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을 모르는 현대인?
상상력을 발휘해서 '상인들만 살고 있는 고립된 마을'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 상인 중에 한 명 A는 유일하게 셈을 하지 못하는 상인입니다. A는 다른 사람과 물건 교환을 할 때 불편함이 있을까요? 불편함이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A는 자신이 셈을 할 줄 모른다는 사실만 잘 숨길 수 있다면 거래의 상대방이 모든 계산을 알아서 해주기 때문이지요. 설령 상대방이 나쁜 마음을 먹고 A를 속이는 것 같다면 A는 그 즉시 거래의 상대를 바꿔 조건이 같은지 확인만 하면 됩니다. 모든 마을 사람들이 작정하고 A를 속인다면 A가 손해를 볼 수 있겠지만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거래의 상대방은 A가 셈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반대의 상황에서는 조금 다른 현상이 일어납니다. 만약 B가 그 마을에서 유일하게 셈을 할 수 있는 상인이라면 B는 권력을 독점하게 됩니다. 셈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가격을 선제시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선택입니다. 그런데 셈을 할 줄 모르는 사람끼리 만나면 서로 가격을 제시하지 않고, 상대방의 '셈 무능력'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마을 안에서는 B가 유일하게 '셈 능력자'인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됩니다. 이제 모든 거래자는 B에게 적당한 가격의 산정을 맡깁니다. B는 상행위를 하지 않고도 '셈 수수료'만으로 축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위의 두 사례에서 '현대인에게는 기본적인 소양과 같은 셈'은 암호code입니다. 그리고 그 암호는 소수가 공유할수록 독점에 대한 파급력이 커집니다. 반대로 많은 사람에게 암호가 공유될수록 암호를 아는 사람만 이익을 보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외부효과가 더 커집니다. 암호에 대한 접근이 널리 퍼진 상태에서는 '암호를 이용하여 얻는 이익'보다 '정직한 암호의 사용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명예'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법률(또는 법전)이 law code라 불리는 이유도 같습니다. 법은 현대의 새로운 암호입니다. 누군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만든 암호는 아니지만 대중이 외면하면 권력의 독점현상은 따라옵니다.
수학에서는 아주 재미있는 사례가 하나 있습니다. 흔히 '파란 눈 문제'라고 불리는 이 문제는 여러 변형된 갈래version가 있어서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상상 속에 만들어진 한 마을에는 파란 눈을 가진 사람과 녹색 눈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이 마을에는 아주 이상한 규칙이 하나 있는데, 자신이 파란 눈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날 그 마을을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들은 자신의 눈동자 색을 직접 확인할 수 없고, 상대방에게 눈동자의 색을 알려주는 것도 금지되어 있습니다.
(벌써 머리가 아프신가요? 이런 사고 실험은 머리를 말랑말랑하게 해 주니 읽어주는 것도 좋습니다.)
마을에 파란 눈 5명과 녹색 눈 5명이 산다면 이들은 평화롭게(?) 아무도 마을을 떠나지 않고 잘 살아갑니다. 파란 눈을 가진 A는 파란 눈을 가진 다른 사람 B, C, D, E를 보면서 속으로 '어이구... 저 사람들은 불쌍하게 파란 눈이네? 그렇지만 자신이 파란 눈이라는 걸 모르니까 여기서 잘 살고 있구나.' 이렇게만 생각할 뿐 나머지 파란 눈에게 눈동자의 색깔에 대해서 말해줄 수 없으니까 말입니다. 이때 외부에서 한 현자가 옵니다. 그리고 모든 마을 사람들을 불러놓고 말합니다. '이 마을에는 적어도 한 명의 파란 눈을 가진 사랍이 있습니다.' 이것을 명제 X라고 하겠습니다. 이제 명제 X는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사실이 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정확히 5일째 되는 날 A, B, C, D, E는 모두 마을을 떠나게 됩니다.
설명을 쉽게 하기 위하여 A 혼자 파란 눈이라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A 혼자 파란 눈일 때, A를 제외한 마을의 모두는 A가 파란 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A는 자신의 눈동자 색깔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마을 모두가 녹색 눈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때 현자가 마을에 와서 명제 X를 말하면 A는 자신이 파란 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현자가 온 그날 마을을 떠나야 합니다.
만약 A와 B만 파란 눈이라면 A는 'B가 마을에 사는 유일한 파란 눈'이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반대로 B는 'A가 마을에 사는 유일한 파란 눈'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현자가 명제 X를 말하면 A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오늘 B가 마을을 떠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B도 마찬가지입니다. B는 반대로 'A가 오늘은 마을을 떠나는 날이구나!'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나서 A는 떠나지 않은 B를, 그리고 B는 떠나지 않은 A를 확인합니다. 그리고 서로가 그때부터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마을에 단 두 명 있었던 파란 눈 중에 한 명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이틀째 되는 날 A와 B는 나란히 마을을 떠나게 되는 것이지요. 세 명이라도 마찬가지로 셋째 날, 네 명이라면 나흗날 모두 동시에 떠나게 됩니다.
다시 파란 눈이 다섯 명 있는 사례로 돌아가보겠습니다. 명제 X는 구성원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A를 비롯한 파란 눈은 나머지 파란 눈 네 명을 보면서 '이 마을에 적어도 한 명은 파란 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F를 비롯한 녹색 눈은 A를 비롯한 파란 눈 다섯 명을 보면서 '이 마을에 적어도 한 명은 파란 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법률에서는 이런 것을 '공지의 사실'이라고 합니다. 공지의 사실이란 보통의 사람이라면 의심하지 않는 사실, 그래서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런데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 곧 상식은 아닙니다. 다시 파란 눈이 두 명인 사례로 돌아가보겠습니다. 파란 눈 A와 B를 비롯한 마을의 모든 사람은 명제 X를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A는 '마을에 파란 눈이 한 명 있는데(명제 X), B는 그 사실을 모르네!'라고 생각합니다. B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을에 파란 눈이 있는데(명제 X), A만 그걸 몰라서 평화롭게 잘 살고 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현자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상대방도 알고 있는 사실'로 바꾸는 역할을 합니다. 이제 A는 'B도 명제 X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튿날 B와 함께 마을을 떠납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암호code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것과 '상대방도 암호를 알고 있다'라는 것을 자신이 아는 것은 다릅니다. 법도 그리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law code도 모든 사람이 그 암호를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상대방도 법을 잘 알고 있구나. 그러니까 법률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겠다.'라는 생각하는 사회를 꿈꿉니다. 그래서 어렵다는 걸 알면서, 사람들이 안 읽고 그냥 대충 넘어간다는 걸 알면서, 그리고 이 주제가 이 플랫폼에서는 인기가 없다는 걸 알면서 계속 이런 주제로 글을 씁니다. 그런 사회가 오면 저는 뭘 먹고 사냐고요? 알잖아요. 그런 사회가 오지 않는다는 것(명제 Y). 명제 Y 또한 상식입니다.