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연당을 방문한 이후, 사엘은 의식을 바쁘게 준비하
고, 이전 보다 더 많이, 자주 학생들을 만나 가르친다.
제단의 불이 사라진 후, 사엘이 제사장으로 지음을 받
고, 리만투어의 제단에서 첫 의식을 할 때만 해도, 준비
하는 자들이 없어, 그녀 혼자 풍경들을 닦고 카야와, 그
의 병사들이 도왔었다. 지금은 100명이나 되는 사환
과, 30명의 학생들이 함께 준비하고 있다. 오랜만에 사
엘 집도, 신전도 사람들로 북적북적 거린다. 그리고 조
용해진 밤 사엘은 무엇을 하는지, 그녀의 방에 밤새 불
이 켜져 있다.
그렇게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 리만투어 제단에서
의식을 드리기로 한 날이 되었다. 50명의 악사들이 연
주하는 음악에 맞추어 경전의 신을 위한 춤을 추는 이
들이 먼저 나선다. 잠시 후, 첫 의식을 드릴 때 입었던
하얀색 예복을 입은 사엘이 신전을 나와, 리만투어 해
안가를 따라 제단을 향해 걸어간다. 처음 사엘과 카야,
그리고 몇 명의 병사 들과 걷던 곳에, 사엘 뒤로, 학생
제사장들이 따르고, 그 뒤에 예복을 갖추어 입은 사환
들이 따른다.
사엘이 걸어 가자, 모여 있던 마을 사람들도 길을 트며.
가볍게 목례를 한다.
리만투어까지 반 정도 남았을까, 한 여자가 사엘의 예
복 단을 잡는다. 사엘이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
자, 한 여인이 바닥에 엎드려 있다. 사엘이 허리를 숙여
여인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우려 하자, 여인이 울
먹이며 말한다. “아이가 아파요. 이제 7살밖에 안 됐는
데, 우리 아기는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병을 앓고
있어요.”
아이가 7살 아이라는 말에 사엘이 람을 떠올린다.
“무슨 병인지도 몰라 고쳐주지도 못하고 있어요. 혹시
제사장님의 옷깃이라도 잡으면, 아이가 낫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 그만.” 여인이 흐느껴 울며 말한다.
“제 손을 잡으세요.”
여인이 머뭇거리다, 사엘이 내민 손을 잡자, 사엘은 그
녀를 일으켜 세우며 말한다. “당신의 믿음대로 될 것입
니다. 제가 아니라 경전의 신이 그렇게 하실 거예요.”
사엘은 다시 가던 길을 걷는다.
리만투어 제단이 있는 절벽에 오르니, 옛 지파의 수장
들과, 지금의 왕과 총리들이 먼저 와 제단 앞에 서 있다
30명 학생 중, 마지막 학년을 남긴 7명의 학생들은 함
께 올라오고, 사환들과 나머지 학생들, 그리고 악사들
은 언덕아래에 머문다.
사엘이 제단 앞으로 가 무릎을 꿇고 앉아, 경전의 신에
게 잠시 기도를 한다. 첫 의식을 드렸던 때처럼, 바람에
풍경소리가 아름답게 리만투어에 가득 울려 퍼진다.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난 사엘이 제단 위로 올라가, 제
단의 불을 등지고 서서는 모인 이들을 바라본다.
“나의 음성이 바람에 깃들일 것입니다.”
제단 언덕 아래 모인 이들에게도 사엘의 음성이 들린
다.
“인간이 이 땅에 있기 전부터, 경전의 신은 이곳에 영
으로 머물러 계셨습니다. 경전의 신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내고, 공중을 나는 새들과,
물속에 사는 동물들, 육지에 사는 동물들, 그리고 인간
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도록 이곳을 축복하셨습니다.
하란님은 경전의 신의 뜻을 따라 지파를 이루셨고, 우
리는 자손 대대로 이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엘이 제단으로 몸을 돌려 무릎을 꿇는다. 바람이 조
금 세게 일고, 풍경소리가 좀 더 크게 울려 퍼진다. 사
엘이 마을 사람들이 아닌, 신의 영에게 말한다.
“경전의 신이시여. 이 땅에서 벌어진, 억울한 죽음, 비
통한 죽음, 서로에게 칼을 겨누어 흘린 수많은 피를 용
서하여 주소서.”
사엘이 말하자, 모인 이들도, 잘못했다고 용서를 빈다.
누가 전쟁을 일으켰던, 칼을 먼저 겨누었던, 이곳에 수
많은 피가 흘려졌던 건 사실이고, 그동안, 가족, 친구,
이웃을 잃었지만, 다시 이 땅을 재건하고, 먹고 살기 급
해 애곡 할 시간도, 무고한 죽음에 대한 회개와 용서도
제대로 하지 못했었다.
옛 수장들도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인다. 이들은 모두
나라가 세워지기 전, 각 지파의 수장들이었고, 그들이
이 땅을 이 자손들을 잘 거두고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이다.
“경전의 신이여. 저의 죄입니다. 수장으로서 이곳을 평
화롭게 지키지 못했습니다.” 라함이 말하자, 하갈도,
“제 세대의 잘못입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그
리고 이 땅의 후손들은 지켜주시고 축복하여 주소서.”
라고 말한다.
사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제단을 등지고 서서 다시 말
을 잇는다.
“나의 음성이 바람에 깃들일 것입니다. 귀가 있는 자
들은 들으세요. 경전의 신은 여러분을 용서해 주셨습
니다. 그리고 이 땅을 회복시켜 주시고, 이 땅에 축복을
내리시고, 자손이 번창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이
땅에 다시는 다툼과 분쟁으로 피 흘리게 하지 마세요.”
사엘의 말에 모두들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이라도 하듯
고개들을 끄덕인다. 그들의 세대에 겪은 일들이 너무
도 처참하고 고통스럽고 끔찍했기에, 다시는 그런 일
들을 겪고 싶지 않고, 그들의 후손들은 축복과 번성 속
에 화평하게 살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모두 경전의 신의 축복과 사랑을 받은 자들
이고, 경전의 신께서는 자손 대대로, 언약을 지키실 것
입니다..”
잔잔한 바람이 다시 일더니, 풍경 소리가 청량하게 울
려 퍼진다. 사엘의 말을 들은 이들의 마음에 잔잔하게
감동이 일어, 어떤 이들은 가슴에 손을 대고 있고, 어떤
이들은 두 손을 마주 잡고 있고, 어떤 이들은 여전히 땅
바닥에 엎드려 있거나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
모인 이들의 마음이 평온하고 따스하고, 잔잔하면서,
울컥하지만, 슬픔이 아닌, 그렇다고 신명 난 기쁨도 아니지만, 뭉근하게 풀어지는 뭉클한 느낌이 든다.
풍경 소리가 잠시 멈추고, 산들 산들 부는 바람사이로
사엘의 음성이 들린다. “태초에 경전의 신이 이곳에 영
으로 머무르셨듯, 경전의 신은 경전에만 머물거나, 이
곳, 제단의 불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경전의 신은 여러
분 모두의 마음에 존재하십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경전의 신을 경전의 신이 아닌, 신의 영이라 선포할 것
입니다. 누구든 신의 영을 부르면 신의 영이 당신의 음
성에 귀 기울이실 것이며, 누구든 신의 영을 찾는다면
신의 영이 당신 곁에 임재할 것입니다. 그러니 신의 영
은 보이지 않지만, 여러분의 믿음과, 마음과 생각에 존
재하실 것입니다.”
모인 이들과 제단 앞에 있는 이들이, 신의 영이라고 부
르며, 저마다, 웅성거린다.
“그럼 이제 신전에 안 가도 되는 거야?”
“제단의 불은 또 사라지나?”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믿지?”
“경전은?”
“신의 영을 믿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지?”
사엘은 잠시 침묵한다. 모인 이들이 무슨 의문을 가지
고 있으며, 그녀가 하는 말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을 짐작한다.
사엘이 다시 입을 연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있
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이미 신의 영
이 존재하십니다. 그러니, 귀가 있는 자들은 들으세요.
여러분은 신의 영의 사랑과 축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여러분의 온 마음과, 뜻을 다하여, 신의 영을 섬기고 사
랑하세요. 그리고 서로 사랑하세요. 사랑한다는 것은
믿어 주는 것이고, 이해해 주는 것이고, 나누어 주는 것
이며, 서로를 돌봐 주는 것입니다.”
사엘의 말에 모인 이들의 마음에 다시 감동이 인다.
사엘이 책을 한 권 꺼내 들자, 제단 앞에 있는 이들이
책을 바라본다. 리만투어에는 사환들이 미리 준비한
책을 나누어 준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책을
본다.
“이 책에는 신의 영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우리들의
이야기가 적혀 있으며, 신의 영이 가르쳐 주시는 삶의
지혜와 여러분들의 믿음을 견고히 해줄 말씀들이 적혀
있습니다. 제사장이 아니어도, 여러분 모두 이 이야기
를 읽을 수 있고, 여러분들의 삶에 적용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밤마다 사엘의 방에 불이 켜져 있었던 것은 사엘이 이
책을 집필했기 때문이다. 사엘은 신의 영의 감동을 받
아 때로는 들리는 대로, 때로는 보여지는 대로 때로는
경험하거나, 혹은 제사장 집에 있었던 경전들을 토대
로 이 책을 집필한 것이다. 사람들 모두 쉽게 구하고,
읽을 수 있도록 한 권으로 만들었다.
책을 받아 든 사람들이 책장을 넘기며, 읽어 본다.
멀리 있거나, 제단의 불에 존재하거나, 혹은 제사장을
통해 존재하던 경전의 신이 이제는 신의 영이되어 사
람들이 읽는 눈에, 느끼는 마음에, 더 가까이 혹은 더
깊이 각자에게 존재하는 것이다.
사엘은 제단 앞에서 책을 읽는 이들을 바라본다. 수아
와 밧세 여람이 번갈아 가며, 언제 이런 걸 다 만들었어
라는 칭찬과 격려를 담은 눈빛으로 사엘의 얼굴을 바
라본다.
사엘은 수아와 눈이 마주친다. 그는 부름 받은 왕으로
서 감당해야 하는 소명과,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본분
을 다하기 위해 고군 분투 하고 있다. 그의 곁에서 더
많은 힘이 되어주고, 그의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누어지
고 싶었지만, 그녀가 생각한 만큼 수아를 도와주지 못
한 거 같고, 또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게 되는 것 같아
미안하다. 하지만 수아는 신의 영의 부름을 받은 왕이
고, 신의 영이 그의 길을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실 것
이다.
밧세가 사엘과 눈이 마주치자,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
게 만드는 특유의 미소를 입가에 지으며, 눈을 찡긋한
다. 그들 사이에 밧세가 없었다면, 그들이 과연 지금까
지 친구로 잘 지낼 수 있었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밧세
는 그들의 든든한 버팀목 이자 중재자였고, 그들 모두
가 가장 사랑한 친구다. 사엘은 밧세의 깊고, 신실한 눈
을 보자, 마음이 안심이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여람의 얼굴을 바라본다. 약 열 걸음 정도 떨어
져 있는 거리에 있는데도, 그의 눈동자에 그녀의 얼굴
이 새겨진 것이 보인다. 여람의 눈은 그녀를 향해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지금도 그는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바라본다. 기나긴 시간과, 여러 일들이 있
었어도, 여람은 그녀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여람은 그의 운명은 사엘을 향해 그렇게
이미 정해져 있고, 그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 변하지 않
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자, 오히려 그녀를 향한 애달았
던 마음이 평온으로 바뀌었다. 사엘은 그녀가 받아들
이지는 않았지만, 여람에게서 충분한 사랑을 받았고,
그녀 곁에 늘 있어준 여람이 다시 한번 고마워 미소를
짓자, 여람도 미소를 짓는다.
사엘은 제단 옆에 서있는 카야를 바라본다. 카야가 없
는 세상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늘 사엘 곁에
있었다. 사엘은 가끔 카야에게서 엄마 하란은 이랬을
것이라고 느낀 적도 있었다. 하란에 대한 사랑을 평생
간직하고, 그녀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그녀 곁을 지키
고 있는 그의 평생의 사랑과, 헌신을 생각하자,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카야의 눈에도 눈물이 맺힌다.
마지막으로 사엘은 라함, 하갈, 마하살, 레이를 보며,
지파 수장에 대한 예를 갖추어 가볍게 목례를 한다.
그리고 하디를 보며, 미소를 짓는다. 하디는 그녀에게
큰 언니 같은 사람이었다. 사엘은 잠시 눈을 감고, 먼저
간 유모도 떠올린다. 사엘은 한 번도 카야, 하디, 유모
와 떨어져 있어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하란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사엘은 그들과 모든 것을 함께
했었다.
사엘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고는 멀리 사람들 사이
로 보이는 리만투어를 바라본다. 그녀의 모든 삶이 담
겨졌던 곳이고, 그녀가 사랑하던 이들을 보냈던 곳이
다.
풍경소리 사이로, 사악 사악, 파도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그녀의 귀에만 신의 음성이 들린다.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지명하고 불렀나니. 내가
너로 인해 기쁘도다. 잘하였다. 나의 사랑하는 자여.”
사엘은 그날 리만투어에서 신의 영의 음성을 다시 둘
은날, 신의 영이 그녀에게 명한 일을 감당하면서, 그녀
는 평온을 찾았고, 그녀의 소명에 감사했으며, 신의 영
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고, 그녀의 상하고 고통스러운
마음이 치유되었다.
이제 그녀는 그녀가 해야 하는 마지막 일을 감당하는
것이다.
잠시 바람이 멈추고, 풍경 소리도 멈춘다. 사엘의 음성
이 리만투어에 울려 퍼진다.
“신의 영은 여러분을 축복하고 지켜 줄 것입니다. 신의
영은 여러분을 향해 빛날 것이며, 여러분에게 은혜와
평강을 주실 것입니다. 이 땅을 신의 영이 깃든 축복과
번성의 땅으로 지켜 주실 것입니다.”
사엘이 말을 마치고, 제단 쪽으로 몸을 돌리자, 제단의
불이 하늘로 솟구친다. 리만투어에 있는 이들도 제단
의 불꽃이 보인다. 사엘의 눈에 제단 불꽃 속에서 엄마
하란과, 라단, 그리고 람이 서 있는 것이 보인다. 그때
카야의 눈에도 불꽃 속에 있는 이들이 보인다. 그를 바
라보는 하란의 얼굴에 고맙고 수고했다는 미소가 담겨
있다. 카야도 이제 그가 가야 할 길을 알아 채고는, 사엘 옆에 선다. 그리고 사엘도 그를 말리지 않는다. 그 둘이 사랑하는 이들이 저 불꽃 속에서 그들을 기다리
고 있다.
사엘의 귀에 신의 영의 음성이 들린다. “너는 내 것이
라. 내가 너를 지명하고 불렀나니.”
“신의 영의 부름을 받은 자, 듣겠습니다.”
“내가 너로 인해 기뻤도다.”
눈물이 사엘의 볼을 타고 흐른다.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돌아가야 할 길도 인도하리니.”
제단의 불꽃이 하늘을 향해 치솟더니, 불꽃이 사라지
자, 사엘과 카야도 제단으로 걸어가며 사라진다.
그리고 하늘에서 타지 않는 불꽃이 비처럼 내린다. 사
람들의 마음에 다시 감동이 인다. 이들의 마음에, 신의
영이 깃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