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갈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머물고 있
는 마을에서 한 걸음에 달려온 라함이 방으로 들어가
자, 그를 본 아비갈이 그녀를 일으켜 달라는 손짓을 한
다. 라함은 그녀를 일으켜 그의 품에 안는다. 그때도 한
없이 작던 그녀의 어깨가 더 작게 느껴진다. 라함의 품
에 안긴 아비갈은 간신히 숨을 고르며, 옆에 앉아 있는
여람을 손짓으로 부르자, 여람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
가간다.
아비갈은 간신히 숨을 고르며 나지막이 말한다. “정하
를 좋아해 주세요.”
아비갈의 말에 여람은 "헉" 하고 숨을 내쉰다. 그동안
숨겨 왔고 참았던 마음과 그로 인해 정하에게 차갑게
굴던 행동들이 생각나서이다.
“알아요. 괜찮아요.” 아비갈의 말에 여람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의 이런 마음을 괜찮다고 말해준 이도 아
비갈이 처음이고, 그녀는 지금 그녀의 죽음 잎에서, 그
녀의 딸 정하도 챙기지만, 정하가 사랑하는 여람의 마
음도 위로해 주는 것이다.
“괜찮아요. 그리고 그 그 마음 한편에 우리 정 정하도
조금은 좋아해 주세요. “
여람이 그렇게 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아비갈
이 미소를 지으며, ”고마워요. “라고 말한다.
그때 헐레벌떡 방으로 뛰어 들어온 정하가 아비갈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는다. ”엄마. “
”내 딸 정하. “
”엄마“
”네 엄마 현.” 현이라는 말에 아비갈은 마음이 울컥하
여 잠시 말을 멈춘다. 생각만 해도 부르기만 해도 너무
그립고 슬펴서 입에 담지 못했던 아비갈의 유일한 가
족이자 친구였던 그녀이다. 겨우 3년을 함께 살았지만
가장 행복했고, 가장 많이 웃었고, 가장 따스하고 포근
했던 시절이었다.
“내 친구이자 가족인 현, 현이는 널 정말 아끼고 사랑
했어.” 정하의 눈에 눈물이 떨어진다.
“너는 우리에게… 기쁨이고, 행복이었단다.”
“엄마.” 정하는 그저 엄미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다.
“나를, 나를 엄마라 불리게 해 줘서 고마워.”
정하는 앙 하고 소리를 내며, "엄마, 엄마" 라고 다시
부르며 아비갈의 손을 꼭 잡는다.
아비갈이 눈을 돌려 그녀를 안고 있는 라함을 본다. 서
로 눈이 마주치자 아비갈은 미소를 짓는다. 둘 사이에
말이 오가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고개를 돌려 울고 있는
정하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여람을 보고도 미소를 짓
는다.
그리고 손을 들어 정하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
며 말한다. “울지 마. 울지 마 정하야. 행복하게 웃으면
서 살아. “
정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비갈은 고개를 들어 허공
을 응시한다. 그녀의 지난날들이 그래도 이름답고 행
복했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사랑 하면
떠오르는 이와, 딸 그리고, 딸이 사랑하는 이들 속에서
눈을 감으니 말이다.
멀리서, 마중 나온 현이가 미소를 짓는 것이 보인다.
‘현아. 나 잘했어? 이만하면 잘했어? 정하도 잘 키운 거
맞아?’
아비갈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숨을 거두었다.
람이 7살이 되던 해, 그 해는 유난히 비가 많이 오고,
바람이 불고 흐린 날이 많았다.
사엘의 방에 의원이 들어와, 람의 몸 여기저기를 진찰
해 보지만, 무슨 병인지 원인을 알 수가 없다.
람의 소식을 듣고, 여람과 수아, 밧세도 급하게 왔다. 7
년 전 임신을 했다고 환하고 밝게 웃던 사엘의 얼굴이
하얗게 창백해져, 누운 람의 옆에 걱정스러운 얼굴로
앉아 있다.
“아이는 어떤가?”
수아가 묻자, 의원은 난처한 얼굴로, “열도 없으시고,
몸에도 아무 이상이 없으신데, 도대체 무슨 병으로 이
렇게 앓아 누워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소식을 들은 하갈도 방으로 들어오며, “열도 없고, 아
무 탈도 없는데, 아이가 왜 저러고 누워 있어?”
하갈은 사엘 옆에 앉아 람의 이마도 짚어 보고, 가슴에
귀를 대고 소리도 들어 보고는 람의 손과 다리를 주무
르며 말한다. “사엘아, 애들이 크면서 그럴 수 있어. 열
이 없으니 일단 다행이고, 숨도 고르게 쉬는 것 같고,
손 발도 따뜻해.”
하갈의 말에 사엘이 말없이 눈물을 뚝 흘리며, 람의 팔
과 다리를 주물러 주고는 람의 작은 가슴에 손을 얹고
는 나지막이 경전의 신에게 기도 한다.
하갈도 람의 손을 꼭 쥐며, “언제 일어나서 할머니랑
바둑 둘 거야. 그때 둔 거 아직도 그대로 있는데.”
여람은 의원을 따로 불러서, 다른 나라에서 구한 의학
서적을 건네고는, 비슷한 증상이 있는지 찾아보고, 약
을 구해 보라고 한다. 여람이 하는 일은 다른 나라들과
의 교역이다. 그 전에는 다른 곳에 다른 나라가 있다고
책에서 읽고 상상만 했었지만, 이제는 다른 나라를 직
접 찾아가 보고, 원 나라를 알리기도 하고, 서로의 물건
들을 매매하면서 상권을 키우고 있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작은 나라들은 속국으로 만들었지만 속국이 아
닌 연맹제로 하면서 그 나라들까지 돌보고 있다. 이런
일을 하다 보니, 세상에 대한 정보와 식견이 넓어진
여람은 다른 나라의 의술에 관한 책도 구해온 것이다.
람에게 이것저것 약도 먹여 보고, 경전의 신에게 기도
도 하고, 모든 이들이 람의 쾌유를 바랐지만, 한 달 정
도 그렇게 누워 있던 람은, 그날 밤, 잠시 눈을 떠 사엘
을 보며, 라단이 그녀를 마지막으로 보며 웃었던 그 미
소를 짓고는, “엄마.” 하고 한번 부르고는 사엘의 품에
서, 잠을 자 듯 세상을 떠났다.
마치 그가 왔던 세상은 현실이 아닌 모두가 달콤하고
행복한 꿈을 꾼 것만 같았다.
람의 장례를 치르고 며칠 동안 방에만 있는 사엘에게,
수아도 밧세도, 하갈도 모두 다녀 갔지만 그녀는 아무
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돌려보냈고, 하디 조차 방에 들
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
카야는 이제는 안 되겠다 싶어, 그녀의 방으로 들어간
다. 평생을 그가 모시는 분들의 문 앞에서 기다리는 것
이 익숙하지만, 그때, 사엘을 낳은 하란의 방을 죽을
것을 각오하고 들어 갔던 때처럼 지금도 그때의 심정
으로 들어간다.
카야가 방으로 들어 가자, 사엘은 언제나 그렇듯, 방바
닥에 앉아 있고 그녀의 앞에 놓인 책 상위에는 경전이
올려져 있다.
인기척이 들리자, 사엘은 여전히 눈을 감은채, “혼자
있고 싶어.”라고 조용히 말한다.
“접니다. 카야.”
“혼자 있고 싶어.”
사엘의 창백하고 여윈 모습에 카야는 걱정이 되어 다
시 한번 말한다. “접니다. 카야. 들어가겠습니다.”
카야는 사엘 앞에 앉아, 들고 들어온 상을 옆에 놓고는
말한다. “뭐라도 드셔야 해요.”
“혼자 있고 싶다고 말했는데, 죽고 싶어 들어온 거야?
내가 너에게 사지가 찢어지는 고통이라도 줄까?”
“사지가 찢어져도 괜찮습니다. 여기서 죽어도 괜찮습
니다. 그러니, 이거라도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세요.”
사엘이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카야를 바라본다. “내가
못할 것 같아? 사지를 찢고, 불에 태워 죽이는 것을 못
할 거 같아? 나는 나는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어.”
사엘은 그때 그녀가 했던, 라단이 죽고 나서 그녀가 이
땅 위에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했던 그녀의 모습이
생각나 고통스러운지 두 눈을 다시 찔끔 감는다.
“하셔도 돼요. 저에게 그렇게 하셔도 돼요. 그리고, 이
것도 좀 드세요. 그래야.”
카야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한다. 하란을 사랑하는
평생의 마음으로, 그녀의 유언 대로, 사엘을 지금까지
지키며 살았다. 하지만, 사엘은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
지금 이곳에 혼자 앉아 있다. 너무 슬퍼 울지도 못하고,
숨 쉬는 것마저도 고통스러운 그녀의 모습이다.
“차라리 우세요. 슬프다고 보고 싶다고, 우세요.”
카야의 말에, 사엘은 울음을 참느라 꾹 다문 입술에 눈
을 감는다. 그녀의 감은 눈이 파르르 떨린다.
“제가 어떻게 해드려야 할까요? 어떻게 해 드려야 이
고통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요?”
카야는 그때 죽어가는 하란을 안고 있을 때처럼 마음
이 고통스럽다.
참고 있던 숨을 헉 내뱉은 사엘이 말한다. “내 잘못이
야. 다 내 잘못이야.”
“사엘님 잘못이 아니에요.”
사엘이 눈을 뜨고 카야를 바라보고는, 흐느끼며 말한
다. “내 잘못이야. 내가 그때 저주를 해서, 아이가 그렇
게 된 거야. 경전의 신이 그러셨어. 내가 이곳에 내린
저주로, 아이는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하셨어.”
처음 듣는 말에 카야가 놀라, 묻는다. “그게 무슨 말씀
이세요? 저주라니요?”
사엘이 점점 더 크게 흐느끼며 말한다. “라단이 죽었을
때, 내가 칼과 창을 든 병사들을 사지가 찢기고 불에 타
죽게 했잖아.”
“그건, 그건 전쟁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전쟁이 끝났고
요.”
사엘이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며, “아니야. 그게
아니야. 내가 이 땅을 저주했어. 그건 전쟁을 끝내는 것
이 아니었어. 내 저주의 시작이었어. 그래서 모두 다
그렇게 죽은 거야. 사람들이 내 말 한마디에 모두 죽
었어. 내가 내가, 경전의 신의 이름이 아닌, 내 힘으로
이곳을 저주했어. 그래서, 내 아들도 죽은 거야.”
“그럴 리가 없어요. 사엘 님이 그러셨을 리가 없어요.”
“그날, 제단의 불이 다시 돌아오던 날, 경전의 신은 우
리가 이 땅에서 서로 칼을 겨누었기 때문에 이곳을 진
멸하시겠다고 하셨어. 나는 잘못했다고 빌었고, 경전
의 신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적군으로부터 도와주시겠
다고 하셨었어. 그런데, 내가 이곳을 저주하고, 그곳에
있던 모두를 죽인 거야.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분명 경전의 신의 방법대로, 이 땅을 지켜 주셨을 거야.라단이 그렇게 죽는 것을 보자, 정말 나는 정말 참을 수
가 없었어.”
“사랑하는 이가 그렇게 죽어가는데 어떻게 참아요. 그
건 저주가 아니에요. 사랑하는 이를 보내는 자의 통곡
이지요.”
카야의 말에 사엘이 눈을 감고, 슬픔을 이기지 못해 흐
느낀다. “람이 태어난 날, 경전의 신이 그러셨어. 나의
저주로 인해, 이 아이는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하셨어.
그래서 매일매일 기도 했어. 이 아이가 매일매일 숨 쉴
수 있도록 기도 했어. 경전의 신에게도 끊임없이 잘 못
했다고 빌었어...”
사엘의 말에 카야도 슬픔을 참지 못해 흐느낀다.
“내 잘못이야. 나는, 나는 그때 라단이 왜 그를 살리지
못하게 하는지 몰랐어. 람이 때문인데, 내가 그를 살리
다 보면, 람이 잘못될까 봐 그런 건데, 나는 그것도 모
르고, 라단이 죽자, 모두를 저주하고, 그 저주가 내 몸
에 남아, 람 까지 죽게 한 거야. 나 어떻게 해? 카야. 나
는 이제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 엄마도, 내가 제사장
가문을 이을 아들로 태어났다면, 그렇게 되지 않으셨
을 거야. 라단은? 나를 만나지 말았어야 해. 나를 만나
서, 그렇게 된 거야. 내 아들은? 내 아들은 무슨 잘못이
있어? 다 내 잘못이야. 다 내 잘못이야.”
사엘의 말을 들은 카야는 손으로 가슴을 치며 소리 내
어 울기 시작한다. 하란이 죽었을 때도 그렇게 크게 울
지는 않았었다. 그녀가 남긴 유언을 지켜야 했기 때문
이었다. 하란이 그립고, 그녀를 만나러 생을 마감할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사엘을 보며 견뎠었다. 하란의
유언이었기 때문이다. 카야는 목숨을 다해 사엘을 지
켰다. 하지만 사엘을 지키는 것이 그녀의 생명만을 지
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라단을 잃고, 숨
은 쉬지만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사엘을 보며, 카야는
그가 진정 사엘을 지키고 있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
었다. 하지만 람이 태어났고, 카야는 이제야, 하란의
유언을 잘 지키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이제는 하란
을 만나러 가도 되겠다고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람이
떠났고, 이제는 무엇으로 사엘을 지켜야 할지 모르겠
다.
‘하란님.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당신이 남긴
그 유언을 어떻게 지켜야 합니까? 내가 이 아이를 어떻
게 이 고통 속에서 지킬 수 있습니까?’
한참 매향초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여람과 사엘은, 사
엘이 이제 그러지 않겠다고 말해서 여람도 더 이상 그
녀를 몰아 부치지 않고, 서로 잠시 리만투어를 바라보
며, 수평선 너머로 지는 석양을 바라본다.
“수아가 나보고 처음에 쪼끄만 여자애라고 불렀는데?
내가 그때 그렇게 작았나?”
사엘이 갑자기 묻자, 여람이 잠시 생각하더니, “그냥
너 보자마자 괜히 심통 낸 거지. 너한테 심술이 난 게
아니라, 밧세랑 내가 널 먼저 만나서, 그게 심술이 나서
그런 거라 했어.”
여람의 말에 옛날 생각들이 난 사엘이 입가에 엷은 미
소를 지으며, “요즘은 너네들한테 심술 안 부려?”
“심술만 부리겠냐? 나도 조만간 총리인지 뭔지 그만하
려고. 수아랑 계속 더 일하다가는 없던 병도 생기겠어.”
여람이 말은 그렇게 하지만, 수아와, 밧세 여람은 나랏
일을 정말 잘하고 있는 중이다. 사엘은 여람의 말을 들
으면서, 그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고 총리이고, 이
제는 흰머리도 있는 모습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들
이 그때처럼, 그렇게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비갈이 죽고 일 년 후, 정하는 여람과 헤어졌다. 아비
갈의 부탁대로, 여람은 정하에게 잘하려고 했고, 그녀
를 많이 위해주려 했지만, 정하는 아비갈이 말한, 울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라는 말이 가슴에 남았다. 여람을
처음으로 사랑했던 것은 맞지만, 그녀는 여람 곁에서
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사엘을 생
각하는 여람의 마음 때문도 아니고, 아비갈의 말대로
그녀에게 잘해주려는 여람의 태도 때문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녀가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하면서 살고
싶은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여람과
헤어지고, 세상 곳곳을 다녔고, 맘에 드는 장소가 있으
면, 그곳에서 잠시 머물기도 하고, 배우고 싶은 것이 있
으면 즉흥적으로 배우고, 여러 친구들도 만났다.
“정하는 잘 만나고 왔어?”
“응. 전 부인 혼인식 하는 곳에 초대받아 갔다 오는데
기분이 이상 하더라.”
정하는 얼마 전, 어느 나라의 왕과 결혼해서, 왕비가 되
었고, 혼인식날 여람도 초대한 것이다.
“기분이 왜 이상했는데?”
“뭐랄까? 여동생을 보낸 그런 기분. 그래서 왕한테 가
서, 우리 정하 행복하게 해 주세요 그렇게 말했다니까.
나오는데 얼마나 창피하던지. 지금 그 나라랑 무역을
끊을까도 생각 중이야. 이 이야길 듣고, 밧세랑 수아가
또 얼마나 놀려 대던지.”
사엘은 정하가 그동안 왜 힘들어했는지 안다. 여람도
그녀에게 왜 그렇게 했는지 안다. 순간 사엘은 정하에
게도 여람에게도 모두 다 그녀의 잘못이구나 라는 마
음이 들자, 얼굴빛이 어두워진다.
이를 알아챈 여람은, 사엘 대신, 멀리 노을을 바라보며,
말한다. “잘 됐어. 원래대로 다 돌아간 거야. 정하는 정
말 행복해 보였어. 그리고, 나도, 이렇게 너 옆에 여전
히 앉아 있으니, 잘 된 거고.”
여람의 말에 사엘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그녀를 통
해 잘 된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람이 먼저 일어나, 사엘에게 손을 내민다. “가자. 밤
바람이 금방 차가워질 거야.”
사엘이 여람의 손을 잡지 않고 일어나려 하자, 여람은
사엘의 팔을 잡으며 말한다. “친구로 있으라며? 친구
손인데 왜 잡지도 못해?”
“그게, 나는.”
“됐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사람들 보니까 행복
해 보이더라. 나도 내 맘대로 할 거야.”
여람은 사엘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한다. 사엘도 아무
말 없이 걷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언제나 그녀 곁에 있어주는 여람이 고마워,
사엘이 “고마워.”라고 말하자, 여람이 “갑자기? 왜?”
라고 묻는다.
“그냥 늘 내 곁에 이렇게 있어줘서.”
여람은 예전에 사엘의 이 말이 잔인하다고 느꼈고, 그
녀에게 잔인하다고도 말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가
이렇게 그의 곁에 있어서, 오히려 고맙게 느껴진다.
그렇게 바다 너머로 지는 석양을 보며 걷는데, 멀리서
말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수아가 달려오며, “너네 둘만 뭐 하는 거야?”라고 소리
친다.
밧세와 수아가, 먹을 것과 장작을 가지고 온 것이다.
그들이 말에서 내리자, 여람은 눈치 없는 것들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을 보며, 묻는다. “여긴 왜 왔어? 너네
안 바빠?”
밧세가 말한다. “네가 여기 이러고 있는데 우리가 왜
바빠?”
“내가 여기 이러고 있으니까 너네들은 바빠야지.”
수아가 모래위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말한다. “다들 됐
어. 왕인 내가 안 바쁜데, 너네 까짓것 총리들이 뭐가
그렇게 바쁘다고 난리들이야. 앉아. 앉아. 오늘 업무는
여기까지 끝. 여람아 옛날처럼 여기 불 좀 피워봐.”
“업무 끝이 아니라, 연장 같은데. 아 정말, 나 사직하고
싶어.” 여람은 구시렁거리면서, 수아와 밧세가 가져온
장작으로 불을 피운다.
사엘이 이들을 보며 말한다. “나 여기 이런 거 하려고
온 거 아닌데?”
밧세가 사엘을 앉히며 말한다. “오늘은 이런 거 해.”
넷이 모닥불에 둘러앉아, 밧세가 싸서 가져온 도시락
을 먹는다. 언제나 먹어도 맛있는 밧세의 음식이다.
사엘은 이곳에 오면, 추억에 잠기고, 지난날들을 그리
워하고 슬퍼했던 순간이, 이들로 인해, 그때 처럼, 그렇
게 마치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제와 다름
없는 오늘처럼 이들과 앉아 있는 것만 같다.
수아나, 밧세 여람도, 슬픔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보낸
친구도, 그리고 짧게 머물다가 간 람도 이들의 마음에
깊게 남아, 어느 곳을 둘러봐도 그들이 지나가지 않은
자리가 없다.
하갈은 람이랑 두다 만 바둑판만 남겨 둔 채, 놀이방을
정리했다. 추억이라고 간직하기엔, 그 자리에 머문 이
들이 생각나서, 슬픔을 참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집안의 대소사를 도맡았던 하디도, 이제는 좀 쉬고 싶
다며, 일손을 내려놓았다.
카야는 매일매일 경전의 신에게, 사엘을 지켜 달라며
기도 하고, 하란에게는, 사엘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무
엇이냐며, 매일매일 묻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늘 침착
하고, 단단하던, 카야도, 요즘은 그가 자꾸 무너져 가는
것만 같아 불안하다. 리만투어에 가는 그녀를 카야는
멀리서 따라와 지켜보았다. 달려가 매향초도 그만하라
고 말하고 싶고, 카야도 매향초로, 그가 늘 꿈꾸는 환각
속에 있고 싶기도 했다. 그래도 오늘은, 그녀가 그녀의
친구들과 그때처럼 앉아 있는 것을 보며, 마음이 조금
은 안심이 되지만, 수아와 밧세 여람도, 슬픔을 누르고,
사엘 앞에서는 이제는 좀 괜찮은 듯, 조금은 잊어 보라
는 듯, 그렇게 가장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날, 경전의 신이 하신 말이 맞다. “이 땅과, 후손들은
멸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땅을 피로 물든인 너희
들은 너희들의 죄로 고통받고 울부짖을지니.”
남아 있는 이들은 모두 각자의 마음에 죄책감과 후회
로 인한 고통, 그리고 그리움으로 인한 슬픔이 있지만,
그래도 오늘을 살아가며, 그들의 후손들이 더 나은 세
상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숨이 붙어 있을 때까지 버
티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남아 있는 이들의 살아가는 이유이자, 책임이
라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