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리만투어에 온 사엘은 모래 위에 앉아 잠시 바
다를 바라본다. 어릴때 부터 와서 앉아 있었던 이 곳은
늘 조용 하다. 친구들과 함께 모여 있었던 때가 생각이
난다. 그들도 그런 생각이 나서 그런지, 여람이도 그렇
게 바쁘면서도, 시간이 될때 마다 찾아와, 아무말 없이
같이 앉아 있거나, 잔소리를 늘어 놓기도 한다. 수아랑
밧세도 가끔 와서, 모닥불을 피우고 같이 앉아, 사엘은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거나, 밧세가 가져온 도시락
을 먹을때도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카야는 어딘가 근
처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사엘은 매향초를 입에 물려다, 여람의 잔소리가 생각
나, 그냥 내려놓는다. 매향초가 이제는 환각을 일으키
는 정도를 넘어, 몸에 독처럼 퍼져, 그녀의 몸의 여러
장기들을 아프게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몸이 아픈 것
정도는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몸이 아플 때 마
음이 아픈 것이 덜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녀는 요즘 경전을 읽거나, 기도하는 시간도 점점 줄
어들고 있고, 한 달에 한번 정도, 경전의 신을 위한 의
식을 하기 위해, 신전에 가, 마음 없는 공허한 의식을
드린다. 그 외의 의식은 그동안 그녀가 가르쳤던 학생
제사장들과 사환들이 신전을 돌보고 있다. 순결과, 고
귀함을 가져야 하는 제사장의 직분으로 환각에 취해
있는 것이 아버지 요 처럼 침상을 더럽힌 죄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이러면 안된다는 것을 안다. 그리
고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냈지만, 그녀가 감당해야
하는 일, 해 내 가야 하는 일들을 해야 하는 것도 알지
만, 그녀는 몸도 마음도 일으켜 세울 수가 없다. 마치
죽지 못해 살고 있어, 숨조차 쉬는 것도 버겁게 느껴진
다.
한참을 바다를 바라보던 그녀는 환각 없이 리만투어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오랜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
다.
파도가 밀려오다가 솟구치더니 정지하고 다시 밀려오
다가 솟구치더니 정지한다.
사엘은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바다를 다시 보지만, 똑
같다. 그녀는 그녀가 너무 오랫동안 환각에 취해 이제
는 헛것도 보이나 라고 생각하는데, 밀려오는 파도 사
이로 사람의 형체 같은 것이 보이면서 정지하다가 다
시 파도에 부서져 없어지기를 반복한다. 그전에는 바
다 위로 추억의 장면들이 보였지만 형체가 보이는 건
처음이다.
사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바다로 걸어가 형체
에게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바다로 더 멀리 들어간다.
이를 보고 카야가 달려오지만, 이미 사엘은 바다 한가
운데로 들어 가 있다. 이곳, 이 바다도 라단의 재를 뿌
러 주러, 유모의 재를 뿌러 주러, 그리고 마지막으로 람
의 재를 뿌려 줄어 들어온 이후로 처음으로 들어온다.
사엘의 몸이 물 위에 뜨는 떠 있는 듯하더니, 물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간다. 이를 본 카야가 사엘의 이름
을 부르며 바다로 뛰어들어 가려 하지만, 해안가와 바
다 사이에 파도가 위로 솟구쳐 유리 장벽처럼 만들어
져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사엘이 빨려 들어간 바닷속은 고요하다.
멀리서 형체가 보인다. 사엘은 이전에 바닷속에서 엄
마 하란을 봤던 것을 기억한다.
“엄마?”
형체가 사엘 쪽으로 가까이 다가온다. 하란의 옆에, 두
명의 형체가 더 보인다. 라단과 람이다.
“라단아.” 사엘은 라단의 형체를 잡으려 손을 뻗는다.
라단 옆에 람이 있다. 너무나 똑같이 생긴 아버지와 아
들이 모습이다.
“람아. 람아.” 사엘이 람을 안으려 팔을 넓게 펴며 다가
간다.
“행복해? 그곳에서 행복해?”
그들은 사엘의 주변을 맴돈다. 사엘은 그들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본다. 그들의 얼굴은 밝고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으며, 전혀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전쟁으
로 적군의 창에 심장이 찔려 죽은 라단의 얼굴도, 저주
받았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남편의 손에 죽임을 당
한 엄마 하란의 얼굴도, 그리고, 사엘의 저주로 인해 이
유도 잘못도 없이 어린 나이에 죽은 람도 모두 밝고 행
복해 보인다.
멀리서 바닷속으로 투명하게 밝은 빛이 들어온다. 그
들과 사엘이 바다 위로 솟구쳐 나온다. 빛 속에 그들이
서 있는 것이 보이다. 마치 누군가, 넓은 팔로 그들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그들을 보자, 사엘은
처음으로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들이 있
는 곳에서, 그들이 평안하게 행복하게 있는 것 같기 때
문이다.
“경전의 신이여. 저들의 죽은 영혼들이 어둡고 차가운
곳에서 신음할 것을 당신께서 저들의 영혼을 거두시어
평온한 곳에 머물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들의 죽음 후, 처음으로 사엘은 경전의 신에게 감사
하다고 말한다. 그동안 사엘은, 경전의 신에게 이 모든
것이 그녀의 탓이라고 고백하거나, 잘 못했다고 빌거
나, 고통스러움이 지나가게 해달라고 간청하거나, 그
녀가 했던 저주에 대해 후회한다고 했었다. 그런데 사
엘의 마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전의 신에게 감사
한 마음이 깃든 것이다.
사엘은 빛 속으로 사라지는 그들을 바라본다.
빛이 사라지고, 잔잔한 바다 위에 바다 물결이 튕겨져
올라, 마치 사엘이 물방울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때 사엘의 귀에 익숙하지만, 오래 동안 듣지 못한 음
성이 들린다.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지명하고 불렀나니.”
사엘이 훅 하고 울음을 터트린다.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지명하고 불렀나니."
사엘은 그녀가 경전의 신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었
다. 그리고, 경전의 신이 그녀를 지명한 것은 신의 실
수이고, 그녀가 지명을 받지 않았다면, 이 모든 일들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경전의 신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경전의 신은 그녀에게 그녀가 사랑하는
이들의 평온한 모습을 보여 주고, 그녀가 했던 모든 말
과 행동에 상관없이, 그녀를 다시 부르는 것이다.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지명하고 불렀나니."
사엘이 겨우 입을 열어 대답한다. “당신이 지명한자,
당신의 음성을 듣습니다.”
“나를 위한 신성한 춤을 추어라. 나의 음성이 너의 영
혼에 머무를지니.”
사엘은 처음 그녀가 이곳에서 지명받았던 때가 떠오
른다. 그때도 어떻게 춤을 춰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사
엘이 머뭇거리자, 파도가 몰려와 솟구치며, 물방울들
이 만들어져, 사엘의 주변에 흩어져 방울방울 움직이
기 시작한다. 손을 들어 움직이는 방울들을 잡으려고
하자, 사엘의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목각 인형 같
았던 사엘의 팔다리가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회색빛의
돌덩어리 같던 그녀의 얼굴과 몸에 생기가 돌기 시작
한다.
사엘이 경전의 신의 음성을 리만투어에서 다시 들은
날 이후,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가을 들판의 곡식들이 노랗게 익어가고, 하늘이 높고
푸른 가을 어느 날 사엘이 보연당을 찾아온다.
연락을 받은 수아는 의자에 앉아 있는 대신, 단에서 내
려와, 밧세와, 여람과 함께 서서 사엘을 맞는다. 예복을
갖춰 입은 사엘이 긴 복도를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예
복의 긴 자락이, 마룻바닥에 스쳐, 사각사각 소리를 낸
다.
사엘이 다가오자, 서 있던 셋은 머리를 숙여 사엘에게
인사를 한다. 그들은 친구이지만, 왕, 제사장, 그리고
총리로 이 자리에 모였기 때문이다.
“이곳에 계신 분들과, 이곳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에 경
전의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사엘이 인사를 하자, 그들은 고개를 들어 사엘을 바라
본다.
“오늘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엘이 말하자, 수아가, “제사장님께서 말씀하신 것인
데, 당연히 모여 야지요.” 라며 밝은 목소리로 말한다.
“한 가지 청이 있어 왔습니다.”
“말씀하세요.”
“한 달 후, 리만투어에서 경전의 신을 위한 의식을 드
리려고 합니다. 그때 사람들도 많이 모였으면 좋겠습
니다.”
전쟁이 끝나고, 사엘은 이 땅을 저주했다고 했지만, 제
단의 불은 꺼지지 않았었고, 그 뒤로 신전을 새로 짓고,
의식을 드리고, 사환들을 뽑고, 또한 경전을 배우고,
의식을 드릴 수 있는 자들을 뽑아 학교처럼 그들을 가
르치고 있었다.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신전에서 의식을
드리고 있다. 하지만 리만투어에서 의식을 드리기로
한 것은, 전쟁 후, 거의 10년 그리고, 사엘이 제사장으
로 지음 받고, 첫 예식을 그곳에서 드린 후, 30년 정도
의 시간이 흘렀다.
“물론입니다. 정말 뜻깊은 의식이 될 것 같습니다.” 수
아는 말을 마치고 사엘이 얼굴을 찬찬히 살펴본다. 그
녀의 얼굴이 이전보다 평온해 보인다.
그녀가 이제 몸과 마음을 추스린 것 같아, 기쁜 마음에
여람이, “우리가 무엇을 준비하면 될까요? 제가 여러
나라의 물건들을 원하시는 대로 준비하겠습니다.” 라
고 말한다.
사엘이 수아와 여람을 번갈아 보며 가볍게 미소를 짓
고는, “그곳에서 의식을 드려도 된다고 허락하셨으니.”
“허락이니요. 제사장님께서 원하시면 언제든 그냥 하
시면 됩니다.” 라고 수아가 말하자, 사엘은 고개를 위아
래로 끄덕이며,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럼, 의식과 관련된 일들은 사환과 학생들을 통해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한다.
셋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사엘은 그들에게
목례를 하고 보연당을 나선 후 하늘을 바라본다. 그때
도, 라단은 이렇게 하늘을 쳐다봤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라단을 보내고 며칠 후, 사엘은 보연당을 왔었다. 보연
당 안의 긴 복도를 걸어 들어가며, 라단이 앉아 있었던
책상을 바라봤다. 이곳에서 그들을 기다리며, 그 동안
의 모든 일들을 감당하며 홀로 있었을 라단을 떠올리
니, 이곳에 서린 그의 한숨과, 그의 그리움이 느겼졌었
다. 라단이 앉아 있던 책상 아래의 나무 곁을 하나 뜯으
니, 그곳에 두꺼운 두께의 세 권의 공책이 놓여 있었다.
라단은 보연당에 앉은 그날부터 매일매일 이 빈 공책
에 사엘에게 쓰는 편지를 썼었다. 그의 일기 같은 것이
기도 했다. 사엘을 향한 마음, 사랑, 염려가 적혀 있었
고, 그날 있었던 그의 일상들도 적혀 있었다.
그의 일기 한구절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사엘아, 오
늘도 어김없이 아침에 일어나 같은 의자에 앉아 일을
했어. 어젯밤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늘도 역
시 널 보지 못하고, 하루가 저물어. 보연당을 나와, 밤
하늘을 바라봐. 저 멀리 어딘가 너도 있겠지. 나의 밤이
너에게도 밤이라면, 이렇게 마주 바라보는 깜깜한 밤
하늘에 나의 사랑이 닿기를.
그리고 마지막에는 늘, "내일은, 널 만나길 오늘 밤도
간절히 바라며." 라고 쓰여 있었다. 사엘은 라단이 적은
것들을 매일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람이 5살이 되던 해, 그를 데리고 한 번, 보연당
을 왔었다. 람이랑 와서,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며, "람아. 네 아빠는 이렇게 하늘을 올려 다보는 것을 좋아하
셨단다. 하늘을 바라보며 코끝에 닿는 바람을 느끼는
것도 좋아하셨지. 너의 이름처럼, 바람처럼, 그렇게.“
라며 람의 작고 보드라운 손을 잡고 말해주었었다. 아
직도 그의 손이 손끝에 따스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사엘은 그리움에 북받쳐 오르는 가슴을 손으로 쓸어내
린다
그때 카야가 다가와, “말씀은 잘 나누셨어요?”라고 묻는다.
카야가 오자, 사엘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대신, 카야를
바라 본다. 카야의 모습도 이제는 희끗한 머리에, 얼굴
에 주름이 깊게 파여 있다. 사엘은 그에게 다른 무사들
이 곁에서 지키게 해도 된다고 했지만,카야는 그의 숨
이 붙어 있을 때까지 사엘 곁에 있겠다며, 지금도 여전
히 그녀 옆에 있다.
“좀 쉬라니까.”
“매일 움직이던 사람이 쉬면 병납니다.”
카야는 수아가 제안한 원 나라의 총 사령관 자리를 거
절하고, 사엘의 최측근 호위 무사로 남길 원했다.
보연당 앞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엘의 눈에 그들이
깃드는 것을 보자, 사엘의 슬픔이 깊어지기 전에 카야
는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건 것이다.
“집으로 가시기 전에 마데라에 가실래요?”
“마데라?”
“네.”
“카야가 그곳에 가자는 말을 먼저 다하네.”
“오랜만에 이곳까지 나오셨으니까요.”
“가서 뭐 해.”
“납작 떡 먹으러 가요.”
아주 오래전에 하디와, 유모, 카야와 함께 먹으러 갔었
다.
“그 집이 아직도 있을까?”
“그럼요.” 사엘이 머뭇거리자, 카야는 나간 김에 먹고,
하디에게도 사다 주자고 말한다.
마데라에 가니, 여기저기 많이 변하고, 더 번잡해지고,
여람이 여러 나라와 무역을 하면서 들여 온 신기하고
희귀한 물건들도 많이 보인다. 마데라의 상점들 사이
사이를 걸으니, 그때처럼, 여람과 밧세와 수아가 달려
올 것만 같다. 생각해 보니, 라단과는 마데라에 함께 와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함께 할 시간이 많을 줄 알고,
그때는 나중에 하면서 미루며 더 많은 일들을 함께 하
지 못했던 지난 시간들이 후회가 된다.
카야가 옆에서 이것저것 둘러보는 것을 본 사엘이, “원
래 그렇게 구경하는 걸 좋아했어?”
“재밌잖아요. 신기한 것도 많고, 이쁜 것들도 많고?”
“이쁜 것들?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그럼 뭐 저는 맨날 칼이나 휘두르는 줄 아셨어요? 저
도 멋진 옷도 좋아하고, 저렇게 이쁜 꽃 무늬 장식들도
좋아하고, 그림을 보는 것도 좋아해요.”
카야는 하란과 함께 마데라에 가끔 나올 때, 그녀를 호
위하면서 걸었던 때를 떠올리는 것이다. 장식품을 보
고, 거울을 보고 이쁜 옷들을 둘러보고, 음식점에 가 간
식을 사 먹었던, 자주는 아니었지만, 종종 있었던 그 시
간들이 행복하고 즐거 웠었다. 하란은 붓으로 그림도
잘 그렸고, 바느질도 잘했다. 그녀가 그린 꽃과 나비들
은 금방이라도 살아서 날아가고, 꽃향기까지 풍겨 나
오는 것 같았고, 마음에 드는 그림이나 꽃무늬가 놓인
천을 사 온 날은, 그녀는 꽃무늬 천으로 치마나, 손수건
을 만들기도 했다. 하란은 카야에게 꽃무늬의 목 두건
을 여러 장 만들어 주었다. 카야가 그것을 목에 걸어본
적은 없지만, 지금까지 바지 주머니 속에 보이지 않게
항상 지니고 다니고 있다. 카야는 하란이 하는 모들 일
들을 바라보고, 그녀의 얼굴에 생기는 감정의 변화들
을 바라보며 행복했었다.
그 날 이후, 사엘은 한 달 후에 있을 의식을 바쁘게 준
비하고, 이전 보다 더 많이 학생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무엇을 하는지, 그녀의 방에 밤새 불이 켜져 있다.
카야는 여전히 그 시간에 일어나 몇 시간씩 무술 연습
을 하고, 정예무사들을 훈련시키고, 사엘이 방에 들어
간 저녁에도 그 앞을 몇 시간 서서 있다가 그의 처소로
돌아간다.
잠시 일손을 놓겠다던 하디는 다시 집안일로 복귀를
했고, 그녀만의 음식 비법을 입으로 알려 주다가 제목
이 ‘하디표 음식’이라는 글을 썼는데, 첫 번째 책이 상
당히 인기를 끌어, 지금은 두 번째 책을 집필 하고 있는
중이다.
라함은 여전히 그 마을에 머물며, 사람들을 돌보고, 여
람이 가져다준 여러 나라들의 법문서를 읽으며, 왕과
총리와 의논하며, 원 나라에 맞는 법문서를 만들고 있
는 중이다.
하갈과 레이는 함께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동안
수장, 수장의 부인으로 살아온 이들은 노년에라도 하
고 싶은 것을 좀 하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마하살은 하갈과 레이의 여행에 따라가고 싶었지만,
그들이 강력히 거부해, 혼자서 무엇을 하며 지낼지 고
민했다. 라함이 법문서를 만드는데 함께 하자고 했지
만, 마하살은 단번에 거절했다. 평생 읽고 쓴 문자는 이
제 보기만 해도 어지럽다. 그러다 마하살은 동네 개나
고양이들을 돌보기 시작했고, 어린 시절 그가 얼마나
동물들을 사랑하고 이뻐했는지 기억했다. 그저 먹이나
주고, 길 잃은 동물들을 집으로 데려와 돌보다, 사람의
질병도 고치기 힘든 세상에, 동물들이 아프면 그야말
로 더 고치기가 어려운 세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고,
그는 여람이 구했다준, 동물 의학 서적을 읽고 공부해,
요즘은 아픈 동물들을 치료해 주러 다닌다.
유난히 더 풍성히 풍년이 든 해라, 수아와 밧세는 더
바빠졌지만, 풍성함에 기쁨이 더 했고, 여람은 여기저
기 다른 나라에서 무역을 요청해 와 정신없이 바쁘다.
모두들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고, 살아가고 있다. 이것
이 그들의 소명이라면 소명 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약이라는 말처럼, 마음에 난 상처도 아
물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