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게 체온으로 다가가 주지 못함에 미련과 미안함이 몰려왔다.
그래도 지난 1년 6개월이 있었기에, 적어도 이제 막 엄마 품을 살포시 떠난 시안이는 엄마의 살뜰한 보살핌이 어떤 느낌인지 조금을 알고 떠나가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럴 거라는 안도감이 있다. 따뜻한 온기를 섬세하게 느껴가며 아이들 키운다는 것이 어떤 감동인지, 시안이가 없을 때 시안이와의 교감을 다시금 꺼내올 수 있었다.
# 어설펐던 첫 번째 이별
마음은 또 다른 마음을 부른다. 보드라운 성품의 시안이가 떠난 자리에서 첫째 나빈이를 기숙사로 떠나보내던 때의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때의 마음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비장함"이었다. 자식을 키우는데 비장한 마음은 의외로 자주 생긴다. 심지어 필요할 때도 많았다.
첫 아이가 딸이고, 둘째, 셋째가 아들이다 보니 딸 키우는 것과 아들 키우는 것은 아주 다르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딸아이들은 아들보다 언어기능이 상대적으로 좋다 보니 소통도 잘 되고 엄마로서 좀 수월함을 느낀다. 그런 딸을 키우다 아들을 키우면 전자식 육아시스템에서 기계식 육아시스템으로 돌연 변경해야 하는 과업을 수행하는 듯, 난감할 때가 하나 둘이 아니다. 이렇게까지 가르쳐야 하나? 한 번 말하면 되던 일이 말로는 안 되는 답답한 일들이 많은 것이 딸 키우는 엄마가 아들 키울 때 겪는 일이다.
첫째 나빈이를 기숙사 보낼 때는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어렴풋한 믿음에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위한 이별이니 괜찮다는 생각이 내 비장함의 실체였다. 하지만 아이를 떨어뜨리고 다시 볼 3주 동안, 나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이제나 저제나 무슨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비장함으로 시작했지만 와르르 무너지는 경험. 첫 이별은 그렇게 어설펐다.
비장함으로 떠나보낸 나빈이 가 기숙사 생활에 적응해 가면서 아이는 나름의 자기 삶의 궤도 내에서 안정감을 찾은 듯했지만, 한 달마다 귀가 때가 되면 내 딸 같지 않은 어색함으로 1박 2일을 보내야 남은 1박 2일은 온전한 엄마와 딸의 관계로 회복이 되어 있었다.
처음은 언제나 미숙하다. 나를 처음 엄마라고 불러주고 엄마의 역할을 선물한 딸을 비장하게 떠나보낸 만큼, 아이도 정말 제대로 각오하고 떠남을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빈이가 엄마의 품을 떠난 생활에 안착하니 불편해지는 건 엄마인 내 마음이었다. 내가 딸에게 전해 준 그 비장한 마음이 딸에게 닿아 부메랑처럼 다시 내게도 돌아오는 것 같았다. 엄마도 처음이고, 자식과의 이별도 처음이고, 처음이라 그런지 모든 것이 내 마음 같지 않게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 엄마는 아직도 더 성숙하기 위해 이별 연습 중!
중학생이 되어 기숙학교에 보내는 것이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부모의 지대한 사랑의 그늘에서 떠나 있게 한다는 이유로 의아한 선택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먼저, 전제할 것은 청소년기는 독립과 의존 사이에서, 어른과 아이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가는 시기인 것이지 부모를 향한 반항, 세상을 향한 저항이 허용되는 시기는 아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어야 할 시기는 청소년기 이전에도 충분했다. 오히려 기숙사 생활은 어설픈 독립 흉내내기가 아니라 실랄한 독립생활에 맞닥뜨리는 것이다. 모든 에너지가 실제로 자신의 생활을 책임지는 것에 사용되기 때문에 어쭙잖은 반항이나 저항의 에너지로 전환될 여력이 우리 아이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다.
아이들이 그렇게 독립에 필요한 책임을 배워 가는 동안, 부모는 나의 살점과 같은 애지중지하던 대상이 비로소 타자임을 배워가는 것 같다. 인간은 언제든 독립과 의존의 문제를 이상하게 얽히게 만들어서 관계의 온전함을 망치는 재주를 발휘할 수 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사랑하되 적절한 때에 이별할 수 있고, 헤어졌다가도 반갑게 재회할 수 있는 마음을 챙길 수 있다. 자녀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둘째를 보내며 나는 첫째를 품에서 내어놓으며 느끼지 못했던 애석함과 빈자리의 적적함을 알게 되었다. 어설펐던 첫 번째 이별 앞에 비장하게 돌아서서 이내 전전긍긍하던 미숙함에 비하면 엄마인 나도 그 사이 성숙한 것이다.
인간발달단계에서 중년기를 자녀진수기라고 부른다. 새들이 둥지 안에서 자녀를 품고 키우다가 새끼들이 떠나 둥지가 비는 것과 같은 허전함을 경험한다고 해서 빈둥지증후군이 그 시기의 특징이다. 특히, 엄마인 여성에게는 이 시기에 호르몬의 변화가 겹쳐지면서 자녀가 떠나면서 헛헛한 마음에 우울증을 경험할 수도 있는 시기라고 한다. 그래서 사실 부모에게 자식을 품에서 놓는다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인생과업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키우는 게 힘들지만, 의젓하게 자라 자기 삶을 살 때가 되면 들인 사랑과 공이 아쉬운 것인지 떠나보내는 것이 쉽지 않다.
사랑도 이별만큼이나 값진 교훈을 준다. 어설픈 첫째와의 이별, 조금을 절절한 둘째와의 이별이 있었다면 막내 시온이와 다음 이별은 또 어떨까? 더 성숙한 이별을 위해 오늘 더 살뜰히 사랑해 주기로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